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강력한 원소 마법이 주류를 이루는 ‘꿈꾸는 불새의 둥지’ 그룹에 속한 마법 생도라면 원소 마법사의 길로.
궁극의 진리를 탐구하고 다양한 마법적 역량을 함양하는 '환영의 등나무 탑' 그룹의 생도들은 마도학자의 길로.
이렇듯 ‘열망하며 은둔하는 목소리’ 그룹에 생도의 미래를 책임질 정식 커리큘럼이 있었더라면.
생도들의 성향과 특성, 재능에 맞는 마법의 길을 제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목소리 그룹엔 커리큘럼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룹의 지도 교수로 참여하겠다던 헤데이안 학부장조차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아무리 높은 신분이라지만 그 역시 마냥 노는 건 아니었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기 전, 교수들의 연구 성과를 점검하고, 그룹별 실태 조사, 장학생 선발, 상벌자들의 처리 문제, 낙후 시설물 관리, 예산 집행 성과, 새로운 운영 방향 등.
그 역시 산적한 문제들을 처리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아카데미의 새 학기가 열릴 무렵에나 학부장의 얼굴을 볼 수 있을 터.
상황이 이쯤 되니 결국 목소리 그룹의 생도들은 성장 방향을 각자 스스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목소리 그룹엔 루인이 있었다.
모든 교수들의 역량을 합한다고 해도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방대한 지식을 이미 오래전에 체계화한 마도적 존재.
이 엄청난 행운이 생도들의 잠재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시론. 느끼고 있다시피 너는 원소 마법사다.”
확정적인 말투.
무슨 권유하는 것도 아니고 형을 집행하는 집행관처럼 루인은 선고하고 있었다.
문제는 반박이 힘들다는 것.
“나도 다양한 마도 연구를…….”
“허튼소리. 넌 감각에 의존하는 마법사다. 머리가 그다지 좋지 않아. 연구 업적을 쌓아 가는 데 적합한 마법사가 아니다.”
“씨…….”
루인이 웃었다.
“대신 스펠 캐스터(Spell Caster)로서의 자질은 꽤 쓸 만하지.”
가장 흔하지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S.C형 마법사.
비록 평시에는 왕실의 예산만 축내는 천덕꾸러기 같은 S.C형 마법사지만.
전시에는 웬만한 고위 기사급 이상으로 각광받는 존재들이 바로 S.C형, 속칭 원소 마법사들이었다.
물론 가장 무난한 길인 만큼, 경쟁자들이 무시무시하게 많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
어디 가서 스펠 캐스터라고 목에 힘 좀 주려면,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의 강력한 원소 마법을 보유해야 했다. 그 유명한 유리우스나 타가옐처럼.
“생각할 시간을 좀 주면 안 될까?”
마도학의 깊고 너른 학문적 특성상, 한번 결정하면 결코 쉽게 바꿀 수 없는 것이 마도(魔道)의 진로였다.
그렇게 인생 최대의 기로에 서 있는 시론으로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하, 하지만!”
“거부를 거부한다. 네게 다른 길은 없다.”
루인은 함부로 확언을 일삼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런 그가 확고한 신념에 찬 주장을 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시간 낭비할 거 없다. 오늘부터 넌 스펠 캐스터의 심화 훈련을 병행한다. 재구축 수련법은 당분간 잊는다.”
“재구축 수련법까지 하지 않는다고?”
“스펠 캐스터는 자신만의 감각을 가다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느 정도 네 마도가 자리 잡기 전까진 재구축 수련법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
“……알았다.”
루인의 시선이 다프네로 향했다.
“다프네.”
긴장하는 태가 역력한 다프네.
그녀의 예쁜 이마가 땀으로 흥건했다.
“마, 말씀하세요.”
“넌 왜 원소 마법사로 길을 정한 거지?”
“아, 그건…….”
루인은 그 결정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네 전체적인 마도적 역량은 뛰어나다. 모든 자질이 평균 이상, 아니 최상급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 정도쯤 되는 재능을 직접 경험한 건 몇 번 되지 않아.”
