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하이베른가의 호수 별장.
과거, 대공자 루인이 유폐지로 쓰던 호수 별장은 어느덧 깨끗하게 단장하여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상태.
“…….”
그런 호수 앞 작은 공터에서 검산(劒山) 월켄이 두 눈을 감은 채 진중하게 명상하고 있었다.
루인과의 대결을 복기하는 그 과정이 보름 넘게 이어지고 있었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월켄은 혼란만 가중되고 있었다.
대공자 루인의 정신 마법은 아예 배제했다.
애초에 그런 건 상대할 수도 없을 테니까.
가장 먼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재생성되는 루인의 배리어계, 쉴드 마법을 뚫을 마땅한 방법부터가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현재 자신이 가장 자신 있고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검술은 캘러미티 라인(Calamity Line)이다.
빠르게 구사하면 광범위한 공격이 손쉽게 가능했고, 무엇보다 투기가 소모되는 양이 적기 때문에 몸의 위험 부담이 적었다.
지금까지는 그런 캘러미티 라인만으로도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초인의 투기는 가히 무한대여서, 캘러미티 라인만 뿌려 대는 것만으로도 모든 적을 압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캘러미티 라인도 단단한 한 점(Spot)을 뚫지 못하는 이상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단단한 한 점, 루인의 배리어를 뚫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강력한 점의 검술, 캘러미티 블레이즈(Calamity Blaze)밖에 없었다.
미세한 부위에 투기를 누적시켜 힘의 착화점을 만들고.
이후 일시적으로 투기를 폭발하여 얻을 수 있는 힘, 스피릿 스톰을 통해 착화점을 폭발시키면.
스피릿 오러의 수십 배나 달하는 파괴력을 자랑하는, 궁극의 캘러미티 블레이즈를 완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착화점을 만드는 일이었다.
상대의 몸, 그것도 특정한 부위에 정밀한 투기의 인(刃)을 그 험악한 난전 상황에서 연속으로 누적시킨다는 것부터가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투기로 가늠하는 초인의 영역이 아니라 한 기사의 순수한 경험과 실력, 즉 검술의 숙련도가 초월적인 영역을 돌파해야 가능한 일.
그래서 월켄이 처음에 스승님께 캘러미티 블레이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농담처럼 웃어넘겼었다.
아니, 어떻게 그 난전 속에서 미세한 검의 인을 수십 번 이상 ‘같은 부위’에 새겨 투기의 착화점을 만든단 말인가?
겨우겨우 어떻게든 착화점을 만든다고 해도, 스피릿 스톰을 완성하려면 정신을 잃을 정도로 투기를 끌어올려야 한다.
그런 혼미한 와중에서 착화점에 정확히 스피릿 스톰을 적중시킨다고?
월켄은 지금도 그건 그저 이론상의 경지로만 느껴졌다.
그렇게 그가 복잡하게 명상을 이어 나가고 있을 때 사자왕 카젠이 호수 별장에 나타났다.
인기척을 느낀 월켄이 명상에서 깨어났다.
“안녕하십니까.”
“검밖에 모르는 무인이라더니. 역시 대공자의 말대로군.”
흐뭇하게 웃고 있는 카젠.
월켄이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가주님의 아드님 덕분에 평생을 노력해도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만난 느낌입니다.”
“녀석의 마법 말인가?”
“예.”
여전히 묘하게 웃고 카젠을 바라보며 월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법을 알고 계십니까?”
“일단 녀석이 일반적인 마법사라는 생각부터 버리게.”
루인은 마법사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자 근본적인 한계인 ‘캐스팅 딜레이’를 무시한다.
검술과 똑같은 속도로 구현되는 녀석의 마법은, 마법이라기보단 권능에 가까웠다.
“전 그 ‘일반적인 마법사’라는 것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 더 말이 쉽겠군.”
카젠이 공터에 비치되어 있는 거치대에서 목검 하나를 빼어 들었다.
슉! 슈슈슉!
화려한 연환 동작.
적의 빈틈을 파고들어 순식간에 급소를 공격하는, 검술의 가장 기본적인 스네이킹(Snaking)이었다.
한데 월켄이 깜짝 놀라고 있었다.
“그건……!”
“맞네. 자네의 검술이지.”
월켄은 놀랍기 짝이 없었다.
