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39화 (139/187)

<139화>

루인과 리리아가 아카데미의 유적 동굴에 도착했을 때 시론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체력 단련이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

고요한 유적 동굴에 리리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굳이 소울레스가를 도우려는 의도는 뭐지?”

루인은 다섯 개의 마정을 리네오 길드에 팔았다.

그것도 그냥 판 것이 아니라 손수 가공하여 마정석으로 탈바꿈시켜 주기까지 한 것이다.

그 마정석들이 모두 소울레스가(家)로 흘러들어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리리아는 적잖이 당황해했다.

“정말 알고 싶은 거냐?”

지금까지 어떤 의문도 가지지 않은 리리아가 소울레스가에게만큼은 관심을 가지는 이유.

뻔하다.

비록 양대 마도명가에 비해 세력은 약하지만 소울레스가는 엄연히 어브렐가의 정적이었기 때문.

당대에 이르러서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지만, 먼 옛날에는 현자를 몇 번이나 배출했을 정도로 소울레스의 저력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소울레스가는…….”

“안다. 너희 가문과 악연인 거.”

“사심으로 묻는 게 아니라는 것도 함께 알아줬으면 좋겠군.”

“사심?”

리리아의 눈빛이 침잠한다.

“그들이 왕실에서 멀어진 건 그 옛날, 그들의 부정부패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분명 아직 왕실에 악감정이 남아 있을 텐데.”

“그렇겠지.”

루인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리리아의 두 눈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그런 위험한 가문에게 왜 굳이 마정석을 공급해 주는 거지? 무슨 일을 벌일 줄 알고?”

“마도가문이니 마도 병기를 제작하겠지. 어쩌면 왕실이 보유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마장기를 제작할 수도 있고.”

좀처럼 감정 표현을 드러내지 않는 리리아가 입을 벌리며 경악하고 있었다. 그만큼 루인의 대답은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이 문제만큼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겠다.”

루인이 피식 웃으며 리리아를 바라봤다.

오랜만에 보는 강렬한 적개심의 눈빛.

문득 루인은 처음 리리아를 본 그날이 떠올랐다.

“오랜만이군. 너의 그런 눈.”

“농담할 생각 하지 마라.”

루인이 리리아의 시선을 외면하며 어두운 동굴의 허공을 응시했다.

자신은 이번 일로 꼭 알아내야 할 정보가 있었다.

만약 리네오 길드의 일을 모두 전해 들은 렌시아가가 소울레스가의 행위를 방조한다면.

그들은 이미 르마델 왕실과 한 몸이 아니었다. 악제에게 협조하는 세력일 확률이 높은 것이다.

반대로 곧바로 소울레스가를 왕국의 이름으로 압박하고 마정석을 모두 몰수한다면.

아직은 왕국의 안녕을 도모하는 대귀족으로서의 면모는 지키고 있다는 뜻.

물론 악제의 의도에 놀아나는 상태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악제에게 복종한 상태는 아닐 것이었다.

렌시아가는 그저 이권을 탐하는 평범한 인간군상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평소대로 날 믿어 줬으면 좋겠군.”

“하지만…….”

“약속하지. 나는 이 르마델을, 아니 모든 사람들을 아끼겠다.”

대마도사 루인은 인간을 지키기 위해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런 다짐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죽어 간 모든 이들의 염원을 짊어진 루인의 굴레이자 숙명이었다.

그때, 시론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루인!”

시론이 후다닥 뛰어와 반가운 얼굴을 했다.

이어 세베론과 다프네, 슈리에와 루이즈의 얼굴이 차례로 마력 등불에 의해 드러났다.

“왜 이제야 온 거예요!”

다프네가 달려와 리리아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물론 루인도 금방 아카데미로 복귀할 계획이었지만 봉신가의 일 때문에 계획이 조금 틀어졌던 상황.

무리하게 혼돈마의 꼬리를 운용한 탓에 가문에서 마력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큰일 났다! 루인!”

시론의 호들갑에 루인이 그를 쳐다봤다.

“또 무슨 일이지?”

“이명 랭커들이 무투대회 훈련을 공개적으로 시작했다!”

루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뭐가 큰일이지?”

끼어드는 다프네.

“이명 랭커들 모두가 개인전을 포기한 거 같아요.”

