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35화 (135/187)

<135화>

“목 뒤! 그녀의 목덜미를 본 적이 있나!”

루인의 반사적인 외침에 월켄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네가 말했던 낙인 같은 건 본 적이 없다. 아니 확인한 적이 없다는 표현이 좀 더 맞겠군.”

“확인하지 못했다니?”

“특별한 사이도 아닌데 머리칼로 감춰져 있는 뒷목을 들춰 볼 일이 생길 리가 없잖아?”

아르디아나.

분명 흔한 이름이다.

하지만 렌시아가는 악제와의 강력한 연관성이 의심되는 가문.

루인은 그런 평범한 이름의 소녀가 렌시아가에 존재한다는 것에 본능적인 기시감을 느꼈다.

“그녀의 외모적 특성은 어땠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늘 그대로였나?”

“사람의 외모가 갑자기 변하기라도 한다는 소리 같군?”

루인의 두 눈이 침잠하게 가라앉는다.

“과거의 우린 그녀와 함께 50년간 인류 연합을 이끌었다.”

“그런데?”

“그런 긴 세월 동안 그녀의 외모는 변함이 없었다. 즉 늙지 않는다는 뜻이지.”

신의 힘과 닿아 있는, 신성한 능력을 타고난 아르디아나는 반백 년이 지나도록 노화하지 않았다.

앳된 소녀의 모습이 수십 년간 지속되자 그런 아르디아나를 두고 마녀라고 생각하는 병사들이 속출할 정도였다.

인상을 찌푸리는 월켄.

“내가 렌시아가에서 지낸 건 고작 몇 달에 불과하다.”

루인이 답답하다는 듯 다그친다.

“말투는? 혹 그녀가 남부식 사투리가 깃든 공용어를 구사했나?”

“난 대륙 남부의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다.”

“…….”

한참을 멍하게 굳어 있던 루인은 결국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월켄은 그 옛날의 검성(劒聖)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물 같았다.

구사하는 검술만 같을 뿐, 그 의식과 경험이 비교하기조차 민망할 정도였다.

하긴, 지금의 월켄은 수십 년 후에 만났을 완성형 검성의 어린 시절.

이질감이 느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진짜 아르디아나가 맞다면…….’

그렇다면 의문은 더욱 짙어진다.

악제와의 연관성이 의심되는 렌시아가와 성녀 사이에 대체 무슨 접점이 있는 거지?

지독히도 불길한 예감.

지금의 아르디아나가 악제의 의지에 의해 구속된 상태라면…….

과거 그런 성녀가 의도를 갖고 인류 연합을 찾아온 것이라면…….

뿌드득-

부서져라 이를 깨무는 루인.

과거, 악제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성녀가 검성을 조종하여 인류 연합으로 이끌었을 수도 있었다.

인류 연합의 탄생부터가 흩어져 있는 인류의 역량을 고의로 결집시키기 위한 악제의 의도일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성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그런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다.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가정이었지만 결코 배제할 수 없었다.

“악제의 청염은 내 문제다. 성녀는 내가 찾겠다. 일단 렌시아가로 가서 아르디아나를 만나지.”

루인이 그런 월켄을 말리려다 이내 뜻을 삼켰다.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랬다간 일이 더욱 복잡해진다.

자신이 나선다면 그건 대공가의 공식적인 행사가 될 테니까.

“투기를 조금 드러내 봐라.”

부우우웅-

루인의 염동력에 의해 섬세한 마력이 허공에 얽히기 시작했다.

“네 투기를 추적하는 마법이다.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가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지.”

“추적?”

“혼자 갈 거라면 내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 줘야지.”

“으음…….”

자신을 미덥지 못하게 여기는 루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결국 월켄은 못 이기는 척 투기를 끌어올려 주었다.

우우웅-

루인의 마력이 월켄의 투기와 얽히며 반응하다 추적의 룬(Rune) 문양으로 화했다.

자신의 룬 마법이 월켄의 내부에 스며들자 루인이 다시 말했다.