자신이 기수 쟁탈전에서 유파의 기본 검술을 펼친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대공자 루인의 창에 닿는 순간 투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상황이었기 때문.
그 이후로는 오직 투기를 활용한 스피릿 오러 세례, 캘러미티 라인만을 펼쳤었다.
한데 사자왕 카젠은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의 유파 검술에 담긴 운용법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다.
“이 가문은 중검류(重劒流)의 유파가 아니었습니까?”
몇몇 기사들을 제외하면 이 사자의 가문을 활보하는 기사들은 죄다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를 소지하고 있었다.
훈련장에서 지켜본 기사들의 검술 또한 강력한 힘을 앞세운 중검술.
한데 그런 중검술을 대표하는 가주가 잔인하고 화려한 패왕 바스더의 검술을 한 번 본 것만으로 그 운용법을 훑어 내다니!
“유파에 갇히지 말게. 검술이 아무리 다양해도 결국은 그저 검이네. 찌르고―”
슉.
“베며.”
후우웅.
“막지.”
카젠이 검술의 기본 세 동작을 펼쳐 보이더니 다시 슬며시 웃고 있었다.
“동작이 가볍든 무겁든, 이런 검의 속성 자체가 변하는 일은 없네.”
“아―!”
카젠이 목검을 다시 거치대에 걸쳐 놓는다.
“어땠나? 내가 흉내 냈던 자네의 검술이.”
“완벽했습니다!”
“바로 그게 문제네.”
“예?”
카젠이 월켄을 직시한다.
“내가 완벽하게 흉내를 낼 수 있다는 자체가 문제란 뜻이지.”
“그 말씀은…….”
“자네에겐 검사의 고유한 무언가가 없네. 평생을 갈고닦아 완성한 자신만의 무언가가.”
“…….”
“그저 쫓기듯이 수련한 검. 검술을 그저 자신에게 욱여넣기만 급급했던 것은 아닌지 한번 돌아보게.”
“…….”
“어쩌면 지금까지 그대가 익힌 검은 수련이 아니라 그저 무리한 학습이었을 수도 있네. 혹시 자네의 스승에게 시간이 별로 없었는가?”
카젠의 그 말에 월켄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의 말대로 말라 가며 죽어 가는 스승에게는 그 빌어먹을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랬군.”
어느덧 카젠은 시푸른 창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의기소침하지 말게. 그래도 자네의 유파는 대단하네. 검술의 기초도 제대로 닦지 않은 상태에서 초인의 경지를 가능케 하는 검술이라니. 자네의 스승은 당신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것이네.”
“스승님께서는 바스더의 후예셨습니다…….”
깜짝 놀라는 카젠.
바스더는 최초로 베나스 대륙을 일통한 절대적인 패왕이었다.
그의 전설적인 검술은 드래곤마저 상대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 강력한 검술이 유파로 남아 아직도 전승되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 엄청난 비밀을 내게 말해도 되는 건가?”
현 대륙을 지배하는 알칸 제국은 패왕 바스더의 역사를 부정하며 세운 국가.
바스더의 검술을 이은 자가 나타난다면 반드시 황법으로 죽이려 들 것이었다.
“가주님이 제 비밀을 떠벌이고 다닐 사람이라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그렇게 말해 준다니 고맙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월켄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 말씀은 제가 지금부터라도 유파 검술의 기본기부터 제대로 수련을 밟아 나간다면 아드님을 상대할 수 있다는 뜻이십니까?”
“나도 모르네.”
알듯 모를 듯한 카젠의 표정에 월켄이 미간을 구겼다.
“제겐 크나큰 숙제입니다.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나는 자네를 모르는 만큼,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내 큰아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없네.”
“예?”
“내 아들의 실력에 대해 정확히 아는 바가 없으니 자네의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없네. 다만 그것이 기사의 정도(正道)란 뜻이지.”
“기사의 정도…….”
“그렇다네. 언제나 답은 끊임없는 수련 속에 있으니까.”
그때였다.
콰아아아앙-
하늘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일었다.
한데 그런 폭발음의 음속보다 더 빠르게, 흐릿한 두 개의 그림자가 정원에 나타났다.
전력으로 투기를 끌어올리며 대비하고 있던 카젠은 금방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대공자……?”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괴생명체의 꼬리.