“아……!”
기쁜 것도 잠시.
루인의 표정이 급격하게 차갑게 변했다.
“하지만 너에겐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
“네……?”
“너에겐 견고한 정신이 없다. 네 심리는 늘 불안을 안고 있다.”
멘탈리티는 어떻게 보면 루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질이었다.
다프네는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을 가다듬지 못해 제 실력을 모두 발휘하지 못하는 성향이었다.
눈앞의 상황을 인지하고 해석하여 그에 알맞은 술식들을 설계하는 능력까지는 발군.
하지만 자신이 가정했던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변수가 발생하면 금방 당황해서 손발이 꼬이는 성격이었다.
이런 성향은 전장과 같은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는 환경에서는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했다.
이와 같은 다프네의 성향을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굳이 전장의 원소 마법사로 키운 이유를 루인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현자 에기오스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너는 회로 설계자나 학술 조언가―”
“아녜요.”
“굳이 전장의 환경을 경험하고 싶다면 대마법 전술가, 그것도 아니면…….”
“저는 이미 원소 마법사예요.”
그제야 루인은 그녀의 진로에 관한 결정에 에기오스가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수한 그녀의 의지였던 것이다.
“음…….”
전장에 관한 한 루인은 냉정했다.
망설이는 한 명의 희생으로 끝나는 게 아닌 것이다.
더구나 정신 문제는 마법적 재능과 상관없는 자질이라서 더했다.
“이미지해라. 이곳은 전장이다. 무조건 날 살려야 전술적인 대응이 가능한 상황이다. 대신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지.”
“……네?”
“내가 대마도사급 마법사라 치자고. 내가 회복만 한다면 당장 활로를 열어 수만의 병사들을 살려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인 거다. 넌 그런 상황에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시론을, 리리아를 희생시킬 수 있나?”
“그, 그건…….”
루인이 피식 웃는다.
“넌 지금 적의 마력 포격을 막지 못했다. 전방의 대열이 박살 났다. 곧 기병들이 들이닥치겠군.”
시론을 바라보는 루인.
“시론, 너라면 어떻게 했을까?”
“네가 회복만 한다면 수만 명을 살린다고? 망설일 필요가 있나? 명령도 듣기 전에 나부터 몸을 날렸을 거다.”
루인이 다시 다프네를 쳐다본다.
“이런 점이 네게 없는 거다. 다프네.”
다프네가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노력하겠어요.”
“오히려 마법의 역량은 갈고닦기가 쉽다. 하지만 정신의 문제는 달라.”
루인이 모두를 훑어본다.
“전장은 판단의 연속이다. 당사자의 희생만으로 끝나지 않아. 수만 명의 희생을 짊어지는 것. 그것이 방금 머뭇거린 결과다.”
루인의 심연처럼 가라앉은 눈.
“순간의 판단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마법사가 수만 명을 희생시킨 죄의식을 감당하겠다고? 그게 가능할 것 같나?”
서릿발 같은 루인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는 순간 다프네는 죄인처럼 눈물을 글썽거렸다.
시약을 달이고 책과 씨름하는 마도 연구에 평생을 낭비하긴 싫었다.
하지만 원소 마법사가 되는 길에 자신의 성격 자체가 장애가 된다니.
지켜보던 시론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참 이상하네. 왜 그렇게 울상인 거지? 원소 마법사보단 정통 마도학자 계열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출세에 도움이 될 텐데?”
연구 업적을 쉽게 쌓을 수 있는 정통 마도학은 가장 빠른 속도로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길이었다.
마법학회에 업적을 남기는 순간 모든 학파와 마탑들의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이다.
반면 원소 마법사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별다른 할 일이 없었다.
평시에는 기껏해야 몬스터 토벌이나 도적 소탕, 반역자 진압 작전 등에 겨우 동원되는 수준.
마법사로서의 명예와 위상을 쌓을 수 있는 출발점부터가 다른 것이었다.
