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영혼을 짓눌러 오는 순수하고도 거대한 증오.
촘촘한 그물 같은 악의가 소름 돋게 너울거린다.
“눈 감아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눈 감아!>
꾸르르르릉!
거대한 융합 마력으로 증폭된 루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사자성을 집어삼킨다.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대마도사의 위압감.
그의 이글거리는 두 눈이 검성, 아니 악제(惡帝)를 직시했다.
“감히……!”
검성의 악의(惡意)는 아직 미완성이다.
한데도 큰 위험 부담을 안고 검성의 의식을 집어삼켰다.
그것은 단 하나의 의미.
여기 있는 세 명의 인간들 중 한 명에게 청염(靑炎)의 저주를 덧씌우려는 것이다.
그 대상은 아마도 높은 확률로 자신.
그런 루인을 바라보는 악제의 미소가 더욱 묘한 빛을 머금었다.
“놀랍군.”
자신이 재물의 영혼과 의식을 잠식하여 의지를 드러내자마자 모두에게 눈을 감으라고 지시했다는 것.
그 의미는 명확하다.
“내 본질을 아는 인간이 존재하다니.”
인간의 눈을 통해서 내면의 욕망을 본다.
그런 욕망들을 집어삼켜 악의 씨앗을 발아(發芽)하는, 분명 자신의 방식을 아는 인간이었다.
“…….”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인간들은 세상 이면에 존재하는 각국의 수호자 집단 정도가 유일하다.
“넌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따위가 아니군.”
세상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강렬한 증오로 가득한 두 눈.
그 치열한 악의가 자신의 강대한 의식마저 침범해 올 정도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저 눈빛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질식하여 쓰러졌을 것이다.
“한데 넌 왜 눈을 감지 않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가 초인을 꺾을 정도로 강력한 마법을 익혔다는 사실은 이제 악제에게 안중에도 없었다.
모두에게 경고를 하고 정작 그 자신은 눈을 감지 않았다는 것.
그 사실이 악제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고 있었다.
루인의 입매가 악마처럼 비틀린다.
“망설이지 말고 날 먹어라.”
“호오……?”
먹는다는 표현.
청염의 존재를 아는 것을 넘어 영혼 강탈까지 알고 있다고?
평소대로라면 자신의 비밀을 이 정도까지 알고 있으니 단숨에 죽여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청염에 관한 것은 아직 인간들 중 누구도 간파해 내지 못했다.
한데,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는 르마델 왕국의 대공 가문, 그것도 새파란 대공자 따위가 청염의 비밀을 모조리 알고 있다?
이건 단순히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대공자의 뒤에 숨어 있는 미지의 인간들, 그 은막의 실체를 모조리 솎아 내야 했다.
악제의 두 눈에 얽힌 자줏빛 귀화가 더욱 귀기로 타오른다.
“이상한 놈이로군.”
어쨌든 모든 걸 알고도 자신을 직시하고 있으니 먹지 않을 이유는 없다.
어차피 청염을 덧씌워 영혼을 장악한다면 놈의 생각을 모두 읽어 낼 수 있으니까.
스스스스-
악제의 영혼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자줏빛 귀화가 순식간에 루인을 집어삼킨다.
-호오? 이런 방식이었나?
“……!”
악제의 동요가 더욱 커진다.
놈의 영혼을 침범하는 순간, 어떤 강대한 영혼이 마치 수문장처럼 놈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놈의 영혼.
부우우우웅!
놈의 내면세계, 그 영혼의 깊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너르고 깊었다.
그 아득한 광활함이란 인간의 격(格)으로는 결코 이룩할 수 없는 영혼의 경지.
“역시 ‘존재’들의 끄나풀이었나.”
드래곤, 어쩌면 신들의 대리자.
이제 상대의 정체를 알았으니 악제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악제가 권능을 일으키려던 그 순간.
“약하군.”
증오로 비튼 루인의 입매가 더욱 진한 웃음을 머금자.
악제의 고개가 기이하게 꺾인다.
