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38화 (138/187)

<138화>

단정한 머리칼.

흔들림 없는 완고한 눈빛.

루인과 마주 앉아 있는 리네오 길드의 마스터 로벤은 쉽게 말문을 열지 않았다.

그런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마도학자 테모도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대공자님. 요구 사항이 있으시다면 터놓고 말씀하시지요. 우리 마스터는 그렇게 꽉 막힌 분이 아닙니다.”

루인이 한 차례 테모도스를 쳐다보다 다시 마스터 로벤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상하군. 분명 닥소스가의 혈족이라 생각했는데.”

“예……?”

테모도스가 깜짝 놀라며 다시 루인을 쳐다본다.

닥소스가(家).

알칸 제국의 4대 가문 중 가장 강력한 명성과 위세를 떨치고 있는 대귀족가.

알칸 제국의 유일무이한 지배자 아렐네우스 황제조차 닥소스가의 가주에게만큼은 공대(恭待)로 존중한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그들의 위상은 가히 독보적인 것이었다.

“어찌 그리 생각하시는지요.”

처음으로 입을 연 마스터 로벤.

루인이 은은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우선 그 유명한 닥소스가의 녹안(綠眼)이 아니지 않나. 더욱이 그대가 내뿜고 있는 마력의 파장도 닥소스가의 ‘젠(Zen)’이 아니다.”

무심한 로벤의 표정에서 처음으로 동요의 빛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르마델의 대귀족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라지만 나이에 비해 그 견문이 놀라울 정도였다.

“대공자님께서는 알칸 제국에 대해 아는 것이 많으시군요.”

피식.

“나는 르마델의 귀족이다. 적(敵)에 대해 공부하는 건 당연한 임무겠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루인은 알칸 제국을 서슴없이 적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벤은 그가 오만하거나 어리석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신 분이군요.”

대공자는 지금 자신을 도발하고 있다.

자신이 알칸 제국의 귀족이라면 분명 동요할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속 보이는 도발에 동요한다면 리네오 길드의 마스터가 될 수는 없었을 터.

“제가 닥소스가의 인물이라고 짐작하시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루인의 입에서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이번에야말로 로벤은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대들이 마정의 마력 추출 술식이라고 주장하는 도해(圖解) 말이지. 여기저기 손을 본 흔적이 조금 있지만 분명 닥소스가의 ‘강마력 엔진 도식’과 너무 비슷하거든.”

“……!”

닥소스가가 알칸 제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

마도 병기 마장기의 심장 마력핵.

그중에서도 마도가문 닥소스가가 탄생시킨 ‘강마력 엔진’이야말로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효율을 자랑하는 마력핵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어떤 왕국의 현자도 스쳐 지나가듯 본 것만으로 그 이치를 알아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름난 마도학자들이 꼬박 몇 개월을 연구해야 겨우 작동 기전을 알아볼 수 있는 엄청난 난이도의 마력 술식.

그것이 루인에게 서슴없이 술식 도해를 보여 줬던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이 대공자가 직접 마정을 추출했다는 정보가 없었더라면 애초에 그런 도박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강마력 엔진의 술식 도해는 알칸 제국이 반드시 지켜야 할 비밀이었다.

“하하, 그 말이 꼭 닥소스가의 강마력 엔진을 직접 보시기라도 한 것처럼 들립니다.”

루인이 피식 웃었다.

악제와의 전쟁 초기.

마장기의 카운터, 안티 매직 와이엄의 존재를 몰랐을 때.

기존 강마력 엔진의 결점을 보완하고 새로운 마장기를 탄생시킨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었다.

그 익숙한 술식 도해를 몰라볼 리가 없는 것이다.

“효율이 절반 수준이던데. 고의로 출력을 낮춘 건 무슨 이유지? 마장기가 아닌 다른 목적이 있는 건가?”

등줄기가 축축해진다.

더 이상 로벤은 가면을 쓸 수 없었다.

틀림없이 눈앞의 대공자는 강마력 엔진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로벤은 루인을 차분하게 직시했다.

이런 자에겐 의도를 숨길수록 부작용이 생긴다.

