<144화>
루인은 남부의 귀족가를 정찰하고 있는 벌레들의 수를 절반 이상 줄여야만 했다.
며칠 적응한다면 벌레들의 감각을 살피면서도 충분히 일상생활이 가능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오산이었다.
아므카토가 통제하는 벌레들의 감각이 뇌리로 밀려들어 오는 순간, 또다시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걸음을 떼기조차 힘들었던 것이다.
아무리 대마도사의 연산 능력이라지만 도저히 적응하기 힘들 정도.
지금 이 순간에도 벌레들이 보내오는 감각을 다스리느라 이미지나 술식 수련을 이어 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쯤이면 어브렐가가 하이베른가의 새로운 봉신가가 되었다는 소식이 남부 전역으로 퍼져 갔을 터.
남부 귀족들의 정세를 살피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어떻게든 지금의 이 버거운 정신을 유지하는 데 익숙해져야만 했다.
-괴물……!
하나 아므카토에게는 자신과 감각을 공유하면서도 태연하게 일상생활이 가능한 루인이 신기한 동물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경험했던 인간은 자신의 감각권(感覺圈)에 조금이라도 연결되면 곧장 정신 폭주를 일으켰다.
심지어 바로 죽어 버린 인간들도 다수.
아므카토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루인이 멀쩡하게 정신을 유지하는 자체만으로도 불가사의 그 자체인 것이다.
많이 산 인간이라고는 하는데 그건 더 믿을 수 없었다.
분명한 소년의 외양.
그런 주제에 많이 살아 봤자 얼마나 살았겠는가?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자신의 감각을 제공하는 대가로 계약을 했으니 받을 것만 빨리 받아 내면 그만이었다.
-인간. 정신 강화 룬마법은 언제 가르쳐 주는 거지?
“기다려. 얼마나 됐다고.”
-설마 뒤통수를 치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마족이냐?”
태연하게 인간보다 마족을 아래로 깔아 보는 루인의 태도에 기가 찰 지경.
그렇게 아므카토가 새로운 재물(?)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루인에게 반가운 인물이 찾아왔다.
아카데미의 본관에서 느긋하게 걸어 나오고 있는 화사한 금발의 청년.
멋들어진 ‘뮬란드의 휘장’을 예복에 매달고 찾아온 그는 아라혼이었다.
“여어. 친구.”
왕가의 신성한 이름, 뮬란드를 미들네임으로 하사받은 그는 더 이상 왕실의 흔한 왕자가 아니었다.
왕위 계승자, 왕세자의 권위를 한 몸에 짊어지게 된 아라혼.
단숨에 핸드와 기수에 맞먹는, 최상위의 권력에 다가간 것이다.
“보기 좋군.”
루인이 아라혼의 가슴에 자리 잡은 뮬란드의 휘장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아라혼의 표정은 별로 좋지 못했다.
“왜 그런 얼굴이지?”
“정작 좋은 상황은 아니라서 말이지.”
쟈이로벨에 의해 자아를 강탈당한 채로 왕세자를 선언한 데오란츠 국왕.
그는 극도의 혼란을 겪으며 모든 국왕의 정무와 접견 요청을 거부하고 장기 칩거에 들어갔다.
당연히 그런 상황에선 왕세자의 즉위식이 무기한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왕세자의 즉위식 또한 왕의 대관식 못지않게 성대하게 치른다.
국왕이 부재중인 상황에서 정식 책봉을 할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런가.”
상황 설명을 모두 들은 루인의 표정 역시 아라혼과 비슷하게 심각해졌다.
국왕 데오란츠의 의도야 뻔한 것.
지엄한 국왕의 명을 번복할 수는 없으니 왕의 직무를 중단해서라도 왕세자의 책봉을 지연시키려는 것이었다.
한데, 아라혼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 나왔다.
“너는 혹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는 건가?”
내심 놀랐지만 루인은 내색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게 아니고는 해석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데오란츠 국왕은 살면서 자신에게 한 번도 웃어 준 적이 없는 냉혹한 아버지였다.
