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콰앙!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 사이로 데인의 육중한 검이 쇄도한다.
롱소드로 사자검을 익히기 시작한 하이베른가의 혈족들이 중검(重劒)인 바스타드 소드로 넘어가는 시기는 성년.
하지만 데인은 루인의 도움으로 4성의 경지를 빠르게 이루었고, 스피릿 오러를 제법 익숙하게 다루게 된 지금은 5성까지도 넘보고 있었다.
성년을 불과 1년 앞두고 있는 데인.
콰아아앙!
육중한 철제 갑옷이 덧씌워진 연습용 허수아비가 걸레짝처럼 짓이겨진다.
웬만한 수련 기사들에게도 한 달은 충분히 버티는 허수아비였으나 데인은 불과 반나절 만에 박살을 내 버린 것이다.
쿠웅!
“허억허억!”
턱까지 차오른 숨.
온몸의 힘이 쭉 빠졌으나 데인은 바스타드 소드를 쥔 손을 결코 놓지 않았다.
“제법이구나.”
“형님……!”
루인을 발견한 데인이 비틀거리면서도 예를 갖췄다.
“몸을 너무 혹사하는 방식이다.”
데인이 씨익 하고 웃었다.
“중검사(重劒士)는 손아귀가 찢어지는 만큼 성장한다.”
루인이 묘한 표정으로 서 있자.
“아버지의 일관된 말씀이십니다.”
“……무식해.”
루인이 훈련장의 관람용 의자에 걸터앉고는 흐뭇하게 웃었다.
이 하이베른가에서 데인이 가장 행복해 보였다.
자신과의 싸움만을 이어 갈 수 있는 최고의 환경에서, 데인은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대로 몇 년만 더 지난다면 아카데미의 이명 생도 수준을 충분히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검술왕의 성장 속도는 무서울 정도였다.
“형님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소리냐?”
“그런 엄청난 기수 쟁탈전을 치르고도 저더러 무식하다는 말이 나옵니까?”
“……아.”
하이베른가 대공자, 루인은 초인을 꺾었다.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했던 폐인이었던 형님.
죽음과 삶 사이를 오가며 평생을 누워만 있던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그런 그가 일 년 사이에 초인을 꺾을 정도까지 성장했다는 것은 기적 따위로 치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이적(異蹟)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적을 만들어 낸 자의 노력이 평범할 리가 없었다.
범인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떤 인간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날들을 보내 왔을 것이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함께 의자에 걸터앉아 물을 마시고 있는 데인.
입을 스윽 닦고 다시 검을 쥐며 훈련장으로 나아가려는 데인을 루인이 제지했다.
“더 쉬거라.”
“아직 멀었습니다.”
한숨을 쉬는 루인.
“후…… 마법에 몸을 담고 있는 내가 사자검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는 안다.”
“예?”
“하늘의 성긴 그물은 언젠가 모두에게 닿는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너무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말거라. 자칫 집착과 편협을 낳는다. 의지와 뜻이 있다면 언젠가 닿을 수 있느니.”
그것은 검이든 마법이든 상관없이 적용되는 법칙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루인 역시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악제라는 절대적인 적을 상대하기 위해 지금까지 너무 지나치게 자신을 몰아붙였다는 것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어그러지는 자신의 마음이 느껴진다.
순수한 열의는 집념으로 바뀌고, 그 집념은 집착을 낳는다.
편협, 아집, 욕망…….
부정한 생각들은 그렇게 탄생된다.
“너와 나. 경지를 꿈꾸는 모든 이들이 가슴에 새겨야 하는 말이다.”
언젠가 하늘의 뜻이 모두에게 닿는다는 말.
그것은 검성 월켄이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었다.
날로 피폐해져 가는 인간 진영의 영웅들에게 그는 마치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그는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했느냐?”
“검산님이요?”
“그래.”
“예. 아직입니다.”
루인이 눈부신 하늘을 바라보았다.