“뭐?”

세베론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모든 이명 랭커들이 단체전만 파고 있어. 그리고 그들의 훈련 방식이…….”

“대마법전! 선배들은 오직 대마법전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대마법전?”

금방 루인의 표정이 묘해진다.

그들이 개인전을 모두 포기하고 대마법전에만 매진하고 있는 이유가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맞아요. 루인 님 때문이에요. 초인을 이긴 현자급 마도(魔道)를 상대하는 단 하나의 방법. 희망은 단체전밖에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하지만 루인은 그들의 그런 투쟁심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놈들도 내가 기수 쟁탈전에서 초인 기사를 상대한 방법을 뻔히 알 텐데.”

“정신 마법이요?”

하이베른가의 그림자처럼 살기로 했던 맹세를 거둔 이상, 오히려 자신의 초월적인 마도(魔道)를 확실하게 전 왕국에 드러냈다.

인간은 압도적인 힘의 우위 앞에서만큼은 겸손해지기 때문이다.

“…….”

앞으로 잔챙이들까지 일일이 상대할 여력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잔챙이들이 지금 서로 힘을 합하여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슈리에와 시론이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는다.

“저도 그게 궁금해요. 그들이 과연 루인 님의 정신 마법을 어떻게 상대할지.”

“분명 훈련을 한다는 건 계획이 있다는 뜻이잖아?”

다프네가 미간을 모았다.

“버리는 패가 있겠죠. 대신 그들은 반드시 나머지 셋을 제압하려 들 거예요.”

“셋?”

루인의 의문에 다프네가 당황해한다.

“아? 제가 규정에 대해서 얘기 안 했나요?”

“아! 맞다!”

금방 창백해지는 시론의 얼굴.

“다섯 명의 파티원들 중 세 명 이상이 전투 불능 상태가 되면 몰수패가 선언된다! 루인!”

루인의 얼굴이 함께 핼쑥해졌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주는 거지?”

“나도 방금 생각이…….”

한 번도 무투대회를 경험하지 못한 무등위 생도들의 한계.

이들이 무투대회에 대해 들은 정보들은 그저 소문으로 들은 것이 다였다.

루인의 입매가 허탈한 미소를 그려 냈다.

“미치겠군.”

이명 랭커들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어차피 생도 수준, 자신에게야 만만한 상대들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친구들에게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특히 놈들이 기사라는 것을 감안하면,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파티원의 역량을 모두 합한다고 해도 이명 생도 하나를 감당해 내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이어지는 생도들의 말에 루인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졌다.

“특히 브훌렌 선배의 조가 가장 무서워요.”

“맞아. 최상위권의 마법 생도가 둘이나 포함되어 있었어.”

“누구였죠?”

“타가옐 선배와 유리우스 선배.”

생동하는 화염 유리우스.

그림자 혹한 타가옐.

각기 불과 얼음을 상징하는 이 마법학부의 이명 생도들은 아카데미 밖에서도 깨나 알려진 원소 마법의 강자들.

그들은 아직 시론이나 슈리에, 세베론등이 상대하기에는 벅찬 상대들이었다.

물론 루이즈나 다프네 역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음…….”

마법의 세계는 기사들보다 오히려 더 처참하게 실력이 갈린다.

기사들의 검술에는 디스펠(Dispel)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높은 경지의 마법사는 하위 마법사의 술식 대부분을 손쉽게 디스펠할 수가 있다.

시론과 리리아, 다프네가 루인에게 손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패배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더욱이 5명의 기사 생도로 구성된 파티와 마법 생도 한두 명이 보조하는 파티의 위력은 차원이 다르다.

루인의 머릿속이 금방 복잡해진 이유였다.

‘…….’

혼자라면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파티원 3명 이상을 반드시 지켜 내며 이명 랭커들과 맞선다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너희들…… 무투대회를 포기하진 않겠지?”

가장 간단한 방법은 단체전을 포기하고 자신만이 개인전에 참여하는 것.

이명 랭커들이 모두 개인전을 포기한 상황이라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자신의 우승은 확정적인 것이었다.

서럽다는 듯, 마치 울먹일 것만 같은 표정의 시론.