루인이 그런 혼돈마의 꼬리를 헬라게아에 밀어 넣으며 아버지를 무심히 바라봤다.
“새로운 봉신가를 맞이할 준비를 해 주십시오.”
“……뭐?”
“중부의 어브렐가를 복속하였습니다. 지금부터 어브렐가는 하이베른가의 봉신가입니다.”
중부의 대귀족가, 그 유명한 중립의 가문이 갑자기 하이베른가의 봉신가라니?
카젠이 리리아를 쳐다본다.
“그 소녀는……?”
“어브렐가의 여식, 리리아 드리미트 어브렐이라고 합니다.”
“…….”
갑자기 벌어진 황당한 상황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일단은 어브렐가의 영애라고 하니 카젠은 그녀에게 일의 전후를 듣고 싶었다.
“대공자의 말이 모두 사실인가?”
“저는 가문의 정치적인 결정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무슨 차갑게 뚝뚝 떨어지는 말투가 사내아이 같았다.
표정 또한 귀족가의 영애라고 하기엔 무심하기 짝이 없어서 카젠은 마치 얼음 동상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어? 대공자?”
호수 정원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던 소에느가 루인을 발견하곤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루인이 가볍게 고갯짓을 하자 그녀의 시선이 곧장 가주 카젠을 향했다.
“가주님. 상인 연합에서 보웬 남작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어요.”
“……상인 연합이?”
“표면상으로는 상인 연합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이에요. 올해의 첫 연합회의의 발제자가 보웬 남작으로 내정되어 있었다더군요. 하지만 분명 그를 본가에서 빼내려는 누군가의 속셈이겠죠.”
루인이 다시 카젠에게 물었다.
“상인 연합 말고도 그동안 보웬 남작의 석방을 요구한 곳이 더 있습니까? 다리오네가는 제외하고요.”
“상인 연합의 길드장 데하르크의 꾸준한 요구가 있었다.”
“부채 상환이 그 명분이었겠군요.”
“어떻게……?”
씨익 웃는 루인.
“너무 뻔한 일이 아닙니까? 그리고 또요.”
“그의 아들이다. 상속자의 자격으로 보웬 공의 석방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루인이 생각에 잠겼다.
힘을 잃은 다리오네가의 상속자 따윈 장애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상인 연합.
북부 상권의 팔 할을 장악하고 있는 상인 연합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
한데.
어떻게 일이 또 이렇게 흘러가는 걸까.
마침 그런 상인 연합을 우군으로 얻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패가 자신의 손에 있었다.
“어브렐가가 하이베른가의 봉신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빨리 공표해야겠군요.”
“뭐……?”
경악하고 마는 소에느.
“그편이 고모가 움직이기 편할 텐데?”
당연하다.
유사 이래 상인과 용병은 철저한 공생 관계였다.
상인들의 물자 운송을 호위하는 건 언제나 용병들의 몫이었으니까.
상인들도 용병들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고 그것은 용병들도 마찬가지.
한데, 중부의 용병대를 장악하고 있는 어브렐가를 봉신가로 귀속시켰다?
그건 왕국의 중부 상권을 장악했다는 말과 같다.
중부의 상인 길드들에게 용병대를 내어 주지 않는다면, 더 이상 그들은 왕국의 어디와도 거래를 할 수 없을 테니까.
그저 도적 떼들의 손쉬운 먹잇감으로 전락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남부의 넉넉하고 풍성한 물자가 북부의 상권으로 유입되는 길목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중부의 어브렐가.
그렇게 막대한 중개 교역의 이권을 통제하고 있는 어브렐가를 베른가의 봉신가로 귀속시켰다는 것은 소에느에게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왕국의 허리를 장악하고 있는 가문이 지금부터 우리 봉신가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루인이 소에느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으며 뒤돌아섰다.
“고모도 공표 준비나 빨리 서둘러 줘. 그리고…….”
그렇게 루인이 바쁘게 자리를 벗어나려 했을 때.
갑자기 루인의 표정이 급격하게 증오로 어두워진다.
익숙하고 불길한 기운.
그 음침하고도 악독한 사념의 향기에 루인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너…….”
루인이 다시 뒤돌아선 순간.
보랏빛 귀화로 물든 검성, 아니 악제의 두 눈이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