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36화 (136/187)

<136화>

하이베른가를 나서는 루인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근 일 년 가까이나 왕립 아카데미 생활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가문의 상황을 제법 걱정했었다.

하지만 그런 우려가 무색할 정도로 가문은 이전보다 훨씬 잘 운영되고 있었던 것.

뛰어난 능력을 지녔을 거라고 짐작은 했었지만, 소에느의 역량은 그런 자신의 예상조차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회계 장부를 모두 꼼꼼하게 살피고 온 루인은 그녀의 철두철미한 일 처리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막대한 군비 지출을 상시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하이베른가의 특성상, 지금까지의 가문은 늘 적자 상태를 면하지 못했다.

한데 소에느는 그런 하이베른가를 단 3개월 만에 흑자 경영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그건 단순히 가문의 창고를 넉넉하게 채운 수준이 아니었다.

철저한 성과제에 따른 보상과 불이익으로 가문의 모든 구성원들을 능동적으로 변모시켰다.

게다가 가문과 다양하게 얽혀 있는 이해관계들을 적당히 조율하고, 암암리에 벌어지던 부조리들을 완벽히 타파했으며, 방계와 봉신가들의 불만까지 적당한 교섭으로 모두 잠재워 버렸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이 모든 과정을 가문의 구성원에게 강요하면서도 결코 사자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는 것.

그녀는 사자의 힘을 철저하고 잔인하게 구사하면서도, 구석에 내몰린 이들에게만큼은 넉넉한 자비와 아량을 베풀었다.

그것은 단순히 부를 축적하고 경영하는 수준을 넘어선 무언가였다.

소에느 프란시아나 베른.

아버지의 부재를 틈타 단 십여 년 만에 그녀가 완벽하게 가문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

드러난 소에느의 능력은 루인이 보기에도 실로 무서운 것이었다.

만약 자신의 고모가 혈통의 정통성을 지닌 남자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하이베른가 역사상 최초로 장남이 아닌 차남에게 기수의 권위가 이어졌을 수도 있었다.

‘아…….’

한마디도 없이 묵묵히 자신을 따라 걷고 있는 리리아를 그제야 인식하게 된 루인.

그동안 루인은 어브렐가와 맺은 봉신가의 맹약, 그리고 월켄의 일과 가문의 경영까지 신경을 쓰느라 한동안 리리아에게 소홀했다.

조금은 미안했는지, 루인이 어색하게 걸음을 멈추며 리리아에게 물었다.

“조금 쉬다 갈까.”

“괜찮다.”

특유의 무표정한 리리아를 바라보며 루인은 피식 웃어 버렸다.

그녀는 다시 혼돈마의 꼬리를 활용해 에어라인으로 가려던 자신의 손을 한사코 거부했다.

분명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는 있었지만, 몸에 엄청난 부담이 되는 방식이라는 걸 지금까지 모두 지켜봤기 때문이었다.

혼돈마의 꼬리는 마력을 극한으로 주입하면 음속까지 돌파할 수 있는 뛰어난 아티펙트로 변모한다.

그러나 인간의 몸이 음속을 감당하려면 강력한 육체 강화 마법이나 배리어계 마법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동안의 여정에서 루인은 혼돈마의 꼬리에 마력을 밀어 넣으면서도 배리어계 수호 마법까지 함께 운용해 왔던 것.

그런 혼돈마의 꼬리를 구동하는 데 필요한 마력은 상당했다.

루인의 막대한 융합 마력으로도 수십 번을 연속으로 구동하면 마나 번의 위험에 빠질 정도.

물론 그런 배리어가 살을 에는 바람까지 모두 막아 주는 것은 아니었다.

투명한 배리어 사이로 쏟아지는 풍압에 리리아는 몇 번이고 기절을 경험한 상태였다.

“잠시 쉬자.”

“…….”

무심하게 서 있던 리리아.

하지만 루인이 나무 그늘에 앉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녀도 함께 앉았다.

“왜 넌 나에게 한 번도 묻지 않지?”

분명 궁금한 것이 많을 것이다.

누가 봐도 마계의 생물이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흉측한 마물의 꼬리.

자신의 가문이 갑작스럽게 하이베른가의 봉신가가 된 사연.

월켄의 의식을 잠식했던 악마적인 존재.

더욱이 그런 존재를 마치 알고 있는 듯이 대처했던 자신의 모습까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몇 번이고 물었을 만한 불안한 의문들.

그러나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속내를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이 없었다.