물론 이런 유형의 사람도 상대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이거. 제 인생 최대의 위기가 찾아온 것 같군요.”

아무리 리네오 길드가 르마델의 권력층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지만, 닥소스가의 끄나풀이란 걸 들킨다면 그 모든 관계는 그날로 무용지물이었다.

당장 이 강마력 엔진의 열화판 도해가 드러나는 순간 르마델 왕국은 곧바로 자신을 구금할 것이다.

리네오 길드 역시 에어라인에서 쫓겨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대공자는 곧장 르마델 왕실로 향하지 않고 굳이 자신을 만나고자 했다.

그것은 그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는 뜻.

상대와 거래할 품목이 있다면 승부를 걸어 볼 만했다.

“저는 닥소스가의 봉신가, 로모아가(家)의 가신입니다.”

로벤이 솔직하게 나오자 루인의 눈빛이 달라졌다.

“가신이라면 방계인가?”

알칸 제국은 철저한 씨족 중심으로 돌아간다.

알칸의 귀족들은 가문의 경영을 담당하는 가신을 반드시 혈족이나 방계로 구성했다.

“그렇습니다.”

“에어라인에서 활동하는 목적은?”

“상인의 근본은 이익을 탐하는 습성입니다. 에어라인은 상인에게 무한한 가치를 담보하는 곳이지요.”

“더 이상 나와 대화할 마음이 없다는 뜻인가?”

루인이 마치 자리에서 일어날 기세로 그의 시선을 외면하자.

로벤의 눈빛이 흔들렸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목적.”

잠시 망설이던 로벤이 가득 입술을 깨물었다.

“유사시를 대비한 정탐 활동입니다. 하지만 맹세코 당장 르마델 왕국에 해악을 끼칠 목적은 아닙니다.”

“유사시라면 침략 행위를 말하는 건가?”

“저희로서는 영토 복원, 혹은 정규전쟁이라 부를 수밖에요.”

원래 르마델 왕국의 남부, 즉 지금의 하이렌시아가의 영지는 알칸 제국의 영토.

그 옛날 알칸 제국은 하이렌시아가의 영웅 레란츠와 어처구니없는 협상으로 자국의 영토를 내어 주고 말았다.

결과적으로는 창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얻은 하이렌시가아의 외교적 승리.

알칸 제국의 역사가들은 적국의 치밀한 전략에 말도 안 되는 협상을 해 버린 란돌프 3세를 역대 가장 어리석은 황제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 일이 알칸 제국과 르마델 왕국 사이의 오랜 악연의 시작이었다.

‘악제의 끄나풀은 아니군.’

루인의 우려와는 달리, 다행히도 악제와의 연관성은 약해 보였다.

리네오 길드는 그저 알칸 제국의 일상적인 첩보 활동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악제의 끄나풀들은 결코 국가 같은 권력의 대상에 충성하지 않았다.

또한 어떤 상황에도 그들은 스스로 정체를 발설하는 일이 없었다.

무엇보다 알칸 제국은 악제의 마수에 마지막까지 오염되지 않았던 유일한 국가였다.

오히려 악제의 치밀한 흔적을 가장 끈질기게 추적하고 대비했던 나라.

그들이 베나스 대륙의 지배자, 제국(帝國)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의구심을 풀 차례.

“내가 판 마정에서 마력을 추출하고자 하는 목적은 뭐지? 그대의 말대로 상인이라면 그저 되팔아 이득을 챙기면 그만일 텐데.”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로벤.

“마정을 가공하여 마정석(魔精石)으로 만든다면 그 가치는 열 배가 넘게 뜁니다.”

마정과는 달리, 가공된 마정석은 일반인도 그 마력을 활용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 가치는 마정석이 월등했다.

루인이 웃었다.

“그게 일개 상인 길드가 마도학자를 보유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다? 언제 마정을 매입할 줄 알고 저 뛰어난 마도학자의 보수를 감당하는 거지? 테모도스 같은 마도학자라면 그 보수가 상상을 초월할 텐데?”

각국의 왕실들이 마탑과 아카데미에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 이유.

