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비스토의 육체를 차지한 쟈이로벨은 곧장 에어라인을 박차고 르마델 왕국의 남부로 떠나갔다.
어차피 비스토는 생도들은 물론 교수들까지 기피하는 존재라 그 일을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없어져 준다면 속이 시원한 계륵 같은 인물이어서 루인으로선 다행인 것이다.
쟈이로벨의 첫 번째 임무는 악제에게 잡아먹힌 마계의 영혼들을 추적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왕국의 동태, 무엇보다 남부 권력의 역학 관계를 중점으로 살펴 달라는 루인의 부탁이 있었다.
또한 그는 렌시아가에 거의 도착했을 검성 월켄이 무사한지도 확인해야 했다.
쟈이로벨의 이번 임무들은 꽤 중요한 것이다.
-끄아아아아아……!
마신 쟈이로벨의 강력한 권능에 의해 비스토의 육체, 즉 숙주를 잃어버린 아므카토.
그는 루인의 영혼에 자리를 잡자마자 연신 처절하게 비명을 질러 댔다.
강력한 인과율로 묶인 종속의 관계가 강제로 해제되어 버렸으니 영혼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이다.
반면 쟈이로벨과 루인의 관계는 역설적이게도 계약으로 묶인 상황이 아니었다.
루인은 회귀한 인간.
한번 영혼으로 맺은 종속의 계약은 결코 중복될 수 없는 것이 세계의 섭리였다.
오히려 그런 상황이 쟈이로벨의 운신을 더욱 자유롭게 한 것이다.
-끄으으으…… 대체 이건……!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루인의 영혼에 안착한 순간.
곧바로 느껴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한 영혼의 격(格).
비스토와는 비교조차 무의미한 그 아득한 영격에 절로 전율이 치밀 정도였다.
이 정도면 마왕, 아니 마신이라고 해도 무방한 수준.
어떻게 인간이 이런 영격을 보유할 수 있는지 아므카토는 미칠 듯한 궁금증이 일어났다.
-역시 넌 인간이 아니었나!
이 정도면 평범한 수준의 숙주 따위가 아니었다.
마음속에서 탐욕스러운 욕망이 피어올랐으나 오히려 이런 존재와 함부로 계약을 맺었다가는 역으로 자신이 종속당할 위험까지 있었다.
“헛소리 그만하고 넌 무슨 능력이 있는지나 빨리 말해 봐.”
루인으로선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므카토는 고작 마계의 마장(魔將).
마신 쟈이로벨의 역량에 익숙한 자신으로서는 분명 실망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난 벌레들의 왕이다!
“그래서?”
-나는 세상의 모든 벌레들을 부릴 수 있다.
“뭐……?”
당황스러운 아므카토의 권능.
아니 권능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그래도 명색이 마계 군단을 통솔하는 장군인데 고작 벌레들을 조종하는 능력이라니…….
-단순한 조종이 아니다! 난 벌레들의 모든 감각을 내게 귀속시킬 수 있다!
“감각을 귀속한다?”
-맞다! 벌레들의 후각, 청각, 시각 등을 나는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얼핏 보면 마장급치고는 다소 없어 보이고 황당하기 짝이 없는 권능이었다.
그러나 명석한 루인은 그의 능력에 담긴 무서움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렸다.
“거리 제한 같은 건 없나?”
-없다! 차원과 차원 같은 아예 인과율이 부정되는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이 세계의 벌레들은 모두 내 뜻 아래 통제된다!
“호오.”
쟈이로벨이 다른 지대의 고작 마장급 마족을 알고 있는 사실이 조금 이상했는데, 가만 보니 실로 무서운 권능을 지닌 놈이 아닌가?
벌레의 의지를 조종하고 그들의 감각을 공유할 수 있는 아므카토의 존재는 모든 정보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루인의 두 눈에 금방 열기가 어렸다.
“통제할 수 있는 범위가 어느 정도지? 수백 수천만 마리의 모든 감각을 동시에 공유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은데?”
-그건 불가능하다! 제대로 통제가 가능한 범위는 수십 마리 수준이다!
아니 수십 마리가 어디냐고!
그것만으로도 거리 제한 없이 대륙의 모든 곳을 샅샅이 수색할 수 있거늘!