“뭘?”

“이것저것 다.”

리리아가 바닥의 풀을 매만지며 소리 없이 웃었다.

“언니가 살았어.”

“음…….”

“난 그거면 돼.”

많은 의미가 함축된 리리아의 대답.

분명 그 말은 모든 의문을 삼킬 수 있을 만큼 받은 은혜가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정말로 하나도 궁금하지 않나?”

“궁금하다.”

“그런데?”

한 움큼 베어 쥔 풀을 허공에 뿌리던 리리아.

“널 알아 가는 만큼 내 생각이 복잡해질 게 뻔하다.”

본인의 심상이 어지러워질 테니 마법의 경지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리리아의 대답이 진실일 리가 없었다.

무심한 척을 하고 있지만 그녀는 자신이 경험한 어떤 생도보다도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루인이 잘못 알고 있는 것.

리리아가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아버지의 혼인 동맹을 거절했다고 들었다.”

“…….”

리리아의 얼굴에는 이미 옅었던 웃음기마저 사라진 상태.

“부담스러운 요구였다.”

“부담……?”

리리아의 표정이 금방 복잡해진다.

“그 말은…… 내가 부담스럽다는 뜻인가……?”

“지금의 권력 지형에서 하이베른가 대공자의 아내는 여러 정치적인 집단의 표적이 될 확률이 높다.”

“…….”

“네가 가문의 정원을 가꾸며 살아가는 여성스러운 성향은 아니잖아. 분명 이 왕국의 마법사로 활동할 텐데, 그런 네게 나와의 혼인 동맹은 자살행위다.”

“그것이 거절한 이유의 전부라고?”

루인은 오랜 혹한의 세월을 견뎌 온 대마도사.

리리아의 이런 노골적인 반응을 두고도 아무것도 느끼는 것이 없다면, 오늘부로 대마도사의 명성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날 좋아하지 마라.”

“무, 무슨 소리……!”

좋은 사람을 가까이에 두고 싶은 마음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니까.

이런 정도가 루인이 리리아에게 가지는 감정의 전부였다.

남녀 사이의 애정이나 사랑은 대마도사에게 너무 먼 추억이자 파편.

대마도사 루인에게 리리아는 어린 소녀가 아니라 아기나 다름없었다.

루인이 웃으며 리리아의 머리를 흩트렸다.

“하지 말라면 하지 마라.”

리리아가 입술을 깨물며 루인의 손을 뿌리친다.

“이런 거 하지 마.”

처음으로 자신의 머리칼을 쓰다듬은 남자.

처음부터 이것 때문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것이.

“너…….”

리리아의 말을 듣지도 않고 일어나 버린 루인.

그러나 루인의 걸음은 금방 멈추고 말았다.

“루이즈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

“뭐……?”

홱 하니 뒤돌아보는 루인의 얼굴이 마치 악마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루이즈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나?”

리리아가 당황한 듯이 대답했다.

“그, 그런 말은 한 적은 없지만 분명 내가 보기에…….”

“그럴 리가 없다! 헛소리하지 마! 아무리 너라고 해도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한 번만 더 입 밖으로 내뱉는다면 그땐 용서하지 않을 거다!”

여자의 호감에 반응하는 남자의 태도치고는 지나치게 신경질적이고 이질적인 반응.

“대체 왜 그러는 거지? 루이즈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 건가?”

“시끄럽다!”

다시 홱 하고 돌아서는 루인.

루이즈는 시르하의 여자.

그런 루이즈가 자신을 사랑할 리가 없었다.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

그렇게 루인은 리리아의 말을 부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심 불안했다.

쉽게 부정하기엔 여자의 감은 무시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거지?”

“……느낄 수 있다.”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인과를 살피는 마법사의 냉철한 직관으로는 분명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같은 여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강력한 무언가가 있었다.

루인을 바라보는 눈빛과 표정, 그리고 살갑고 따뜻한 미소.

루이즈의 미소를 바라보는 자신의 가슴이 아렸다.

리리아가 그 감정의 정체를 깨닫게 된 건 한참이 지나고 나서였다.

이내 한숨을 내쉬는 루인.

‘역시 어린 시절의 몸은 여러모로 불편하군.’

혈기왕성한 아이들과 부딪힐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다.

물론 어린아이들이 서로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신은 이미 닳고 닳아 버린 대마도사였다.

루인은 자신의 태도를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할 필요성을 느꼈다.

