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37화 (137/187)

<137화>

리네오 길드의 짐꾼으로 위장한 루인과 리리아.

리리아는 퍼스트 아레아의 검문소를 삼엄하게 지키는 경비대원들을 바라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했다.

지금 리네오 길드의 짐꾼들이 태연하게 걸어가고 있는 장소는 막연히 상상했던 비밀 통로 따위가 아니었다.

그냥 검문소를 정식으로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장물들을 둘러메고 통과하고 있는데도, 그런 짐 가방을 수색하는 경비대원은 한 명도 없었다.

르마델 왕국의 비밀이라는 에어라인의 경계 태세가 이토록 허술하다니!

리리아는 귀족으로서 자존심이 상했다.

보안이 이토록 허술하다면 언제 에어라인에 재앙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터.

“갑자기 왜 그런 심각한 얼굴이냐.”

“아버지께 이 일을 말씀드려야겠다.”

루인이 피식 웃었다.

“이미 알고 있다. 물론 어브렐가뿐만 아니라 왕국의 귀족가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검문소의 경비대원들이 대놓고 길드의 장물을 들여보내고 있다. 외부의 눈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가장 말단의 경비 대원들이 쉬쉬하지 않는다는 건 이 일이 이미 저들의 부정이 아니라는 뜻.

에어라인에 장물을 들여보내는 대가로 얻는 모든 이권이 상부의 권력과 닿아 있다는 의미다.

“벌써 이걸 다 알고 있다고……?”

아직 순수한 열정과 낭만으로 살아가는 어린 소녀가 이런 왕국의 부조리를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어른들이 모두 그렇게 올바르게 살아왔다면 그 처참한 살육의 역사가 존재할 리가 없지. 왕실이나 대귀족가들이 뭔가 도덕적이고 대단할 거라는 착각은 버리는 게 좋다. 차라리 아이 쪽이 나아.”

“그래도 이건…….”

다시 피식거리는 루인.

“왕국의 존망과 관련된 일에 부정은 있을 수 없다?”

“당연하다! 에어라인이 이토록 허술하게 운영되고 있다면! 이건……!”

다름 아닌 자신이 직접 보았다.

베스키아 산맥의 주봉을 따라 기다랗게 누워 있는 에어라인의 처참한 잔해를.

“마찬가지다. 역사 속의 왕국들이 치열하게 재앙을 대비했다면 그 수많은 멸망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테지.”

인간 문명에서 탄생한 영광의 역사와 동일한 수의 멸망의 기록이 존재한다.

이건 불변하는 진리다.

영속(永續)한 문명이나 왕국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이 대륙에 남아 있어야 할 테니까.

“인간들은 늘 스스로 살고 있는 현재의 문명이 최고라고 생각하지. 착각이다. 우리가 역사 속 패배자들의 영광을 오만으로 여기듯, 언젠가 이 르마델 왕국도 오만과 굴종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넌 어떻게 그런 말을…….”

왕국의 대귀족, 하이베른가의 대공자가 르마델의 문명과 영광을 부정하고 있었다.

처참한 멸망의 역사를 지나온 루인에게야 당연한 심정이겠지만, 리리아에게 그런 루인의 태도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것.

“목소리가 크십니다. 나라를 걱정하시는 귀족 나리들의 철학 이야기는 그쯤 하시지요.”

앞서 걸어가던 구스타스가 핀잔을 주자 루인과 리리아가 침묵을 이어 갔다.

저 멀리 중심 블록에 보이는 건국왕 소 로오 르마델의 동상이 그런 분위기를 더욱 어색하게 만들었다.

루인이 구스타스의 뒷모습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루하루 살기 바쁜 상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과 리리아의 대화가 배부른 귀족의 이념 놀이처럼 들렸을 것이다.

문득 루인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영광과 명예?

멸망과 굴종의 역사?

그런 건 소수가 평가하고 누리는 가치다.

이 대륙은 저런 평범한 이들의 세계인 것이다.

악제의 군단에 맞서 싸웠던 인류 연합.

소수의 초인보다 저런 평범한 이들에게 그 전장은 더욱 처절했다.

영웅들은 가치를 위해 싸웠지만.

저들은 스스로의 삶을 위해 싸웠다.

루인이 페이리스 마을을 비롯한 왕국의 백성들을 늘 안타깝게 바라봤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다.