“당연하다! 생도들에게 무투대회가 어떤 의미인지 넌 정말 모르는 거냐! 치사하게 너만 개인전으로 도망가려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요?”

“진짜 그런 생각을 했다고?”

괜스레 양심이 찔렸다.

루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생도라면 모두가 꿈꿔 왔을 무투대회.

이 눈부신 열정의 생도들을 결국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루인의 시선이 생도들을 훑는다.

“재구축 수련법의 성과는? 진전이 있었나?”

자신감 있게 대답하는 다프네.

“마나홀을 부순다고 해도 재구축하는 데 하루면 족해요.”

“호오, 시간을 엄청나게 단축시켰군. 새롭게 구성하는 서클의 수준은?”

“꽤 편차를 줄였어요. 이제 시도하면 매번 4위계 이상을 달성할 수 있어요. 그 이상은 아직 확률적이지만요.”

“나도 이제 3위계 이상은 늘 달성한다!”

“나도!”

루인은 놀라웠다.

역시 무서운 천재성을 지닌 아이들이었다.

극악의 난이도로 정평이 난 헤스론의 재구축 수련법을 이렇게 빠른 속도로 익힐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

이 속도를 유지할 수 있다면 생도들 모두 4, 50대에 이르러 현자급 마도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아직 마나홀을 붕괴시키지 않은 건가?”

“네.”

“지금부터 할 생각이었다!”

루인이 시론을 응시했다.

“재구축 수련법 이후 직접 술식을 펼쳐 본 적이 있나?”

“응? 없는데?”

마나홀을 부수고 다시 재구축하는 수련에 매진하는 것만으로도 매일매일 정신과 육체가 녹초가 되는 마당이었다.

그런 재구축 수련법이 끝난 후에도 날 뛰는 서클을 안정시키느라 잠들기 전까지 심상 수련을 병행해야만 했다.

더욱이 생도들은 달리기 수련까지 단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

“술식 수련까지 한다면 전 아마 죽을지도 몰라요.”

생도들은 루인이 지금 자신들의 부족한 노력을 꾸지람(?)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오해다. 너희들의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어쨌든 그렇다면 아직 잘 느끼지 못하겠군.”

“느끼다뇨?”

루인이 웃으며 다프네를 바라본다.

“지금 아무 술식이나 펼쳐 봐라.”

“네.”

다프네가 선택한 마법은 중위계 원소 마법 ‘명왕(冥王)의 숨결’이었다.

명왕의 숨결은 엘고라 학파의 상징적인 마법으로, 그녀가 현자 에기오스의 수제자라는 증명이기도 했다.

화르르르르-

“어?”

다프네는 자신의 오른손 위로 타오르는 어두운 불꽃을 바라보며 당황해하고 있었다.

“캐스팅 딜레이가 훨씬 줄었군.”

“자, 잠깐만요?”

시전 시간뿐만 아니라 마력과 염동력의 소모도 훨씬 덜했다.

더구나 마법 자체의 위력까지 좀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이게 왜 이러죠?”

기존에 술식 수련을 해 왔다면 이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명왕의 숨결에 대한 어떤 수련의 진척도 없었다.

휘우우우웅!

시론도 풍절계 원소 마법, ‘방랑자의 탄식’을 시전하다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뭐, 뭐야 이게!”

풍절계 마법은 그 특유의 엄청난 난이도로 시론이 늘 어려워하던 원소 마법이었다.

한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잔잔한 바람의 파동이 동굴 전체로 퍼져 나갔다.

이 모든 일에 당황하지 않는 사람은 오직 루인뿐이었다.

“헤스론이라는 마법사가 있다.”

“헤스론?”

고개를 끄덕이는 루인.

“재구축 수련법을 창조한 위대한 마도사다. 마법에 대한 신념과 열정이 누구보다 대단한 마법사지.”

“아!”

루인이 환하게 웃는다.

“나중에 그를 만난다면 굳이 스승으로 경배할 필요는 없다. 다만 너희들에게 뛰어난 경지를 가능케 한 이의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다프네가 조심스럽게 질문한다.

“저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씨익.

“마나 친화력과 감응력. 적어도 수십 배 이상 강화되었다. 너희들의 마력 동조율(Mana Synchronization Rate)이 말도 안 될 만큼 증가한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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