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아스타론의 유물들을 가치로 환산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레펜하이머 가주에게 유물의 가치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대체 베른가는…….’
지금 대공자는 위대한 성자 아스타론의 역사가 본인의 가문, 베른가에 이어지고 있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
성자 아스타론은 태초의 마법사, 테아마라스보다 더한 위상의, 인간들에겐 그야말로 절대적인 영웅이었다.
만약 성자 아스타론을 신처럼 떠받들고 있는 알칸 제국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제국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유물을 회수하려 들 것이었다.
르마델 왕국이 아스타론의 유물을 보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알칸 제국과의 전쟁 억지력마저 담보할 수 있을 정도.
저 위대한 유물로 알칸 제국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얻어 낼 수 있을지, 레펜하이머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막대한 정치적 우위를 가능케 하는 물건인 것이다.
“……아스타론의 유물을 정말 우리 가문에 줄 수 있단 말인가?”
“감당할 수 있다면.”
미소 짓는 루인, 그의 그 한마디에 레펜하이머 가주는 온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보물은 때론 가장 파멸적인 재앙이다.
지킬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어쩌면 멸망의 지름길이 될 수도 있는 일.
유물을 지켜 낼 수만 있다면 르마델 왕실은 물론 알칸 제국마저 움직일 수 있는 권력을 얻게 될 테지만 레펜하이머는 감히 자신할 수 없었다.
가문의 멸족을 담보로 걸어야 하는 도박.
결국 레펜하이머는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본 가문이 감당하기 힘든 물건이군.”
“그렇게 판단했다면.”
루인이 다시 공간을 찢고 나타난 헬라게아 안에 아스타론의 유물을 깊숙이 넣었다.
이어 무심한 눈으로 다시 레펜하이머를 응시하는 루인.
마치 자신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한 루인의 자연스러운 태도에 레펜하이머 가주의 눈빛은 더욱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가문에는 알칸 제국마저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있으니 함부로 조건을 저울질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였다.
어브렐가의 재앙, 멸화를 없애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라는 뜻.
왕국을 지배하는 실질적인 힘 하이렌시아가도 르마델의 왕실도 베나스 대륙의 패자 알칸 제국을 통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하이베른가는 알칸 제국을 우군으로 부릴 수도 있다.’
그만큼 성자 아스타론의 유물은 거대하고 강력한 힘.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레펜하이머 가주의 판단은 이미 끝난 것이었다.
“그대의 모든 요구를 조건 없이 수용하겠다.”
그 순간 루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봉신가 서약식에 관한 일체의 준비는 본 하이베른가에서 하겠다. 어브렐가는 추후 예상되는 반발과 정치적인 공세에 대비토록 하라. 특히 아조스가(家)와 탈레오만가(家)와는 미리 관계를 끊는 편이 좋을 것이다.”
“…….”
레펜하이머 가주의 가슴이 철렁거린다.
아조스가와 탈레오만가와의 은밀한 관계는 왕실은 물론 귀족 세계에서도 알려지지 않는 일.
한데도 저 대공자는 마치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투였다.
‘대체 그 사실을 어떻게……?’
극도의 혼란스러움.
가주 대 가주끼리의 대인 교섭, 거기에 음성 추적 마법을 대비하기 위해 오직 필담(筆談)으로만 협상 조건을 나누었다.
이제 레펜하이머는 저 무심한 대공자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정보를 쥐고 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오연히 서 있는 루인.
이미 그는 봉신가를 거느린 대공가의 대공자로서 사자처럼 사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가, 가주!”
가주좌에서 내려온 레펜하이머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브렐가(家). 봉신의 명예를 기꺼이 받들겠소.”
루인이 웃었다.
“그대들이 봉신가의 깃발로 쓸 문양은 잿불(灰火)이다. 최고의 화가에게 의뢰하여 곧 하사하겠다.”
“감사드리오.”
그렇게 루인이 타워를 떠나가자.
어브렐가의 원로 렐미온이 레펜하이머 가주를 응시했다.
“잿불이 무슨 의미인 것 같습니까, 가주님?”
“어브렐가가 멸화(滅禍)를 극복하더라도 결코 잊지 말라는 뜻이겠지. 그 끔찍한 저주를 끊어 준 존재가 다름 아닌 하이베른가라는 것을.”
레펜하이머의 눈빛이 침잠하게 가라앉는다.
“이 르마델 왕국에 실로 무서운 인물이 출현했구나.”
* * *
‘칼과 영웅의 노래’ 그룹의 유적, ‘검의 정원’에서 아카데미의 주요 기사 생도들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이렌시아가의 대공자 크라울시스의 보결 입학 소식.
때문에 아카데미의 기사 생도들은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특히나 브훌렌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너, 괜찮겠냐?”
“…….”
브훌렌은 하이렌시아가의 방계 검수이자 이명 생도 랭킹 1위를 단 한 번도 뺏긴 적이 없는 아카데미의 지배자.
