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대마도사라 불린 자신보다 오히려 더욱 마법사의 전형에 가까운 영웅.
철저한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뛰어난 두뇌의 마법사.
그런 헤스론의 독특한 체계, 재구축 수련법으로 양성한 ‘광휘(光輝)의 마도 군단’은 검성의 ‘철혈 결사대’와 더불어 인류 연합이 자랑하는 최고의 군단이었다.
자신과 더불어 전쟁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마법사 헤스론은 아직도 루인의 머릿속에 선연하게 남아 있는 존재.
만약 자신이 마신 쟈이로벨의 마법을 잇지 않았다면 반드시 헤스론의 재구축 수련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만큼 헤스론의 수련법은 태초의 마법사 테아마라스 이후 가장 뛰어난 효율을 보여 준 마력 수련법이었다.
악제에 의해 인류가 처참하게 망가지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그는 테아마라스, 헤이로도스와 비슷한 반열의 마도사로 역사에 남았을 터.
“저로서는 처음 들어 보는 마법사의 이름이네요.”
하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는 다프네.
짧은 시간에 마력 동조율을 이렇게 엄청난 수준으로 끌어올릴 정도라면 분명 뛰어난 마법사의 수련법이라 생각했다.
마나 수련법을 독자적으로 개발하는 건 마탑의 고위 마법사 정도가 아니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체계를 완성한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일.
<전 그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어요.>
“응?”
모두가 루이즈를 쳐다보자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요정족의 마을에서 그런 이름을 지닌 아이를 본 적이 있어요. 인간이지만 요정의 말을 무척 잘하는 아이였어요.>
루인이 궁금증을 드러냈다.
“요정족? 아는 요정족이 있었나?”
요정족, 엘프들은 극도로 폐쇄적이다. 특히 인간들에게 갖는 감정은 가히 원한에 가까웠다.
어린 엘프들을 관상용이나 애첩으로 활용하기 위해 사냥을 일삼는 인간들을 극도로 혐오하는 것이다.
더욱이 인간 문명의 도시들이 생겨나는 만큼 숲은 파괴된다.
이렇듯 요정족들의 입장에서 인간이란 모든 면에서 백해무익한 존재였다.
<어릴 때 잠시 요정족 마을에서 지낸 적이 있어요.>
요정족 마을에서 잠시 지냈다는 사실은 깜짝 놀랄 만한 일이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인간은 인간.
그 폐쇄적인 요정들이 루이즈를 받아들였다면 그녀에게 요정족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어떤 면모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왕국의 어느 지방이었지?”
<그곳은 르마델 왕국의 영토 밖이에요.>
루인이 되물었다.
“혹시 서부 왕국들 중 하나였나?”
<그걸 어떻게……?>
당황하는 루이즈의 반응에 루인은 슬며시 웃고 있었다.
영웅이 되기 전 헤스론은 한동안 서부 산림 지대의 흑마법사로 불렸다.
그에게 친구는 몬스터와 이종족이 전부였다.
세상과 단절한 채 괴팍스럽게 살아가니 당연히 사람들은 그를 흑마법사라고 여긴 것이다.
마법은 결코 독학으로 완성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니었다.
마탑도 아카데미 출신도 아닌 그가 어떻게 그토록 뛰어난 마도를 완성할 수 있었는지 안 그래도 루인은 궁금하던 참이었다.
어쩐지 헤스론의 마법이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의 기반이 요정족의 마법이었던 것.
그가 루이즈와 인연이 닿아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하니 가슴 속에 따뜻한 감정이 번져 갔다.
어쩐지 과거에도 루이즈가 헤스론을 끔찍하게 아끼더라니.
루인은 만나게 될 사람은 결국 어떻게든 만나게 되어 있다는 고대 철학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인연의 끈이란 건 결국 존재한단 말인가.’
대륙에는 수천만 명이 산다고 알려져 있다.
하필 그 수천만 명이 살아가는 이 순간, 이 시대.
그런 수학적으로 말도 안 되는 확률을 뚫고 이 유적 동굴에서 자신과 마주 바라보고 있는 이 아이들은 이번 생의 어떤 의미일까.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건 역시 무척 신비로운 일이었다.
“설마 루이즈가 만난 어린아이가 그 헤스론이라는 분과 동일 인물은 아니겠죠?”
다프네의 조심스러운 질문.
하지만 루인은 그저 은은하게 웃으며 루이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중에 그 숲에 함께 가자.”