“그녀의 목 뒤 낙인을 먼저 확인해라. 낙인이 없다면 어설프게 추궁하지 말고 일단 무조건 관찰해.”

“왜지?”

목 뒤에 낙인이 없다고 해도 그녀가 성녀가 아니라는 확증은 될 수 없었다.

그 낙인이 미래에 생긴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청염이 급한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성녀의 능력을 각성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루인은 성녀가 악제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려고 했지만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분명 강력한 의심이 들었지만 확신은 아니었기 때문.

설사 현재의 그녀가 악제의 사람이라고 해도, 훗날 성녀의 능력을 각성하여 악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을 가능성도 있었다.

“움직이는 것도 아무렇게나 움직이면 안 돼. 넌 우리 하이베른가가 구속을 선언한 대상이다. 정 나가야겠다면 우리 가문에게 적당한 사건이나 명분을 주어야 한다.”

귀족들의 복잡한 정치 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월켄이 얼굴을 찌푸렸다.

“사건은 뭐고 명분은 뭐지?”

“네가 우리 기사들을 다 때려눕히고 스스로 탈옥을 했다든지, 아니면 네가 끝까지 알칸 제국의 제국법으로 처벌받겠다며 입을 닫았다든지 하는 그런 일. 전자는 ‘사건’이 되겠고, 후자는 우리가 풀어 줄 ‘명분’이 되겠지.”

기사를 꿈꿔 온 이에게 불명예스럽게 탈옥이라니.

월켄은 망설임 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명분으로 하지. 난 알칸 제국의 제국법에 따라 처벌받겠다.”

루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네가 초인이라는 것이 르마델 왕국의 전역에 드러났다. 알칸 제국이 네 검술을 추적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알칸 제국의 특작 정보부가 지닌 정보력은 상상을 불허하는 수준.

이미 알칸 제국은 월켄이 패왕 바스더의 후예라는 것을 파악하고 신변 확보를 위한 다음 작전으로 넘어갔을 수도 있었다.

“……어쩌라는 거야?”

“그냥 우리 하이베른가에 있어라.”

초인의 투기를 드러내며 강짜를 부렸는데도 루인은 물러서거나 양보하는 법이 없었다.

월켄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루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방금 네게 정신 방호 주문을 함께 걸었다. 이제 악제가 다시 네 의지를 잠식하려 든다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의 모험이라는 뜻이다. 또한 반드시 정체가 드러날 수밖에 없지.”

“…….”

“명심해라. 아르디아나가 우리의 성녀 듯이―”

치밀하고 촘촘한 감정으로 얼룩진 루인의 두 눈이 월켄을 다시 직시했다.

“나 역시 너의 대마도사다.”

알칸 제국과 렌시아가의 음모에 유일하게 방패가 되어 줄 수 있는 곳.

지금의 월켄에겐 이 사자성, 그리고 대마도사인 자신의 곁이 가장 안전했다.

“아르디아나는 내가 알아보겠다. 넌 여기에 남아…….”

“부탁이냐 명령이냐.”

“당연히 부탁이다.”

이내 신중하게 생각에 잠기는 월켄.

하지만 그는 이미 결정한 판단을 바꾸는 일은 하지 않았다.

“호의는 고맙게 받아들이지. 하지만 역시 내 일엔 내가 나서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루인이 피식 웃었다.

고집 하나는 그대로였다.

어떤 순간, 어떤 상황에서도 검성 월켄은 한번 세운 자신의 뜻을 다시는 번복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

씨익.

하지만 자신도 여전히 그 옛날의 대마도사다.

<죄인 월켄이 구금을 거부하고 본 가를 탈주했다! 하이베른가의 기사들은 즉시 모든 행위를 멈추고 명을 대기하라!>

루인의 절대 언령을 바로 코앞에서 들은 월켄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다.

망설임 없이 뒤돌아서는 루인.

“나도 내 방식대로.”

역시 대마도사는 대마도사다워야지.

* * *

다시 렌시아가로 가겠다는 월켄이 불안하긴 했지만, 지금으로썬 정신 방호 마법과 추적의 룬(Rune) 마법이라는 안전장치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대마도사의 마법이라고 해도 그 지속 시간에는 한계가 있는 법.

