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에오세타카의 권속들이 혈우 지대의 마신 쟈이로벨에게 갖는 두려움은 지대했다.
한데 에오세타카 당사자도 아니고 놈의 권속에 불과한 ‘썩은 벌레 아므카토’에게 한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에오세타카의 권속들이 스물 이상이나 인간계에서 활동하고 있다면 무슨 반응이라도 있어야 정상.
쟈이로벨의 존재를 안 이상 광염 지대를 무사하게 활보하려면 최소한의 성의라도 보여야 하는 것이다.
결국 유적 동굴 밖으로 나온 루인이 ‘교활한 삐에로’ 비스토를 찾아 나서기에 이르렀다.
“비스토가 묵고 있는 기숙사를 알고 있나?”
“대, 대공자님!”
더 이상 아카데미의 생도들은 자신을 생도로 취급하지 않았다.
이제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라는 자신의 신분을 모르는 생도가 없는 것이다.
뭐,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쪽입니다!”
기사 생도들 몇몇이 비스토의 기숙사로 자신을 안내하고는 절도 있게 경례하며 떠나갔다.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은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여기는 모양.
루인이 피식 웃으며 당직 생도를 향해 다가갔다.
“비스토의 방을 알고 싶은데.”
카운터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당직 생도가 침을 닦으며 슬그머니 일어났다.
“으응…… 누구…… 히이이익!”
북부인의 상징인 흑발.
깊고 차가운 두 눈.
최근 아카데미에 혜성처럼 등장한 하이베른가의 대공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505호입니다! 하지만 놈은 불길한 녀석입니다! 혹시라도…….”
“됐다. 계속 자라.”
비스토는 생도들에게야 불가사의한 이니그마(Enigma)겠지만, 녀석의 정체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루인에게는 그저 귀여운 먹잇감일 뿐이었다.
비스토가 숭배하고 있는 아므카토는 마왕도 아닌 고작 마장(魔將)급.
마계였다면 마신 쟈이로벨의 숨소리를 듣는 순간 도망쳐야 하는 불쌍한 녀석이었다.
‘시설이…….’
3등위 생도들의 기숙사인 이곳 3관은 루인이 묵고 있는 6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깔끔했다.
이곳저곳 보수 상태도 좋았고 무엇보다 각각의 방 크기 자체가 6관보다는 두 배는 더 넓어 보였다.
아카데미의 등위(登位) 체계는 이토록 무서웠다.
실력과 성과를 철저하게 가늠하여 자격을 부여하고 그런 자격에 걸맞은 혜택을 제공하는 것.
3등위도 이런데 4등위 생도들이 생활하고 있는 기숙사는 얼마나 크고 화려할지 보지 않아도 대충 예상이 가능할 정도였다.
덜컥.
노크도 하지 않고 505호의 문을 여는 루인.
달랑 팬츠만 입고 책상에 앉아 있던 비스토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으아아악! 넌!”
온갖 괴상한 그림과 기괴한 문양들로 가득한 비스토의 방.
한데 그것들은 루인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문자와 그림들이었다.
아므카토를 숭배하고 있다면 마계의 문양이나 언어가 담겼을 텐데 그런 것도 아니라서 조금은 이상했다.
아마도 이니그마로서의 신비함을 유지하기 위한 컨셉 같아 보였다.
“한심한 녀석.”
아카데미 내에서 재앙의 이니그마로 활동하며 이명 랭커들 앞에서도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던 비스토.
그러나 루인에게는 고양이 앞에 서 있는 쥐새끼나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잘 지냈나?”
씨익.
마신 쟈이로벨의 강림체를 직접 대면했던 비스토.
그런 그에게 루인의 웃음이란 마신의 사악하고 기괴한 미소와 동일한 것이었다.
“그,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찾아뵐 생각이었습니다!”
“널 괴롭힐 생각은 없다. 아므카토와 직접 대면하겠다.”
“예? 하지만 그건 너무 고통스럽……!”
“나와라. 아므카토.”
그 순간.
“끄아아아악!”
머리를 움켜쥔 채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비스토가 쓰러지자.
츠츠츠츠츠-
그의 머리 부근에서 핏빛 아우라가 일렁이더니 벌레왕 아므카토가 순식간에 튀어나왔다.
형상이 모호한 부정형의 아므카토.
