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머릿속에 꿈틀거리는 지렁이가 돌아다니는 듯한 불쾌한 두통.
작은 불꽃들도 팡팡 터지며 시야를 방해한다.
전형적인 마나 번(Mana Burn) 증상.
그럴 만도 한 것이, 마신 쟈이로벨도 연속으로 쓰기를 버거워하는 초고위 정신 마법을 무려 네 번이나 연달아 펼쳤으니.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이미지를 하려고 해 보았다.
하지만 심상도 모이지 않는 것이, 염동력 또한 깔끔하게 바닥난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루인은 어지러움을 겨우 견디며 천천히 일어났다.
“아버지……?”
창가 옆 의자에 앉아 있는 아버지, 사자왕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괜찮은 거냐고 인사라도 한마디 건넬 법하건만 아버지의 눈빛은 내내 투명하고 공허하기만 했다.
“놈은 물러갔습니까……?”
“…….”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는 카젠.
비로소 루인은 아버지에게 뭔가 큰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의 아비들이 이유 없이 침묵할 땐 자식에게 실망했거나…….
혹은 슬픔을 견디고 있다는 뜻.
아버지를 바라보는 루인의 눈빛도 함께 깊어졌다.
당신을 상심케 할 만한 일들을 떠올려 보았으나 자신은 그런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어떻게 견뎌 냈느냐.”
말할 수 없는 부모의 아픔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
아버지의 그 눈빛이, 그 아련한 감정이 현재의 자신을 향해 있지가 않았다.
마치 죄를 들킨 아이의 심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루인.
“아버지…….”
침묵으로 직시해 오는 아버지의 눈빛은, 분명 대공자 루인이 아닌 대마도사, 흑암의 공포 루인을 바라보고 계셨다.
‘…….’
알아차리실 만도 하다.
악제와의 대화 속엔 너무 많은 비밀들이 오고 갔으니까.
인간의 정신까지 장악할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를 처음 마주했던 아버지.
한데 자신은 그런 악제를 동요시켜 빈틈을 만들기 위해 노골적으로 정보의 우위를 활용했다.
아버지는 분명 그 대화를 통해 많은 것을 유추해 냈을 것이다.
가문에서 보였던 자신의 행동과 맞아떨어지는 해답을 얻어 내셨을 것이다.
그 증거는 아버지의 저 시리도록 아픈 눈빛이었다.
“힘들지 않았습니다.”
무심하게 대답하는 루인.
하지만 카젠은 그 말이 거짓임을 알았다.
그동안 자신이 아들에게서 본 것은 끝없이 풍화된 감정, 더 이상 닳을 것도 남아 있지 않은 빛바랜 눈빛.
그것은 전장의 참상을 평생토록 견디고 감내해 온 사자왕에게도 없는 것이었다.
대체 무엇을 견뎌 내야 그런 눈빛, 그렇게까지 감정이 닳아 버릴 수 있는지 카젠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내 눈은 왜 보지 못하는 것이냐.”
그야 마주 보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루인이 계속 고개를 파묻고 있자 카젠이 담담히 웃었다.
“역시 거짓말엔 서툰 것이냐.”
아들의 과거는 모른다.
그러나 저 순수함은 아직 그대로였다.
루인은 절대로 눈을 보며 거짓을 말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카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은 모두 회복하고 가거라. 적(敵)에게 너를 드러냈으니 지금부터의 여정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왜 묻지 않으시는 겁니까?”
아버지도 사람이라면 궁금할 것이다.
미래의 자신이 겪게 될 운명, 그 최후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막을 수 있는 불행은 없는지, 앞으로 무엇을 대비해야만 하는지, 또 하이베른가의 미래는 어떠했는지…….
무수한 질문이 입가를 맴돌 텐데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것.
루인은 그런 아버지의 태도를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너의 짐을 함께 나눌 생각은 없다. 네 운명은 네 것이고, 이 사자왕의 운명은 따로 있으니까.”
루인은 일부러 딱딱하게 말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실소를 흘렸다.
저 바보 같은 연기는 여전하시다.
자신이 눈을 바라보며 거짓을 말할 수 없는 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
아버지는 마음속의 온갖 의문들을 참고 계셨다.
걱정하시는 거다.
자신의 질문을 통해 혹시라도 아들의 아픈 상처, 쓰라린 과거를 들쑤실까 겁이 나시는 것이다.