<네! 좋아요!>
요정족 마을은 루이즈에게 좋은 추억인 모양. 그녀는 여느 때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후로도 루인은 친구들의 재구축 수련법의 성과를 더욱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염동력과 마력의 절대량.
회로 구현력과 연산력 수준.
마력 동조율과 마나 감응성.
마지막으로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멘탈리티까지 체크를 끝낸 루인.
한데 의외로 다프네가 아니라 시론의 역량이 경악스러운 수준으로 발전되어 있었다.
루인이 얼떨떨하게 반응하자 눈치라도 챈 듯 시론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봤느냐! 내가 이 정도다!”
허공에 화려하게 마법진을 그리며 득의양양하게 웃고 있는 시론.
문득 리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바보 같다.”
바로 옆에 루인을 두고도 저렇게 잘난 웃음을 흘릴 수 있는 건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게 느껴질 지경.
하지만 의외로 루인이 그런 시론을 인정해 주었다.
“정말 많이 노력했겠군. 훌륭하다.”
다소 과장스러운 행동 속에 깊은 마음을 숨기고 시론.
루인은 그런 그의 본질을 잘 알기에 응원해 주었다.
시론이 마치 울 것만 같은 표정을 했다.
“정말이냐? 내 치열한 노력이 느껴지냐고!”
루인은 함부로 칭찬을 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의 칭찬은 어떤 보상보다도 달콤한 것이었다.
“마법의 세계에서 모든 마법적 성과란 존중받아 마땅하다. 이 세계에 환상적인 우연 같은 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지. 그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하는 칭찬이다.”
“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시론이 쭈뼛거리다가 얼굴에서 장난기를 지운다.
이내 진지한 표정이 된 그가 슬며시 웃었다.
“헤스론이 누군지는 모른다. 그에 대한 감사는 나중에 만나면 직접 하지.”
“그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너 루인이다. 내게 새로운 마법의 세계를 보여 줘서 고맙다.”
재구축 수련법의 첫 단계를 밟아 갔을 때.
생도들은 당시 루인이 형성해 주었던 마나존(Mana Zone)이 얼마나 엄청난 효과로 작용했는지를 경지가 올라갈수록 체감할 수 있었다.
첫 재구축의 위험성은 무서운 것.
바로 루인이 그런 도박에 가까운 첫 구축의 위험성을 최대한 상쇄시켜 준 것이다.
“알면 됐다.”
“썩을.”
그때, 슈리에가 루인에게 다가왔다.
“그 재구축 수련법…… 지금부터 저도 해 볼 수 있을까요?”
그 말에 리리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물론 다른 생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안전한 수련법이라는 판단이 섰다 이건가?”
슈리에는 비릿하게 웃고 있는 루인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다른 모든 생도들이 루인을 믿고 새로운 수련법에 도전했을 때.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루인과 스스로를 믿지 못했다.
재구축 수련법의 자세한 과정을 다시 말해 주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루인은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한다면 생도들이 보여 준 용기에 대한 배신이었다.
“늦었다, 슈리에. 어차피 너는 무투대회조차도 거부하지 않았나.”
단칼에 슈리에의 청을 거부한 루인이 다른 생도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이명 랭커들은 틀림없이 너희들을 타깃으로 삼을 것이다. 특히 세베론과 리리아. 너희들을 얕잡아 보고 있을 확률이 높아.”
시론은 대외적으로 현자 에기오스의 손자라 알려진 마법 생도, 또한 다프네 역시 현자의 수제자이자 입탑 마법사다.
단순한 무등위 생도라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반면에 세베론은 인지도랄 것도 없는 무명.
리리아 역시 ‘설혼 레예스’의 여동생이라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 인지도가 거의 없는 편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리리아의 두 눈에 맹렬한 투쟁심이 얽힌다.
“놈들이 날 얕잡아 본다면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피식.
“호승심만으로 이길 수 있는 녀석들이 아니다.”
다프네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가옐의 대마법 전투를 본 적이 있어요. 전 그에게 미치지 못해요.”
“뭐라고?”
“응?”
다프네의 마법적 경지는 이명 랭커들 못지않았다.
한데 그런 그녀가 입탑 마법사의 고고한 자존심을 망설임 없이 내려놓은 것이다.
“네가 그렇게 쉽게 인정한다고?”
시론의 질문에 다프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수한 마법의 경지를 말하는 게 아니야.”
퉁명하지만 다소 긴장 섞인 리리아의 반응이 이어졌다.
“대마법 전투에 한정해서 말하는 거겠지.”