“약하다?”
자신의 영격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루인의 입장에서는 영혼잠식까지 각오했던 큰 도박이었다.
아무리 만 년 이상의 격(格)을 이룩했다 해도 엄연히 자신의 영혼은 인간의 그릇.
한데도 놈은 그런 인간의 영혼을 집어삼키지 못했다.
이 시기의 악제는 약하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씨익.
“그래. 생각보다 너무 약해.”
전성기의 악제는 주신(主神) 알테이아마저 두려워하던 존재.
어떤 신도 통제할 수 없었던 인류의 거악(巨惡), 지금의 놈은 그런 절망적인 악제가 아니었다.
“재물을 장악하는 사념의 구속력도, 이 바보 같은 방식도 죄다 어설프군.”
악제의 전략은 인간의 역사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교활했다.
한데 이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다니.
<사자성의 기사들은 들어라! 지금 즉시 사자성 주변 반경, 3Km 이내를 모조리 수색한다! 시체처럼 누워 있는 인간을 찾아 놈의 신변을 확보한다! 놈은 하이베른가의 적이다!>
하이베른가에서 대공자의 목소리를 모르는 기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곧이어 거대한 화답의 목소리가 사자성의 곳곳에서 들려왔다.
-충!
-충!
“……!”
악제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당황의 빛이 서린다.
루인이 소름 돋게 웃었다.
“악의가 완성되지 않는 재물을 통제하려면 네놈은 반드시 재물의 주변 3Km 이내로 접근을 해야 하지.”
이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많은 동료와 부하들이 희생하였다. 이제야 그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전성기 시절의 악제 놈도 그러하였는데 지금의 놈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어쩌면 반경 수백 미터 안에 놈이 있을 수도 있었다.
3km라는 기준은 최대한의 안전장치.
“……넌 누구지?”
악의가 꿈틀거린다.
주변을 잠식하기 시작한 증오의 기운, 그의 악의가 더욱 세차게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파앙!
빛살처럼 쏘아진 루인의 신형.
그대로 악제의 머리를 움켜쥔 루인이 곧장 융합 마력을 끌어올리며 강력한 정신 마법을 겹겹이 드리웠다.
“도망칠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영혼결계진 아트마호라(ѠѹѦѩ).
정신구속진 아트메아타(Ѡѹҗҕғҩҩ).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한 마신의 탈혼금제술 아트아자바(Ѡѹҁҁѳѓљ)까지.
루인은 지금의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마신의 강대한 정신 마법을 극한으로 구동한 것이다.
순식간에 모든 융합 마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지만 루인은 결코 망설이지 않았다.
이걸 놓친다면 바보다.
악제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사상 최고의 기회!
악제는 자신의 영혼을 압박하고 있는 마신의 정신 마법을 담담히 관찰하고 있었다.
“정말 이상한 인간이군. 이번엔 마계의 고위 정신 마법이라…… ‘존재’의 끄나풀도 아니란 말인가.”
인간계의 ‘존재’들과 마계의 마족들은 서로 물과 기름 같은 관계.
사상 처음으로 해석할 수 없는 인간을 만난 악제는 오히려 흥미로 들끓는 듯한 표정이었다.
제법 큰 수확이었다.
흔한 인간 영웅, 그저 부하로 부릴 재물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런 깜짝 놀랄 만한 역량이라니.
“적으로 인정하지.”
순간.
기질이 바뀐다.
츠츠츠츠츠츠-
마신의 수만 년 역량으로 쌓아 올린 강대한 정신 마법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해체되기 시작한다.
영혼결계진이 술식으로, 술식이 또 쪼개어져 마력회로로, 마력회로는 다시 융합 마력과 염동력으로, 마침내 마력까지 모조리 미세 입자 단위로 분해된다.
그것은 술식을 흩어 내는 디스펠 따위도, 결계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차폐 마법도 아니었다.
마치 신의 섭리 같았다.
어떤 지혜와 이치도 녹아 있지 않은, 그저 한없이 간결하고도 오롯한 어떤 의지.