하지만 이어진 아므카토의 대답에 루인은 금방 황당해졌다.
-대신 벌레들이 죽으면 타격이 크다. 벌레들의 민감한 감각을 공유하다 보니 강제로 연결이 해제될 때 막대한 고통이 뒤따른다.
인상을 찡그리는 루인.
“외부 요인에 의해 갑자기 벌레가 죽으면 넌 어떻게 되는 거지?”
-한동안은 제대로 정신을 유지할 수 없다. 그사이에 이 아므카토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할지를 장담할 수가 없다.
비로소 루인은 그동안 비스토가 왜 그토록 미친놈마냥 아카데미를 활보하고 다녔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가끔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이놈의 영향이 컸던 것.
자신도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루인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비스토와 나는 다르지.’
만 년 이상 쌓아 온 광대무변한 영격.
만약 그런 자신의 정신이 아므카토의 폭주를 감당할 수만 있다면.
생명조차 되살릴 수 있는 쟈이로벨의 가장 강력한 권능에도 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벌레왕 아므카토의 재발견!
“네 권능을 시연해 봐라. 물론 무리는 하지 말고.”
괜히 무리하다가 통제하던 벌레가 파리채에 맞고 죽어 버린다면 자신도 비스토처럼 광대가 될 수 있었다.
-알았다.
그때.
머릿속이 간질거린다.
정신의 말초를 자극하며 밀려들어 오는 수많은 감각의 정보들!
무수한 겹눈이 보여 주는 총천연색의 정보.
주변의 모든 화학적 결합을 가늠할 수 있는 민감한 후각.
되돌아오는 음파의 파동으로 사물을 분간하는 날갯짓의 진동.
그렇게 인간의 몸으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민감한 감각들이, 아무런 수용체도 거치지도 않고 즉각적으로 뇌로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으으…….”
루인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가다듬었다.
순간적으로 밀려들어 오는 정보의 양이 너무 방대했기 때문.
대마도사의 초월적인 연산력으로도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정보의 양이었다.
그것은 마치 수백 개의 눈과 귀로 세상을 보고 듣는 것만 같았다.
-너, 너는 정말 인간이 맞는 건가?
자신이 느끼고 있는 모든 감각을 하나도 빼지 않고 고스란히 공유했는데도 제정신을 유지하는 인간이라니!
“…….”
루인은 마치 광인처럼 웃고 있었다.
영토 곳곳을 누비는 벌레들의 감각을 통해 순간적으로 자신은 르마델 왕국 전체를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그건 마치 신(神)이 된 기분.
“너 나중에 꼭 비스토에게 되돌아가야겠나?”
-그, 그걸 말이라고!
종속의 계약이 강제로 끊어지는 경험은 이번이 처음.
앞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지금도 내내 불안한 상황이거늘 아예 비스토를 포기하라니!
게다가 그 말은 그 무시무시한 마신 쟈이로벨과 같은 영혼에서 지내라는 의미이지 않은가?
이 인간의 무시무시한 영격을 미뤄 볼 때 불가능할 것 같진 않았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실로 끔찍한 재앙이었다.
“잘 생각해 봐. 네 재물은 되어 줄 수 없어도 느끼다시피 내가 평범한 인간은 아니니까. 네 경지에 도움이 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말이지.”
-그, 그건……!
“이참에 아예 그냥 권속을 바꾸지 그래? 어차피 에오세타카의 열광(熱狂)을 받은 경험도 까마득하잖아? 권속들에게 자신의 권능을 내어 주지 않는 군주가 무슨 군주냐고.”
광염 지대의 군주 에오세타카가 실종된 지도 수천 년이 흘렀다.
그의 권능과 축복을 기대할 수 없는 광염 지대의 권속들은 이 아므카토처럼 모두가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린 것이다.
“쟈이로벨은 다르지. 분명 권능을 자애롭게 내어 줄 거다. 어쩌면 너는 내 입김으로 혈우 지대의 마왕이 될 수도 있다. 너도 봤다시피 내게 그 정도 힘은 있어.”
-마왕(魔王)……!
마장 아므카토가 평생을 바라 온 꿈.