“난 네가 여자로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

멍해진 리리아.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넌 여자가 아니라 그냥 리리아다.”

루인이 자신의 할 말만 끝내고 홱 하니 걸어갔다.

가슴을 간질이는 듯한 묘한 감정.

리리아가 두 주먹을 꾹 움켜쥔 채로 루인의 뒷모습을 차분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 * *

리리아와 함께 에어라인의 퍼스트 아레아(First Area)에 올라온 루인은 경비대원들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기에 급급했다.

그도 그럴 것이, 퍼스트 아레아는 입천 절차를 밟는 장소였지만 루인과 리리아는 정상적으로 출천한 적이 없었기 때문.

서류상으론 루인과 리리아는 거주 구역의 타일들을 멀쩡하게 누비고 다녀야 했다.

루인과 함께 건물의 뒤편에 숨어 있던 리리아가 묘한 표정을 했다.

수많은 경비대원들의 절도 있는 구둣발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척척척-

처음 에어라인에 올라왔을 때와 비교하면 경비대원들의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

루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제 사건 같은 것이 발생한 것 같다. 아니면 불법 체류자를 발견했거나.”

“성가시게 됐군.”

두 번째 아레아로 넘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보안 시설을 지나야 했다. 그리고 그곳은 입천 서류를 통과한 자만이 지날 수 있었다.

당연히 루인과 리리아가 정상적으로 그런 보안 시설을 통과한다면 비인가 출천(出天)을 스스로 자백하는 꼴이었다.

혼돈마의 꼬리로 에어라인을 박차고 나간 것이 이렇게 발목 잡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떡하지?”

공간 이동이나 은폐 마법을 활용할 수도 없었다.

모든 경비대원들이 특수 아티펙트인 마력 감지봉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

마법이나 투기를 감지하는 순간 그들의 모든 마법봉이 일제히 울어 댈 것이다.

“일단 좀 느슨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이나 흘렀음에도 경비대원들의 빡빡한 경계 태세는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저벅저벅.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오자 루인이 매섭게 뒤를 돌아보았다.

“엇……?”

루인의 얼굴을 확인하고서 경악으로 굳어진 남자.

남자는 자신의 일행을 향해 손짓으로 멈추게 했다.

이어 그가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았다.

“오랜만입니다, 손님 생도님들. 아, 이제 대공자님이라고 불러 드려야겠죠?”

기름칠로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

푸근한 인상의 중년 남자.

그는 루인과 리리아가 익히 아는 사내였다.

“……구스타스?”

리네오 길드의 장물 거래 담당 구스타스.

그가 루인을 향해 친근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회포는 나중에 푸시지요. 한데 숨어 계신 것을 보니 곤란을 겪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

구스타스의 뒤편으로 커다란 짐 가방을 멘 사내들이 기다랗게 줄을 서 있었다.

그 광경에 루인은 기가 찼다.

“설마 이렇게 쉽게 에어라인에 장물을 들여오는 건가?”

“하하! 영업 비밀에 관해서 말씀드릴 수는 없지요. 곤란을 겪고 계신다면 제가 작은 성의를 보여 드릴 순 있습니다만…….”

“아레아를 검문 없이 통과할 방법까지 있다?”

“하하, 다시 말씀드리지만 영업 비밀입니다.”

루인이 미심쩍은 눈으로 구스타스의 위아래를 살폈다.

“조건은?”

길드의 약삭빠른 장사치들에게 공짜를 바라는 건 바보 같은 짓.

지난 생 상인 길드들을 상대하며 그들에게 대가 없는 호의를 바란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은 루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저희들은 오래전부터 대공자님을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사람 좋게 웃고 있는 구스타스를 바라보며 루인이 함께 피식 웃었다.

“마정(魔精)의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 모양이군.”

“헉! 어떻게……?”

뻔하다.

마계의 마정을 인간 마도학자들이 가공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마도학자 테모도스를 만나 조언을 해 주는 조건인가?”

마치 내심을 들킨 사람처럼 깜짝 놀란 구스타스의 얼굴.

“역시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다우신 심계이십니다. 이 구스타스 정말 감탄―”

“시끄럽고. 여길 벗어날 방법이 있다면 빨리 안내나 해.”

씨익 웃던 구스타스가 짐꾼들의 대열로 걸어가더니, 잠시 후 허름한 옷가지와 짐 가방을 루인과 리리아에게 내밀었다.

“지금부터 대공자님은 저희 리네오 길드의 짐꾼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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