하지만 내내 몽글거리며 뭔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분명 인간의 표정 같은 건 아니었지만 루인은 극도의 불안에 떨고 있는 아므카토의 굴종을 읽을 수 있었다.
“열광(熱狂)의 권속들은 시간을 숭배하지 않나?”
마족들은 인간들과는 달리 일정한 경지를 이룩하면 불멸자로서의 삶을 누리게 된다.
그렇게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가는 마족들은 일견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것 같지만.
정작 인간들보다 더욱 시간의 절대성을 숭배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었다.
<우, 우리 에오세타카 님의 권속들 역시 시간을 절대적으로 숭배한다!>
“그런데도 날 찾지 않았다는 건 너희 열광 무리들이 아직 혈우 지대의 군주를 정복 군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뜻인가.”
<그것은……!>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조금 묘하게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과거, 에오세타카의 광염 지대를 마신 쟈이로벨이 정복한 건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
그러나 마신 쟈이로벨 역시 본인의 혈우 지대를 대마신 므드라에게 일부 빼앗긴 상황이었다.
혈우 지대의 절반 이상이 므드라의 서풍 지대로 편입되어 버린 지금의 상황에서 쟈이로벨의 지배력은 예전만 못한 게 현실인 것이다.
서로 물고 물리는 막장의 상태.
이런 애매한 상황이 바로 에오세타카의 권속들이 다시 활개를 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였다.
“역시 너희들에게 이젠 마신 쟈이로벨이 호구처럼 느껴진다 그 말이군.”
츠츠츠츠츠-
자욱한 보랏빛과 함께 등장한 쟈이로벨이 기괴하게 표정을 꿈틀거린다.
<끄으으으……>
루인이 재밌다는 웃음을 흘리자 쟈이로벨이 더욱 처참하게 표정을 구겼다.
마신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고작 열광 지대의 썩은 벌레 따위에게 무시를 당할 줄이야.
<썩은 벌레야. 이 쟈이로벨이 네놈이 마고수면(魔枯睡眠)하고 있는 장소를 찾지 못할 것 같아서 그러는 것이냐?>
<본 마장의 진명으로 계약한 일이다! 외면할 생각은 없다!>
<흐음. 그래?>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루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왜 날 찾지 않은 거지? 시간은 충분했을 텐데?”
악제가 악신 발카시어리어스의 권속이라는 건 확정적인 사실이었다.
특유의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악신의 본질.
존재감이 드러나는 순간 마족인 이상 그런 발카시어리어스의 신마력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설사 흔적을 찾지 못했더라도 이 마신에게 성의를 보였어야 했다.>
루인이 의아한 것도 바로 이점 때문이었다.
마계의 마족들은 인간과는 달리 이름을 건 맹세를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긴다.
마장이라면 그런 마족의 명예를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무려 한 달 이상 반응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도, 동료들 일부가 사라졌다!>
<뭐?>
아므카토의 대답이 함유하고 있는 뜻이 무엇인지 쟈이로벨은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사라졌다?
마고수면하고 있는 그들의 본체까지 소멸했다는 뜻인가?
이어지는 루인의 진지한 물음.
“자세히 말해 봐.”
<내 뜻을 받아들인 몇몇 마장들이 발카시어리어스 님의 계약자를 추적하기 위해 숙주를 움직였다!>
“그런데?”
<얼마 후 그들의 존재감이 사라졌다! 영혼 통신도 불가능해졌다!>
루인의 표정이 기괴하게 꿈틀거린다.
지난 생, 악제의 수법에 철저하게 농락당한 경험을 지닌 루인.
그래서 루인은 악제의 권능에 당한 현상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악제 놈의 영혼 포집술이다.”
<여, 영혼 포집술(靈魂 捕執術)?>
쟈이로벨이 경악하고 있었다.
그런 초월적 권능은 마신의 경지에서도 불가능한 영역이었기 때문.
“그래. 놈이 즐겨 쓰던 방식이지.”
지난 생.
쟈이로벨을 돕기 위해 인간계의 전쟁에 참여한 그의 충성스러운 권속들.
악제는 그런 마족들의 영혼을 무슨 소장품처럼 차곡차곡 모아 갔다.
루인이 악착같이 이를 깨물었다.
이젠 확정적이었다.