다양한 분야의 마법을 섭렵하고 있는 다프네와는 달리 타가옐은 극강의 원소 마법사였다.
원소 마법사를 진로로 삼은 마법사들은 평생 동안 선택과 집중에 매진했다.
인간의 연산력이 지닌 한계상,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는 것은 원소 마법과 맞지 않았다.
순수한 마도 연구라면 몰라도 극한의 실전성을 추구하는 원소 마법사들은 반드시 원소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환경인 것이다.
그래서 원소 마법사들은 지닌 재능에 따라 단일 원소, 최대 2원소를 선택한 후 불이면 불, 번개면 번개 하나의 원소 마법에만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게도 마법의 공격력만을 조건으로 삼는다면 원소 마법사들은 일반적인 마법사들을 압도했다.
“그는 모든 것을 얼릴 수 있어요.”
다프네는 끔찍한 재앙 같은 그날의 광경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의 결빙계 마법은 교수들, 아니 마탑의 일부 고위 마법사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그야말로 혹한(酷寒).
지금과 같은 속도로 성장한다면 결국 그는 세계를 얼리는 재앙으로 완성될 것이다.
“게다가 생동하는 화염 유리우스 역시 그런 타가옐과 실력이 거의 비슷한 원소 마법사죠.”
세베론이 두려움에 떨었다.
“나도 소문은 들은 적이 있어. 유리우스 선배의 피닉스 카이저.”
피닉스 카이저(Phoenix Kaiser).
최강의 원소 마법 학파, 카이저 학파의 대표적인 화염 마법.
유리우스는 불(火)의 예술, 화염 마법의 극한이라는 피닉스 카이저를 불과 생도 시절에 익혀 버린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피닉스 카이저라…….’
악제와의 전쟁 중에 무수한 마법사들이 참혹하게 죽어 나갔다.
그들 중에는 분명 카이저 학파의 마법사도 있었다.
카이저 학파의 원소 마법은 분명 자신이 익힌 흑마법에 비견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한계,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말도 안 되게 긴 시전 시간, 즉 캐스팅 딜레이.
그래서 루인은 카이저 학파의 원소 마법사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을 전술적으로 활용하려면 기사들이 너무 많이 희생되었다.
그들의 강력한 한 방을 위해 물밀듯이 밀려오는 적을 기사 병단으로만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놈들의 전술이 대충 그려지는군.”
시론이 웃고 있는 루인을 바라봤다.
“그래. 사실은 뻔하다. 기사 선배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간을 벌겠지. 그중 타가옐 선배나 유리우스 선배 중 한 명의 원소 마법이라도 완성된다면―”
눈을 질끈 감는 다프네.
“그럼 끝장이에요. 지금의 저로서는 그들의 원소 마법을 막아 낼 능력이 없어요.”
루인의 웃음이 더욱 진해진다.
“너희들이 잊고 있는 게 있다.”
“응?”
“우리가 뭘 잊고 있다는 거죠?”
루인이 시선으로 누군가를 가리킨다.
“언령(言靈)만으로 디스펠이 가능한 존재는 나 말고 또 있을 텐데.”
모두가 루이즈를 쳐다보자.
“절대언령은 너희들이 사기라 주장하는 내 염동력만큼이나 사기지.”
언령은 말 그대로 시전자의 말 자체에 불가사의한 힘이 담긴다.
절대언령은 그만큼 사기적인 재능이었다.
아예 술식의 생성 단계부터 방해할 수 있는 절대 언령.
사실 디스펠 술식이라고도 볼 수 없는, 그야말로 ‘권능’에 가까운 영역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당사자는 무투대회의 출전을 합의한 적이 없었다.
시론의 열기 어린 눈빛이 루이즈를 향했다.
“루이즈! 우리 무투대회 멤버로 들어와 줄 수 있어?”
<바라던 바예요.>
곁에서 반갑게 웃던 세베론.
하지만 그는 이내 뭔가를 깨달은 듯 석상처럼 굳어졌다.
“멤버는 5명인데? 에이! 설마 아니겠지……?”
마을에서 천재라 불리며 자라 온 세베론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이곳, 이 빌어먹을 목소리 그룹엔 그런 천재마저 잡아먹는 괴물들이 너무 많았다.
객관적인 실력으로만 따진다면 사실 세베론이 가장 약한 것이다.
시론이 세베론의 어깨를 토닥였다.
“미안하다.”
“시, 시론!”
울먹거리던 세베론이 루인을 쳐다본다.
하지만 루인도 말없이 그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