세계의 멸망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그들의 살아남고자 했던 욕망, 그 처절한 투쟁심에 경이로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들의 삶, 딸의 안녕을 지켜 내기 위해 그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목숨을 내던졌다.

왕국의 국왕도 고고한 철학자도 그저 비탄을 토해 내는 데 급급했지만, 실제로 목숨을 내던져 악제의 군단을 막아 낸 것은 평범한 백성들인 것이다.

상인 구스타스의 저 등은 그의 자식에게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등이다.

가족을 책임지는 위대한 아버지.

가족의 생명을 지켜 내고 있는 그의 길을 누가 함부로 부정이니 불명예니 지껄일 수 있단 말인가.

“자식이 있나?”

루인의 질문에 구스타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흐흐, 딸만 둘입니다.”

“딸딸이 아빠군.”

묘한 어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펴는 구스타스.

“허허,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이들입니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누가 뭐라나?”

구스타스가 피식 웃으며 다시 힘차게 걸어간다.

그의 발걸음에 좀 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세상에 멸망이 도래할 때.

구스타스는 두 딸을 지켜 내기 위해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아갈 것이다.

그걸 알기에 루인은 장물을 거래하고 있는 그를 부정한 상인으로 매도하고 싶지는 않았다.

덜컥-

리네오 길드의 상점 내부로 들어오자 구스타스가 짐꾼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수고가 많았다! 오늘은 이걸로 퇴근이다! 저기 가일로에게 보수를 받아 가라! 힘들게 일했으니 두 배로 쳐주겠다!”

“역시 대장이 최고입니다!”

“보수도 두둑하게 받았는데 펍에 가서 한잔하겠는가 얀센?”

“좋지! 대신 오늘은 좀 일찍 보내 주게! 그저께도 마누라한테 맞아 죽을 뻔했네!”

왁자지껄 떠들던 짐꾼들이 줄을 서서 보수를 받아 챙기더니 이내 상점 밖으로 나갔다.

루인과 리리아가 길드의 외투와 짐 가방을 벗어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구스타스가 사람 좋게 웃었다.

“자 그럼 저도 보수 좀 받겠습니다.”

“검문소를 통과하게 해 준 것치고는 너무 대가가 큰 것 같은데.”

루인의 비릿한 미소에 구스타스는 허리를 굽신거렸다.

“어이쿠! 당연한 말씀입니다요! 제 호의에 대한 대공자님의 보상은 그저 저희 마도학자님을 만나는 것에 그치지요! 만약 대공자님께서 마정에 대해 저희 길드에 가르침을 주신다면 당연히 상당한 대가를 따로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요!”

“일단 만나는 보겠다.”

“곧바로 마도학자님을 데려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구스타스가 재빠른 걸음으로 사라지자 리리아가 루인을 바라봤다.

“마정에 관한 지식은 마탑과 먼저 공유해야 하지 않을까.”

마정에 대한 지식은 대륙의 모든 국가에서 핵심 기술에 속했다.

대부분 마탑이 그 지식을 독점하고 있었고, 또한 그런 지식의 외부 유출을 극도로 꺼리는 것이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는 루인의 표정에서 리리아는 이미 그에게 어떤 생각이 있음을 깨달았다. 굳이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좋을 대로 해라.”

루인이 상점의 이곳저곳을 훑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마정을 활용하는 일이 대중화될 수 있다면 오히려 그쪽이 더 바람직해.”

“왜지?”

“대륙의 왕국들이 마정을 다루는 지혜를 핵심 기술로 취급하는 이유는 마장기(魔裝機)의 마력핵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대자연의 선물을 기껏 전쟁에나 활용하는 수준인 거지.”

마도공학의 첨단 마장기.

국가 전략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위대한 마장기를 저런 식으로 매도하는 자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라니.

이 르마델 왕국 역시 그런 마장기가 고작 하나밖에 없어서 알칸 제국에게 핍박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게다가 스스로도 마법사라면 마탑의 총아, 모든 마법적 역량의 결실인 마장기에 대해 경외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마장기를 본 적이 있나? 왜 그렇게 마장기를 한심하게 생각하는 거지?”

그거야 실제로도 한심했으니까.

인간들끼리의 전쟁, 국가와 국가 사이의 전쟁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던 마장기.

하지만 대군단전에서는 고철 덩어리나 다름없었다.