악제의 역량은 무서운 속도로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영혼 포집술로 그의 권능이 훨씬 빠르게 강화되어 버린 것이다.
<영혼 포집술이라면……!>
아므카토의 불길한 상상은 이내 현실이 되었고.
“그래. 악신 발카시어리어스의 권능이지.”
대마도사 루인이 인간 진영의 초인들과 함께 끝까지 마계의 악신 발카시어리어스를 추적한 이유였다.
악제의 모든 것이 미지였지만 단 하나의 단서만은 존재했다.
인류의 역사가 남긴 고대의 기록.
연대도 파악할 수 없는 초고대의 문헌에 상상할 수 없는 재앙, 파멸적인 존재의 기록이 남아 있었다.
악신 발카시어리어스.
그의 권능을 악제가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믿을 수 없군. 아무리 그의 계약자라고 해도 어쨌든 본질은 재물에 불과하다. 그런 필멸자의 몸으로 어떻게 신성(神性)을 흉내 낼 수 있는 거지?>
쟈이로벨의 이런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루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이은 대마도사.
하지만 그도 인간의 영혼에 담긴 잔향을 추적할 수 있는, 그러니까 마신의 본질적인 힘은 결코 흉내를 낼 수 없었다.
영혼 포집술이 바로 그런 종류의 초월적 권능.
발카시어리어스가 마계의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할 수 있는 근원적인 악신의 힘이었다.
<그럼 내 동료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소멸이다. 놈의 강화된 권능의 재료로 쓰였겠지.”
소멸(消滅).
영생에 집착하는 마계의 존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단어.
<마, 말도 안 된다! 엄연히 마고수면하고 있는 마계의 본체가 남아 있는데……!>
“아무리 너희들이라고 해도 영혼을 둘로 쪼갤 수는 없으니까.”
영혼의 미약한 흔적이라 할 수 있는 사념을 남기는 수준만 해도 신(神)의 영역.
이 우주에 섭리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상 영혼을 둘로 나눌 수는 없었다.
그게 가능하다면 그 자체로 이미 신이기 때문.
당연히 인간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영혼이 포집당한다면 마고수면하고 있는 본체 따윈 무의미한 것이었다.
<계, 계약을 취소하겠다!>
발카시어리어스의 신적인 권능을 직접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존재.
그런 존재를 추적하는 일에 소멸을 각오해야 한다면.
아무리 이름을 건 계약이라고 해도 그건 말이 달라졌다.
차라리 혈우 지대의 권속들에게 계속 핍박을 견디며 살아가는 편이 훨씬 나은 것이다.
“인정한다. 나 역시 너희들이 놈의 강화될 권능의 재물로 쓰이는 건 원하진 않아.”
이제 아므카토가 자신을 찾지 않았던 것이 모두 이해되었다.
계속되는 동료들의 실종 앞에서 상황을 살피는 것이 더욱 우선시 되었을 테니까.
문득 루인이 쟈이로벨의 강림체를 응시했다.
“부탁한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부탁한다는 루인의 말에 쟈이로벨의 얼굴이 더욱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또 무슨 개수작이냐?>
“알잖아.”
<아니? 모르겠는데? 난 네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말 하나도 모르겠다.>
“오직 너만 할 수 있는 일이다.”
<…….>
악제에게 포집된 영혼을 추적할 수 있는 건 오직 쟈이로벨만이 가능한 권능.
<지금 나더러 그 빌어먹을 인간 놈에게 먹히는 걸 각오하란 소리냐?>
“대신 놈이 누군지를 알아낼 수 있지.”
악제에 대한 원한은 쟈이로벨도 만만치 않았다.
한참 동안 고민을 거듭하던 쟈이로벨이 아므카토를 응시했다.
<썩은 벌레. 네놈의 재물을 잠시 빌려 쓰겠다.>
<하지만 이 인간의 정신은 마신을 감당할 만큼 강하지 않다.>
<어차피 쓰고 버릴 거다.>
잠시 뒤를 돌아보는 쟈이로벨.
<어쨌든 잠시 동안은 이별이군.>
피식 웃던 루인이 벌레왕 아므카토를 바라보며 기괴하게 웃었다.
“넌 당분간 내 거다.”
그렇게 루인과 비스토는 서로의 마계 존재를 교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