루인은 아버지 카젠, 하이베른가 사자왕이 이토록 커다란 사람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런 아버지가 살아 있음에 감사했다.
이렇게 달려와서 언제라도 볼 수 있음에 안도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카젠이 문을 열다 말고 물끄러미 뒤를 바라본다.
“그런데 난 언제 죽느냐?”
“…….”
어느덧 루인이 창밖의 몽델리아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집무실에 앉아 열심히 서류를 작성하고 있는 소에느.
그녀는 몇 달 전부터 하이베른가의 정식 고문으로 취임해서 활동하고 있었다.
행정 명령(Executive order) 분야에서만큼은 오히려 가주보다 더 큰 권한을 지닌 직책.
많은 고민 끝에 가주의 제안을 받아들인 소에느는 열정적으로 가문의 구석구석을 탈바꿈시키고 있었다.
특히 회계 분야에서만큼은 아예 다른 가문이 되어 버렸다.
하이베른가에서 일어나는 부정부패의 총지휘자였던 그녀가 회계 분야를 손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동안 일상적으로 부정을 저질러 온 이들에게는 재앙에 가까운 일.
그녀는 누구보다 하이베른가의 구석구석에 퍼져 있는 부조리들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당연히 줄줄 새는 지출을 철저하게 관리 감독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녀는 하이베른가와 거래를 하고 있는 무수한 상인 길드와의 관계를 재정립했다.
그녀는 출납관에게 정례적으로 상납하던 상인들의 뇌물부터 폐지했다.
그동안 상납금만 넉넉하게 출납관에게 바치면 매입에 대해서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철저한 품질 관리, 가격 경쟁력, 납기일 준수가 담보되지 않는다면 곧바로 하이베른가와의 거래가 중지되어 버렸다.
길드의 상인들에겐 날벼락 같은 상황인 것이다.
가문의 재정을 타이트하게 옥죄자 느슨한 분위기부터가 달라졌다.
기사들은 더 이상 안주하지 않았다.
가문의 고문 소에느는 그 옛날의 공국으로 치면 집정관(執政官).
그런 집정관이 철저한 성과와 능력 위주의 인사 구조로 개편하겠다고 선언했으니.
더 이상 직책이 높다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덜컥-
소에느의 집무실에 들어온 루인이 태연하게 테이블에 앉자.
정신없이 서류를 작성하던 소에느가 미간을 찌푸린다.
“업무 중이야.”
“대공자는 가주와 더불어 가문의 모든 정무를 관리 감독할 권한이 있지.”
나직이 한숨을 쉬던 소에느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로 다가온다.
“검산의 정신을 장악했던 그 괴물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내 능력 밖의 일이야. 가주님과 상의해.”
루인은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소에느가 오히려 기꺼웠다.
정무직 관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보다도 자기 객관화다.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실수를 하지 않고 무리를 하지 않는다.
소에느, 자신의 고모는 더 이상 야망의 화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철저한 반성, 자기 객관화를 마쳤다. 자신의 모자란 점을 뼈저리게 인식한 것이다.
“많이 달라졌군.”
“네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니젠 삼촌은 어떻게 지내지?”
“사령관 직책을 이어 가고 있어.”
소에느의 말에 루인이 소리 없이 웃었다.
역시 아버지는 자신의 조언을 충실히 따라 주고 있었다.
하이베른가의 기사단이 다리오네가와 세헬가 사이, 즉 파네옴 광산 근처에 진지를 구축한 지도 이제 일 년이 흘렀다.
니젠은 파네옴 광산 진지의 주둔 사령관(Stationed Commander)으로서, 광산 일대의 치안을 유지하고 불안 요소를 감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베른가의 정예 기사단이 파네옴 광산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으니, 더 이상 세헬가는 베른가의 눈을 피해 렌시아가와 접촉할 수가 없었다.
길드의 상인들도 엄격한 기사들이 치안 유지를 위해 광산 일대를 활보하고 있으니 딴마음을 먹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렇듯, 사자의 가문이 철저하게 힘을 과시하며 장악력을 드리우자 왕국의 북부는 완전히 다른 영지로 변모해 버렸다.
“영지민들의 삶이 한결 나아졌겠군.”