검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가 다시 의식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강력한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악제의 사념을 한 번이라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내내 불안했다.
한 번이라도 사념의 인(刃)을 박아 넣은 인간을 악제는 결코 놓치는 법이 없었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성녀를 찾아야 했다.
테아마라스의 유적을 살피는 것에 성공한다면 루인은 곧바로 성녀를 찾아 나설 계획이었다. 오직 그녀만이 월켄의 청염을 없앨 수 있었다.
의자에서 일어나는 루인.
“그럼 데인. 나중에 보자꾸나.”
데인은 이대로 형님이 아카데미로 가면 또 한동안은 가문에 복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데인이 계속 입술을 오물거리며 망설였다. 뭔가 말을 아끼고 있는 태가 역력했다.
“다른 할 말이 있는 것이냐?”
힘겹게 말문을 여는 데인.
“……저는 많이 어리석었습니까?”
루인의 동공이 확장된다.
“뭐……?”
“저와 대련을 하던 검산이 말실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월켄이 베른가의 혈족들이라서 회귀(回歸)에 대해 모두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말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이제야 루인은 쉽게 눈치를 채셨던 아버지를 납득했다.
“저는 형님에게 가족이 맞습니까?”
“무슨 뜻이냐?”
다소 화가 난 듯한 데인의 표정.
“가문의 외부 인물에게도 털어놓으셨던 형님의 비밀을 왜 저는 모른단 말입니까.”
아, 이 입 싼 놈을 어떻게 골탕 먹여야 할까.
루인이 미간을 구기며 입술을 깨물자 데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산님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가 직접적인 사실을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저 파편 같은 작은 단서였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루인은 월켄이 왠지 일부러 그랬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람의 관계, 인연과 정을 누구보다 소중히 생각하는 본성을 지닌 사내.
“그동안 설명할 수 없었던 형님의 모든 것들이 그 하나의 가정에 완벽하게,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리고 형님께서 제게 했던 말들을 모두 곰곰이 생각해 보니…….”
데인이 고개를 들어 루인을 응시한다.
왠지 시리도록 슬픈 그의 두 눈.
“형님께서는 분명 제게 또다시 용렬한 영주가 될 것이냐고 화를 내셨지요.”
-언제까지고 기수가의 명예라는 허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외면할 것이냐! 또다시 용렬한 영주가 되고 싶은 것이냐 데인!
루인은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무심결에 소리쳤던 자신의 그 말이 이 어린 동생의 가슴에 그리도 알알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제가 정말로 용렬한 영주였습니까?”
“…….”
“형님의 기억 속에 용렬한 동생이었으니 절 그토록 치열하게 몰아붙이셨겠지요.”
데인의 두 눈에 잿빛 감정이 얽히기 시작하자.
루인의 표정이 무겁게 굳어졌다.
“시끄럽다.”
다시는 동생의 죽은 눈빛을 보기 싫어서 했던 선택이었다.
루인은 그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이 대마도사 루인의 기준이 높을 뿐이다. 너는…… 데인은…….”
루인이 데인의 머리를 헝클었다.
“검술왕은 세계의 영웅이었다.”
“검술왕(劒術王)……?”
묘한 표정으로 굳어 있는 데인을 향해 루인이 웃어 주었다.
“다시 검술왕이 될 수 있겠느냐?”
환하게 웃으며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데인.
“예! 형님! 반드시 검술의 왕이 되겠습니다!”
“그래. 할 수 있다.”
그렇게 대공자 루인이 훈련장을 떠나갔다.
그런 루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으스러져라 말아 쥐는 데인.
반드시 형님의 기준을 만족할 최고의 기사가 될 것이다.
* * *
월켄이 조용히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월켄은 루인의 시선을 외면했다.
루인이 소리 없이 웃었다.
“부끄러운 것이냐.”
청염의 무시무시한 권능과 악의를 직접 경험한 월켄의 표정은 심각해 보였다.