기껏 은밀한 작전으로 마력 포격을 쏟아부어 봤자, 악제의 군단이 지니고 있는 대마력 차폐기이자 인공 생명체인 ‘안티 매직 와이엄’에 의해 모조리 분쇄되어 버렸다.

인간들 틈에 숨어 오랜 세월 마장기에 대해 분석하고 대비한 악제의 군단에게, 마장기란 그저 보기 좋은 타깃에 불과했던 것이다.

당연히 루인은 그런 마장기에 대해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현시대의 마도학자들이 아무리 하늘처럼 떠받드는 기술일지라도 루인에게는 흔한 마도 공식에 불과한 것이다.

“한심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관심이 없다.”

“……왜지?”

마장기는 이 세계의 모든 역량이 담긴 마법적 지혜의 총아.

마장기 하나로 수만의 군대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엄연히 현실로 작동하는 세계였다.

마법사라면 그런 마장기에 대해 관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을 텐데?

그렇게 리리아가 루인을 묘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리네오 길드의 마도학자 테모도스가 상점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얼굴이 루인을 보자마자 환해졌다.

“정말 자네였……!”

테모도스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이제 에어라인의 시민들 중에서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루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기수 쟁탈전은 에어라인의 시민들에게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위대한 사자의 가문이자 왕국의 기수!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루인이 피식 웃었다.

“어차피 그대는 르마델 사람도 아닌데 뭘.”

테모도스가 마주 웃는다.

“서류상으로는 엄연히 에어라인의 시민입니다.”

“됐고. 용건만 빨리. 아카데미로 복귀해야 한다.”

테모도스는 곧장 로브의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쳤다.

테이블을 바라보던 리리아의 동공이 급격하게 벌어진다.

“……!”

이렇게 복잡한 마력회로들이 광활하게 얽힌 술식 도해는 마도명가의 혈족으로 살아온 그녀에게도 처음 있는 일.

대체 어떤 기전과 이론들이 얽혀 있는지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리리아의 열정 가득한 시선이 이내 테모도스를 향했다.

고작 상인 길드의 마도학자로 살아가기엔 그의 마법적 경지가 너무 아까울 정도였다.

리리아가 판단하는 그의 경지란 마탑의 고위 마법사 수준, 그 이상이었다.

“이건 저희 길드가 보유하고 있는 마정의 ‘마력 추출 술식 도해’입니다.”

고작 상인 길드 따위가 마정의 마력 추출 술식 도해를 보유하고 있다는 건 쉽게 믿을 수 없는 일.

루인은 이 리네오 길드가 결코 평범한 상인 길드가 아니라는 것을 예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희 마력 추출 술식 도해로 가공할 수 없는 마정은 이 베나스 대륙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너무나 태연한 루인의 반응.

테모도스는 이 사실을 이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가 알고 있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대공자님께서 저희 리네오 길드에 인도하신 마정은 보통의 물건이 아니었군요.”

“제대로 추출할 수만 있다면 적어도 인간계에 존재하는 마정의 열 배가 넘는 효율을 보장하는 마정이지.”

“여, 열 배!”

열 배의 효율을 지닌 마정이라니!

그 가치를 도저히 환산할 수 정도였다.

테모도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대공자님께서는 저희 마정의 마력을 추출할 수 있는 술식을 알고 계십니까?”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루인.

“알고 나를 찾은 것이 아닌가?”

“저, 저희 정보에 의하면…….”

피식.

“호오, 아카데미의 깊숙한 곳까지 눈(目)을 심어 뒀다?”

입술을 깨물고 있던 테모도스가 길드의 추적을 인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아시는 것 같으니 질문을 달리하겠습니다.”

“해 봐.”

“……대공자님께서 마법학부에 기증하신 마정이 저희에게 인도한 것과 동일한 마정입니까?”

“물론이다.”

테모도스가 온몸을 떨기 시작한다.

분명 대공자 루인은 그 마정에서 마력을 뽑아내 시약을 제조했기 때문이었다.

“저희가 어떡하면 대공자님의 술식을 얻어 낼 수 있겠습니까?”

루인이 웃었다.

“렌시아가의 적(敵)이 될 각오.”

“예……?”

황당해하고 있는 테모도스에게 다시 루인의 음침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길드장을 만나겠다. 테모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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