루인의 말대로 그런 강력한 철권통치가 반가운 것은 오히려 영지민, 즉 평범한 백성들 쪽이었다.
하이베른가의 강력한 철권통치가 귀족과 길드 상인들의 횡포를 막아 주는 효과를 발생시킨 것이었다.
“설마…… 그것도 네 조언이었어?”
여전히 말없이 웃고 있는 루인을 향해 소에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넌 정말 괴물이야.”
루인이 무서운 건 단순히 가문과 영지를 안정시키는 방법론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모든 과정 속에는 혈족과 가신들의 정신과 신념을 장악하는 묘수가 녹아 있었다.
가문의 배덕자들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능력에 따라 더 높은 자리의 직책을 하사한다.
인정하는 것이다.
당신이 그만큼 이 하이베른가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런 가율의 번복을 대속(代贖)의 의식 하나로 무마시켜 버린 것이 바로 저 대공자였다.
이제 그들이 또다시 부정을 저지르고 배덕자로 산다는 것은 저 대공자의 명예를 바닥으로 내던지는 행위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리고 대공자, 그 자신은 기수 쟁탈전으로 스스로의 명예를 최고로 드높였다.
하이베른가의 기사로서 꿈꿔 온 영광, 그 천년 사자의 기백.
그런 영광을 무너뜨리기가 싫어서라도 하이베른가의 기사들은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소에느,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루인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각종 업무 서류에 질린다는 표정을 했다.
“내 입장에서는 고모도 괴물이야. 난 못 해. 다시는.”
대마도사로 살 수는 있어도 또다시 인류 연합을 이끌기는 싫었다.
해 봐서 안다.
저렇게 서류와 씨름하는 일이 마법을 익히는 것보다 더욱 힘든 일이라는 것을.
피식 웃는 소에느.
“그래, 용건이 뭐야.”
“내가 사고를 좀 쳐 놔서.”
“기수 쟁탈전? 아니면 어브렐가?”
루인이 말없이 빈 서류를 앞으로 끌어당기고는 펜을 들었다.
이내 지도를 그리는 루인.
조금은 엉성했으나 그것이 르마델 왕국의 영토라는 것을 소에느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루인이 지도 위에 몇 개의 점을 표시했다.
“우리가 왕국 중부의 허리를 끊으면 반드시 렌시아가는―”
소에느가 또다시 웃으며 루인의 말을 잘랐다.
“역시 내 예상과 똑같네. 렌시아 놈들은 언제나 직접적인 충돌보다는 권속을 조정하는 것을 더 선호하거든.”
“호오.”
“처음은 초원의 로마노스가(家)를 이용할 거야. 전마(戰馬)의 공급을 끊어 버리는 게 가장 효과적이거든.”
말(馬)은 기사보다 더 많이 죽는다.
말을 죽여서 기사의 기동성부터 없애는 것. 그것이 전통적인 대기사전 전략의 핵심이었다.
그러므로 오히려 왕국의 기사단들보다 더욱 잦은 전장을 경험하는 용병대들에게 전마의 공급을 끊어 버린다는 것.
그것의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그래. 중부의 용병대는 어브렐가를 버리고 로마스가와 다시 협력할 가능성이 높다. 마법 아티펙트보다 말이 더욱 소중하니까.”
“그 로마스가는 렌시아가의 오랜 권속이자 강력한 동맹이고.”
“해법은?”
소에느가 도도하게 웃는다.
“질 좋은 초목지를 매입할 예정이야. 최대한 북부와 가까운 곳. 최단 시간 내에 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 곳으로. 그리고 이미 집사가 좋은 혈통의 말들을 대량으로 사들이기 시작했어.”
“직접 목장을 운영할 생각인 거야?”
“당연하지. 어차피 가문에도 필요한 일이었고.”
“말을 키우는 건 보통 일이 아닐 텐데. 전문적인 인력이―”
“로마노스가의 가주가 그렇게 평판이 좋은 인물은 아니더라고. 로마노스가 출신의 마필관리사들 몇몇을 포섭할 생각이야. 단, 봉신가를 공표하기 전에.”
루인이 웃으며 펜대를 놓았다.
소에느, 자신의 고모는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렌시아가가 사상 최강의 전략가를 만났군.”
소에느가 일어나 루인을 배웅했다.
“나도 베른(Baron)이야. 대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