특히 추적 룬 마법은 한 달 정도가 효과가 지속되는 최대치였다.

그리고 악제가 생각보다 렌시아가와 가까운 관계라면 더욱 큰 문제였다.

함부로 신분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의 예상이 깨질 수가 있었다.

정신 방호 마법을 뚫으려는 악제의 시도 역시 배제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때.

덜컥-

루인의 방문을 단숨에 열고 들어온 카젠이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탈주라니, 대체 무슨 소리냐?”

루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놈의 고집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 봤자 괜히 역효과만 불러일으키니까요.”

“이건 본 가의 명예가 달린 일이다! 죄인이 저리도 손쉽게 탈주를 한다면 모두가 우리를 우습게 볼 것이다!”

“방법이 없었습니다. 국왕 앞에서 우리가 손수 죄인을 구금하겠다고 밝힌 마당입니다. 죄가 없어 그냥 풀어 준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녀석을 이해해 주십시오. 아버지.”

자신의 인격과 자아가 걸린 일이었다.

가까운 미래에 자신의 자아를 스스로 통제할 수 없게 된다면, 누구라도 뛰쳐나가 해결책을 찾으려 들 것이다.

“렌시아가가 그를 통제하도록 두어도 괜찮겠느냐?”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이미 모든 진실을 녀석에게 알렸습니다. 그들에게 회유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루인은 완벽한 확신이 없이는 결코 함부로 단언하지 않는다.

그런 루인이 가능성이 없다고 말한다면 카젠은 충분히 안심할 수 있었다.

“차라리 이번 일을 기회로 삼았으면 해요.”

또각또각.

경쾌한 구둣발 소리.

방에 들어오자마자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있는 소에느에게 루인의 질문이 이어졌다.

“기회?”

“나중을 대비하는 명분으로 그치지 말고, 오히려 검산의 탈주를 왕국에 공표하는 거야.”

“으음…….”

루인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일엔 위험 부담이 조금 있었다.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자는 말이지?”

미소 짓고 있는 소에느.

“일단 그게 첫 번째 효과야. 움직이는 귀족가들이 반드시 나타날 테니까.”

“그래. 월켄의 탈주를 도우려는 자들이 있을 테니.”

카젠이 더욱 심각해졌다.

“북부의 가문들 중 말이냐?”

“당연합니다. 본 가의 지척인 세헬가를 수족처럼 조종했던 놈들입니다. 다른 북부의 가문들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죠.”

다시 루인의 시선이 소에느에게 향했다.

“두 번째 효과도 있어?”

“보웬 남작의 석방을 거부하는 강력한 명분을 챙길 수 있어.”

죄인이 탈주해 버린 대사건을 공표한다면 함부로 보웬 남작을 풀어 줄 수 없다는 주장이 좀 더 수월해지는 것.

“세 번째는 우리의 추적대가 남부를 관통할 수 있는 명분도 생길 수 있다는 거야. 추적을 핑계로 렌시아가의 코앞까지 정찰할 수 있잖아.”

소에느의 말에 루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지막은 앞선 두 개의 효과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지금 하이베른가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정보의 부재.

이번 기회에 렌시아가의 영지를 정탐하여 정보를 모은다면 앞으로의 계획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더욱이 하이베른가의 기사들이 왕국의 남부에 들어간다는 것은, 귀족들의 세계에서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될 수도 있었다.

“혹시 네 번째도 있어?”

소에느가 더욱 화사하게 웃었다.

“가는 길에 봉신가의 깃발을 어브렐가에 하사하고 오는 거지.”

순간 루인은 소름이 돋았다.

남부로 향하는 하이베른가의 기사들을 왕국의 모든 귀족들이 지켜보는 상황.

그런 엄중한 상황에서 봉신가 공표가 이뤄진다면 그 효과야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루인은 처음으로 소에느가 무서웠다.

“그 짧은 시간에 이 모든 걸 생각해 내다니…….”

소에느의 고운 이마가 찌푸려진다.

“뭐래. 진짜 괴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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