아니, 아예 관심이 없었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자신이 왕의 정무에 개입된 상황이 아니라면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든 인간.
그게 자신의 아버지, 데오란츠라는 사람이었다.
“내 아버지의 성격상 절대로 할 수 없는 행동이셨지. 게다가 평소에 아무런 언급도 없이 왕가의 성스러운 이름 뮬란드를 하사하시다니…… 그건 차라리 메마른 하늘 아래 서서 벼락 맞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힘든 확률일 것이다.”
르마델의 역대 국왕들 중에서 성스러운 뮬란드를 미들네임에 새긴 왕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만큼 뮬란드는 왕가에 신성시되는 이름이었다.
왕국의 위대한 방패라 불렸던 역사 속의 뮬란드 왕은 제국의 침공을 무려 다섯 차례나 막아 낸 신적인 영웅.
명예와 명성만 따진다면, 오히려 초대 국왕 소 로오 르마델보다 더 위대한 영웅이 바로 뮬란드 왕이었다.
초대 국왕을 제외하면 역대 르마델의 국왕들 중에서 유일하게 초인의 경지를 정복했던 기사이기도 했다.
“비록 실질적인 권력이 없는 왕세자라 해도 1왕자와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다.”
“나는 지금 사람의 정신을 조종할 수 있는 마법을 가지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데.”
하이렌시아가가 대전사로 내세운 알칸 제국 출신의 초인 기사.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루인이 그를 제압한 방식은 틀림없는 정신 마법이었다.
드래곤과 초월자들의 영역이라는 정신 조종 마법이 정말로 하이베른가의 대공자에게 가능한 것이라면 반드시 확인해야만 했다.
“그런 마법이 가능했다면 이미 난 신적인 존재가 됐겠지.”
그건 마신 쟈이로벨의 권능.
그것도 마법적 역량으로 데오란츠 국왕의 정신을 조종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그의 의식을 장악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마신에게도 영혼과 정신을 조종할 수 있는 권능은 불가능한 영역.
“정말 네 짓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
그렇다면 그날의 행동이 정말 아버지의 진심이라고?
사람의 모든 행동에는 인과가 있다.
그간의 아버지의 행동과 너무 맞아떨어지지 않는 결과라서 아라혼은 또다시 당혹스러웠다.
“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일단은 더 시급한 문제가 있었기에 아라혼이 화제를 돌렸다.
“어브렐가를 하이베른가의 새로운 봉신가로 맞이했다는 게 사실인가?”
“그렇다.”
아라혼까지 알고 있는 것을 보니 남부는 물론 수도 왕성까지 소문이 쫙 퍼진 모양.
아라혼이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헛소문인 줄 알았더니 정말 놀랍기 짝이 없군. 그 회색의 어브렐가가…….”
왕국의 허리, 중부의 용병들을 장악하고 있는 어브렐가는 수백 년간 대외적으로 철저한 중립을 천명해 왔다.
그런 도도한 자들이 하루아침에 하이베른가의 권속이 되었다는 건 쉽게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워낙 완고하게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국왕이 왕명을 내리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을 정도였다.
“표정을 보니 어브렐가 역시 네 작품인가 보군.”
“부정하진 않겠다.”
“호오…….”
처음 루인을 만난 그날부터 지금까지 그의 행동들은 모두 천재지변에 가까운 것이었다.
불경한 하대와 협박에 이은 갑작스런 친구 제안.
왕국 제일의 검술명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인 주제에 마법학부 입학.
초인 대전사와의 대기사전을 압도적인 마법 실력으로 승리한 비현실적인 마도(魔道).
게다가 모든 권력의 역학 관계를 무시하는 갑작스러운 왕세자의 공표는 대체 무슨 수로 이끌어 냈단 말인가?
거기에 이제는 회색의 어브렐가를 복속시킨 것까지 제 실력이라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라지만 이런 상식 밖의 역량은 도저히 저 나이에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다.