상상도 할 수 없는 힘의 구현법, 그의 초월적인 권능 앞에서 루인은 결국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악제는 그저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반응, 그리고 실력을 떠보기 위해서.
척척척-
갑주를 출렁이며 흩어지는 기사들의 발걸음 소리가 성의 사방에서 들려오자.
<출…… 출정을 멈춰라!>
그렇게 루인이 절대 언령으로 모든 기사들의 움직임을 멈춰 세우자.
악제는 더욱 호기심이 치민 얼굴로 루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러낸 역량만큼 정확히 대응한다라. 정말 기이해. 마치 날 상대해 본 인간처럼 말이지.”
인간 기사 따위는 그 수가 아무리 많든 벌레처럼 죽일 수가 있었다.
그것은 초인이라 불리는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
그런 자신의 힘은 인간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데 이 대공자는 그런 자신의 역량을 정확히 읽고 있는 것이다.
이런 건 단순히 마계의 지식을 쌓은 흑마법사라고 해서 가능한 역량이 아니었다.
“혹시 너는 미래를 보나?”
과거의 자신을 겪은 인간은 모두 죽고 사라졌다.
그렇다면 단 하나의 결론.
놈은 높은 확률로 미래의 자신을 아는 인간이었다.
“꺼져라!”
남은 융합 마력을 모조리 쥐어짜는 루인.
영혼 잠식이 계속 이어진다면 월켄의 정신계가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다.
또한 놈의 교활한 방식에 굳이 어울려 줄 이유는 없었다.
루인의 강대한 염동력이 영혼차폐술 아트바흐토라(Ѡѹҗѱҁґӂӄ)로 구현되자.
스스스스스-
월켄의 순수한 영혼력이 점차 강화되며 악제의 사념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점점 밀려가는 자신의 사념을 무심히 관찰하던 악제는.
“정말 대단한 인간이군.”
이 정도로 치밀하고 완성도 높은 정신 마법을 구현해 낼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적어도 마왕, 아니 이 정도라면 마신(魔神)의 역량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마신의 술식을 구사하는 흑마법사라.”
악제가 마지막으로 웃었다.
“기억에 담을 가치가 있군. 내 종언(終焉)의 파멸 속에서 너를 기억하겠다. 하이베른가의 대공자여.”
힘없이 허물어지는 검성의 육체.
그제야 루인이 월켄의 머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비틀거린다.
“루인!”
황급히 다가가는 리리아.
하지만 루인은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소에느가 카젠을 쳐다봤다.
“도대체 대공자는…… 오라버니……?”
카젠이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알칸 제국에서 온 초인 검산(劒山)의 영혼을 잠식한 미지의 존재.
그가 루인을 바라보며 했던 모든 반응들.
<내 본질을 아는 인간이 존재하다니.>
<넌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따위가 아니군.>
<……넌 누구지?>
그리고 마지막.
<혹시 너는 미래를 보나?>
아니. 루인은 미래를 보는 존재가 아니다.
그가 왜 그리도 슬픈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갈랐는지.
왜 그토록 동생들을 아련하게 바라보았는지.
왜 고모 소에느를 악착같이 증오했는지.
변절한 기사들의 명단을 왜 모두 알고 있었는지.
왜 그가 기사들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지녔는지.
왜 검이 아니라 마법이었는지.
설명될 수 없었던 그런 모든 불가사의들이.
단 하나의 가정으로 완성되었다.
이제는 카젠도 알고 있었다.
“……그는 돌아온 것이구나.”
“그게 무슨 소리죠?”
아들이 겪었을 처절한 삶이 무엇인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카젠은 그렇게 끝없는 슬픔이 밀려오면서도 더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미래의 재앙을 모두 알고 있다.
하이베른가의 모든 실패를 알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무기로 작동할지 감히 카젠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완성할 하이베른가.
카젠이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루인을 직시했다.
“루인…….”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내 아들.
아비가 돼서 이제야 알아보다니 참으로 미안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