외부의 마도학자를 초빙하는 것보다 평생 그들의 연구와 학업을 책임지는 편이 훨씬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상인이라는 족속들은 말이지, 절대로 불확실한 미래에 투자하는 법이 없었거든.”

“…….”

“언제 마정을 매입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대가 굳이 막대한 마도학자의 보수를 일상적으로 감당할 이유가 있을까?”

그때, 테모도스가 끼어들었다.

“그 일을 마스터에게 대답하라는 건, 그의 목숨을 내놓으란 말과 같습니다.”

테모도스를 차분하게 응시하는 루인.

“아직도 몰랐나? 그대들의 목숨은 이미 내 손안에 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가 이 르마델의 대귀족,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라는 것을.

더욱이 그는 단신으로 초인 기사를 무너뜨린 마도(魔道)적 존재.

그가 르마델 왕실의 입장을 대변하는 존재라면 이 자리에서 자신들을 즉참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로벤의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한번 맞춰 볼까?”

루인의 비릿한 웃음.

아무런 대답 없는 로벤을 향해 루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들에겐 이 에어라인에 마정석의 거래처가 있을 것이다. 물론 왕실은 아니겠지. 왕실엔 마탑이 있으니까 굳이 마정을 가공해서 거래할 필요가 없거든.”

“…….”

“테모도스 역시 그 거래처가 파견한 마도학자일 확률이 높겠지. 이 에어라인에서 가장 큰 규모로 장물을 유통하는 길드라면 충분히 마도학자를 투입할 가치가 있으니까. 마정석만 확보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집단은 많잖아?”

순간 로벤의 눈빛에 진득한 살기가 일었다. 마치 검을 빼 들 기세였다.

“……이미 모두 알고 오신 겁니까?”

루인이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초인을 이긴 마법사에게 살기를 내뿜는다? 뒷배가 대단한 건가, 아니면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건가?”

“둘 다입니다.”

로벤의 마력이 맹렬히 허공에 얽힌다.

과연 닥소스가의 방계답게 마력의 농도가 제법 치밀했다.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왕실을 제외한다면, 이 르마델의 귀족가 중에 상시적으로 마정석을 매입할 수 있는 곳은 몇 되지 않아.”

“……더 이상 저를 막다른 길로 몰지 마십시오.”

“마도가문 소울레스가(家).”

현자의 메데니아가, 리리아의 어브렐가 사이에서 오랜 세월 빛을 보지 못했던 르마델의 마도가문.

악제가 악의가 가득 차오를 무렵.

멸망의 때에 이르렀을 때 가장 먼저 왕국을 배신할 가문이었다.

당시 그들은 놀랍게도 마장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장기를 드러낸 소울레스가는 곧바로 악제의 군단에 합류했다.

작렬한 마력 포격.

내부의 적, 왕국의 배신자가 내뿜은 악의는 그렇게 에어라인에 작렬하고 말았다.

“소울레스가에게 열화판 강마력 엔진의 술식 도해를 내어 준 것도 역시 닥소스가겠지. 전달자는 물론 그대들일 것이고.”

전쟁을 벌일 명분이 없다면 적국의 내분을 조장하는 것.

그것이 국가 전략의 오랜 원칙이었다.

문제는 그 모든 일에 악제의 음모가 닿아 있었다는 것.

“……제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입을 열어 인정만 하지 않았을 뿐, 리네오 길드 마스터 로벤의 태도는 뻔한 것이었다.

“내 술식은 그대들에게 내어 주지 않아. 내가 마정을 직접 가공해 주지.”

“예?”

모든 음모의 전후를 알고도 마정을 직접 가공해 주겠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가공된 마정석을 기존처럼 소울레스가에게 팔아 치우도록.”

“……!”

일이 이쯤 되니 대공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물론 마정이 부족하다면 기존의 매입가로 더 내어 주지. 단―”

로벤이 침을 꿀꺽 삼킨다.

“내 모든 협조에는 하나의 조건이 전제된다.”

“마, 말씀하십시오!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루인이 사악하게 웃었다.

“이 모든 정보를 렌시아가 놈들에게 흘려라. 물론 나와 나누었던 이야기들까지 전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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