검을 아무리 갈고닦아 최강의 경지를 이룩한다고 해도, 자아가 자신의 것이 아닌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빌어먹을 악제의 청염을 없앨 방법이 뭐지?”
루인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성녀를 만나야 한다.”
“성녀?”
“너와 나의 동료였다.”
“동료…….”
끊임없이 흔들리는 월켄의 눈빛.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루인은 좀 더 자세히 성녀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녀는 ‘존재’들의 목소리에 직접 화답할 수 있는 위대한 성녀다. 대자연을 이해하는 능력 또한 마법사들보다 오히려 더 뛰어나며, 사람의 마음, 그 본질을 들여다보는 심안(心眼) 능력도 타고났다. 거짓을 가려내는 그녀의 능력 덕분에 우린 많은 배신자들을 솎아 낼 수 있었지.”
“지금 그녀는 어디에 있지?”
고개를 가로젓는 루인.
“모른다. 내가 아는 건 이름, 그리고 독특한 상처 자국뿐이다.”
월켄이 금방 얼굴을 찌푸렸다.
“우리의 동료였다고 하지 않았나?”
“동료라고 해서 모두의 마음을 아는 건 아니지.”
몸을 일으킨 월켄이 청명한 겨울 하늘의 창밖을 응시했다.
“그래. 가족의 마음도 모르는 것이 인간들이니까.”
월켄은 한 번도 가족이라는 것을 가져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부모와 형제들에게까지 자신의 비밀을 밝히지 않은 루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게 무슨 가족이란 말인가.
“역시. 네 의도였군.”
“너도 후련할 텐데.”
월켄의 말대로 한결 마음이 후련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비밀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은, 미래에 불확실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부정적인 요소가 늘어나는 일.
아버지와 데인 정도까진 어떻게든 괜찮겠지만, 자신의 비밀이 새어 나가는 것을 계속 방치할 수는 없었다.
월켄을 단속해야 했다.
“더 이상은 사양한다. 내 삶은 세계의 비밀과 닿아 있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그럴 작정이다.”
“그래. 믿겠다.”
그가 대답한 이상 더 말할 필요는 없었다.
검성은 말의 무거움을 아는 기사니까.
“성녀는 내가 직접 찾겠다.”
“사자성 밖으로 나가는 것은 위험하다.”
월켄이 피식 웃었다.
“한 번 이겼다고 해서 이 월켄이 만만해 보이나?”
한숨을 내쉬는 루인.
“기사로서의 네 역량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악제는―”
“그래. 무섭고 치밀하겠지.”
검성의 투기, 패왕 바스더로부터 이어진 혼돈의 오러가 끓어오른다.
쿠쿠쿠쿠쿠-
지축이 흔들리는 굉음, 그렇게 초인의 투기가 호수 별장을 통째로 집어삼킨다.
콰아아아앙-
“그래서?”
루인은 등줄기에서 전율이 치밀었다.
기수 쟁탈전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 짧은 사이에 월켄의 역량이 훨씬 강화되어 있었다.
정신 마법 없이 다시 붙는다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실로 엄청난 속도!
과연 유일무이한 검술의 천재, 검성이었다.
“너에게 나는 과거의 인연일지 몰라도 내겐 아니다.”
“…….”
“더 이상 날 통제하려 들지 마라.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물론 루인은 대마도사로서의 역량을 드러내어 월켄을 강압적으로 다룰 순 있었다.
하지만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월켄은 소중한 동료다.
그가 스스로 움직이려고 한다면 그를 돕는 것이 대마도사의 일.
“아르디아나. 목 뒷덜미에 불에 그을린 듯한 낙인을 지닌 소녀다.”
“뭐……?”
검성, 월켄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루인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녀를 본 적이 있는 건가!”
너무나도 황당하다는 듯, 월켄의 표정이 거칠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르디아나는 하이렌시아가에서 내 시중을 담당했던 하녀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