엄청난 위험 부담을 안고 인간계에서 영혼 섭식을 시도한 것 역시 모두가 그 마왕이 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평생을 혈우 지대와 싸워 온 광염 지대의 권속으로서 그런 배신행위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
-이 아므카토가 그런 저급한 유혹에 넘어갈 거라 생각하면 오산―
“나는 마신 쟈이로벨의 모든 마법을 이은 존재.”
-흥! 그게 무슨 상관……!
“네 가장 큰 약점은 불의의 사고로 벌레들이 죽었을 때 의식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마신 쟈이로벨의 정신 강화계 룬마법을 알고 있다.”
더 이상 아므카토는 상처 입은 야수처럼 날뛰지 못했다.
본래 마계의 마족들은 자신의 비전을 누군가에게 전수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 한다.
힘을 베풀 때도 종속들을 연명해 주는 수준으로만 그치지 절대 권능의 원천적인 비밀은 함께 나누지 않는 것이다.
수만 년 동안 이룩한 권능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만 남기려는 것.
그래서 아므카토는 마신 쟈이로벨의 정신 강화계 룬마법을 향한 강렬한 욕망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쟈이로벨 님께서 그걸 가만히 지켜볼 리가…….
“뭐 어때? 지금은 우리 둘밖에 없는데. 너도 시치미 뚝 떼고 쟈이로벨 앞에서만 조심하면 되는 거 아닌가?”
말이 되면서도 안 되는 신기한 어법.
분명 아므카토는 갈등하는 태가 역력했다.
루인이 쐐기를 박았다.
“아마 그게 네놈이 마왕이 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처럼 보이는데. 그럼 계속 그렇게 벌레가 죽을 때마다 미친놈처럼 살든가.”
루인의 말마따나 결정적인 순간에 의식을 잃어버리는 그 빌어먹을 부작용 때문에 그동안 아므카토는 수도 없이 일을 그르쳐 왔다.
틈만 나면 다른 권속들에게 전공을 빼앗기고 정신을 차려 보면 다른 군단의 감옥이질 않나……
심지어 다른 진영의 마군들과 함께 에오세타카의 군단을 향해 돌격한 적도 있었다.
그 일로 에오세타카의 분노를 사, 아므카토는 2천 년 이상 감옥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정말 이 아므카토에게 정신 강화 룬마법을 알려 줄 수 있단 말인가?
“속고만 살았나.”
-그 일을 정말 쟈이로벨 님에게 끝까지 비밀로 해 줄 수 있는가?
“어.”
다소 성의 없는 루인의 대답이었지만 결국 아므카토는 욕망에 무너지고 말았다.
-거, 거래하겠다! 영혼 섭식의 재물을 포기하는 대가로 네게 룬마법을 전수받겠다!
“네놈의 이름을 걸어.”
마족의 습성이라면 질릴 정도로 경험한 루인.
역시나 나중에 뒤통수를 칠 생각이었는지 아므카토는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꼭 그래야만 하는가?
피식.
“마족 간의 거래에서 이름을 걸지 않는 맹세가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를 뻔히 알고 있을 텐데.”
-아니, 넌 인간…….
“시끄럽다.”
인간인 주제에 감히 마족 간의 거래를 운운하는 것이 기가 찰 노릇이었다.
-알겠다. 이 아므카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좋아.”
루인은 실로 날아갈 듯이 기뻤다.
이렇게 순수한 기쁨만을 느낀 지가 얼마 만인지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
아므카토의 권능은 그만큼 자신에게 절대적인 힘이 되어 줄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었다.
루인이 곧장 아므카토에게 명령한다.
“통제할 수 있는 모든 벌레들을 동원해 르마델 왕국의 남부로 보내라.”
-남쪽이라면 어디로?
“지금부터 내가 불러 주는 모든 귀족가.”
이어 남부의 가문들 모두 하나하나 읊어 대는 루인.
그러나 아므카토는 각 가문들의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직접 보여 주지.”
그렇게 루인의 이미지, 심상이 열리기 시작하자.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하고 아득한 루인의 심상(心想) 세계가 아므카토를 집어삼켰다.
-이럴 수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마장으로 살며 마계의 온갖 풍파를 겪어 온 자신의 심상이 초라해 보일 지경.
-넌 정말 정체가 뭐지?
루인이 수많은 가문의 위치를 이미지 로 펼치며 비릿하게 웃었다.
“아주 많이 산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