리리아가 다프네의 어깨를 잡았다.
“사람은 바뀔 수 있다.”
루인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 쉽진 않다.”
“할 수 있어. 나도 바뀌었으니까.”
다프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을 바라보자 리리아가 차갑게 웃었다.
“나도 마음이 약했다. 오히려 너보다 더.”
그녀들의 시선을 외면하는 루인.
리리아는 다프네의 경우와 다르다.
나약한 마음을 타고났을지는 몰라도 어브렐가의 저주, 멸화의 공포 앞에서 본능적으로 마음이 단련된 것.
그러나 다프네에겐 그런 극단적인 환경이 없었다.
그렇다고 고의로 그런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도 할 짓이 아니었다.
<마음을 단련하는 거라면 저도 도울 수 있어요.>
루이즈가 그렇게 말해 주니 루인은 조금 안심되는 기분이었다.
적요(寂寥)하는 마법사가 돕는다면 적어도 다프네의 마음이 어그러질 리는 없을 테니까.
‘그래. 모든 것을 내가 도울 필요는 없지.’
이런 것이 동료고 팀일 것이다.
루인은 그렇게 스스로 알아서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발전하는 생도들이 뿌듯했다.
<제겐 어떤 진로를 추천해 주시는 거죠?>
루이즈의 질문에 피식 웃으며 반응하는 루인.
“굳이 내 추천을 받을 필요가 있나?”
이미 루이즈의 길은 정해져 있다.
스스로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단지 자신을 통해 확인받고 싶은 것일 뿐.
<역시 제 재능은 마나 재밍에 있는 건가요.>
마력에 대한 동조 감응력이 높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반대도 쉽다는 의미였다.
마나 재밍(Mana Jamming).
마력 자체를 먼저 읽고, 술식으로 얽히기도 전에 방해 혹은 차단할 수 있는 권능에 가까운 역량.
이건 사실 디스펠(Dispel)이라기보다는 디버퍼(Debuffer)에 가까운 영역.
더욱이 적요하는 마법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지팡이, ‘진노하는 침묵의 영언자’ 역시 그런 마나 재밍의 성향에 딱 어울리는 아티펙트였다.
<결국엔 저주 마법을 익혀야 하는 거잖아요.>
루이즈가 보유하고 있는 절대언령 자체가 모든 마법사에겐 저주다.
이미 자신의 길을 잘 알고 있는 루이즈에게는 별다른 조언이 필요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렇게 무투대회에 참여하는 생도들에게 앞으로 살아갈 마도(魔道)를 정해 준 루인.
스펠 캐스터 시론.
배틀 카운터 리리아.
스페셜 매지션 다프네.
스페셜 디버퍼 루이즈.
인류 연합에서 마법사들의 병과를 구분 짓던 대마도사의 체계가 긴 세월을 격하고 다시 세상에 드러난 것이었다.
한데 모두가 루인을 기이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친구들의 모든 진로를 정해 준 그였지만 정작 그 스스로는 마도를 밝힌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참을성 없는 시론이 물었다.
“넌 어떤 진로로 정한 거지?”
유적 동굴 밖으로 향하던 루인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진로는 아이들이나 정하는 것이다.
자신은 굳이 진로가 필요가 없는 마법사였다.
“이건 중요한 문제 아닌가? 네가 그랬잖아. 등 뒤를 맡길 거라면 서로의 모든 면을 알아야 한다고.”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루인.
‘…….’
역사가 남긴 모든 지혜를 탐닉하여 마침내 진리에 다가간 자.
자연 현상에 순응하지 않는, 섭리라고 믿고 있는 모든 것들을 끝없이 의심하고 궁구하는 자.
마나의 지배자.
술식의 어버이.
경배와 찬미로 대변되는 그 위대한 이름.
“대마도사(大魔道士).”
만 년 이상 걸어온 길.
루인의 두 눈이 뿜어내고 있는 그 무시무시한 기운에.
모든 생도들이 가슴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