한데 이어진 대공자의 말은 지금까지의 모든 놀람을 합한 것보다 더욱 충격적이었다.
“아라혼.”
“응?”
“때론 거짓을 일삼는 것보다 진실을 외면하는 게 더욱 처참한 결과를 낳는다.”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지?”
황당해하는 아라혼.
그러나 루인의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5년 전 라슈티아나 왕비님의 사고.”
“뭐……?”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루인에게 바짝 다가간 아라혼.
이미 그의 얼굴은 악마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너 그 일을 어떻게?”
“내가 아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왕실의 모든 구성원들이 외면하고 있는 하나의 진실이지.”
“진실?”
“사람이, 그것도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그런 참변을 겪고도 정말 살 수 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
“네 이놈!”
차아앙!
결국 검을 뽑아 든 아라혼.
루인을 찢어발길 듯한 그의 무시무시한 두 눈이 사납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외면하고 있군.”
루인의 입매가 조소를 그려 내고 있었다.
집단적인 망상증.
왕실은 고의로 스스로의 역사를 부정하고 있다.
이어 루인의 입에서 왕실이 외면하고 있는 적나라한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단검이 자루 끝까지 파고들었다. 그런 수준으로 목이 찔리고도 인간이 살 수 있는 확률은 한없는 제로에 가깝지.”
비웃는 루인.
“한데도 왕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난 라슈티아나 왕비님에 대해서 누구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모두가 자연스럽게 환담을 나누며 식사를 해 댔지. 왜일까?”
아라혼의 온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그, 그만!”
피식.
“국왕은 절대로 그런 짓을 벌여선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지.”
“이, 이……!”
“아라혼.”
루인의 차분한 눈빛.
“왕실은 모두 집단적인 최면과 세뇌에 걸리기라도 한 건가? 라슈티아나 왕비님께서 알칸 제국의 공주라서? 아무리 외교적인 일이 걸린 일이라지만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한 명도 아니고 모든 왕족들이 일제히 외면할 수 있는 거지?”
아라혼이 루인의 멱살이 잡는다.
“감히! 왕실의 권속 아래 있는 네놈이!”
하지만 여전히 무심한 루인의 눈빛.
“더 이상 네놈에게 입을 여는 것을 허락지 않겠다! 감히 르마델의 신하 된 자가 어찌 그렇게 함부로 입을……!”
“아라혼.”
“지껄이지 마라!”
루인이 자신을 눈빛을 피하는 아라혼의 머리를 잡고 다시 시선을 맞추었다.
“아라혼.”
“네, 네놈! 감히!”
“날 친구로 여긴다면 내 눈을 피하지 마라.”
“…….”
호수처럼 잔잔한, 끝없는 바다와 같은 루인의 동공에 아라혼은 마치 빠져들 것만 같았다.
“너……!”
“어머니는 죽었다.”
“…….”
“네 아버지, 데오란츠 국왕에 의해.”
이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모두가 역사에 괴물로 남을 뿐이다.
그런 괴물들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사악한 괴물이 되었던 인물이 바로 이 아라혼이었다.
당장은 아플 것이다.
소스라치도록 두려울 것이다.
하지만 루인은 이 집단 최면의 광기에서 그를 벗어나게 해 주고 싶었다.
또다시 그를 왕국의 죄인으로 남게 하긴 싫었다.
결국 아라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루인…….”
모든 것을 쏟아 낼 것만 같은 표정.
루인이 담담하게 아라혼의 시선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래. 아라혼.”
휘우우우우-
사납게 불어온 에어라인의 바람.
루인의 거친 흑발이 어지럽게 휘날린다.
“지금의 왕비는 대역이다. 그리고 곧.”
루인의 시선이 머나먼 지상의 왕성을 향한다.
“그녀는 한계에 도달할 거다.”
아라혼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고 처연한 심정으로 루인의 시선을 함께 좇을 뿐이었다.
그의 동공은 시푸른 하늘처럼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