그러나 대공자 크라울시스의 등장으로 이제 그의 1인자 자리는 물 건너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대공자 크라울시스는 이명 생도 랭킹 7위의 페드 녀석과 상당히 친했다.
만약 크라울시스가 그런 페드 녀석을 밀기 시작한다면 자신의 수석 졸업이 물 건너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자칫 수석 졸업의 엄청난 명예와 혜택들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미치겠군.”
그뿐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하이렌시아가의 방계로서 크라울시스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자신.
그러므로 아카데미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지금까지의 모든 권력이 위태로워졌다.
특히 ‘포효하는 황혼’의 거의 대부분의 기사 생도들이 하이베른가 대공자의 영향력 아래 귀속되어 버린 상황.
‘피의 결속자’ 그룹 역시 점점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를 향한 호감도가 증가하고 있었다.
자신이 애써 막고 있지만 ‘칼과 영웅의 노래’ 그룹 내부 또한 동요가 심각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크라울시스마저 등장한다면…….
브훌렌은 이래저래 머리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대공가의 대공자들 때문에 갑자기 아카데미가 두 개로 갈라지게 생겼군.”
하이렌시아가의 위상이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기수 쟁탈전을 승리한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루인의 기세도 만만치가 않았다.
“역시 문제는 우리 이명 랭커들이 쥐고 있었던 왕립 아카데미가 순식간에 대공자들의 놀이터로 변해 버렸다는 것이겠지. 우리의 위상은 이제 벼룩처럼 변해 버릴 거다.”
이명 생도 랭킹 3위, 일리온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표정이 굳어졌다.
“하이베른가의 대공자가 참여를 선언한 무투대회부터 고민이다. 우리가 과연 참여를 해야 하나?”
이미 포효하는 황혼의 두 랭커들을 꺾었고, 게다가 기수 쟁탈전에서 무려 초인을 이긴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다.
토너먼트에서 그와 만나는 족족 이명 랭커 순위가 떨어질 것은 자명한 일.
마법도 마법이지만 대공자의 무투술 역시 상대하기가 매우 까다로워 보였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그의 정신 마법.
스피릿 오러를 무한하게 뿜어내던 초인을 정신 마법 하나만으로 제압해 버린 루인의 마도(魔道)란 더 이상 평가가 무의미한 지경이었다.
“마법 생도들이 그러더군. 마법의 세계에서 정신 마법은 이론상의 마법이라고.”
“그건 현자도 불가능해! 드래곤의 전유물이라고!”
브훌렌이 말했다.
“그럼 무투대회를 보이콧이라도 하자는 소리냐. 한두 명이 빠지는 거야 상관이 없겠지. 하지만 이명 랭커들이 모조리 참가를 포기한다면 분명 하이베른가의 대공자가 무서워서 포기했다는 말이 흘러나올 거다.”
“참가하면 되지.”
팔짱을 낀 채 아무렇지도 않게 툭 하고 말을 뱉은 생도는 그림자 혹한 타가옐이었다.
그는 마법학부에서 유일하게 기사 생도들과 가까운 마법 생도였다.
“참가를 하겠다고?”
또다시 무심하게 말을 내뱉는 타가옐.
“개인전 말고 단체전(Party)만.”
“호오……?”
타가옐의 말은 그럴듯했다.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는 분명 강하고 위험하지만 그와 함께 무투대회를 준비하고 있는 무등위 생도들의 실력은 아직 미진했다.
물론 그들은 무등위 마법 생도들 사이에서 제법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천재들이다.
그러나 4년 이상 아카데미에서 고된 수련을 이어 온 랭커들의 입장에서는 아직 그들은 애송이나 다름없었다.
딱 하나, 입탑 마법사 다프네가 걸린다.
경계할 생도는 그녀 하나뿐이었다.
다시 타가옐이 말했다.
“정신계 마법이 아무리 초고위 마법이라고 해도 인간이 지닌 염동력의 한계상 광범위하게 펼칠 수 있는 마법이 아니야. 반드시 국소로 제한되지.”
브훌렌이 물었다.
“한 명만 희생하면 된다는 소리냐?”
“그렇다. 염동력이 아무리 무한이라고 해도 정신 마법을 펼치는 그 순간만큼은 그도 무방비가 될 수밖에 없다.”
희열로 소리치는 일리온.
“그럼 대공자는 단체전에서만큼은 아예 정신 마법을 시도조차 안 하겠군!”
“그에게 마법사의 직관이 있다면 반드시.”
브훌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이명 생도들끼리 조합을 짜지.”
“오오!”
지금까지 개인전에만 주로 참여했던 이명 랭커들.
지금 그런 이명 랭커들이 무투대회의 단체전에, 그것도 자신들끼리의 파티 조합을 천명하고 있었다.
그것은 절대로 지지 않는 불패의 조합이었다.
“나와 일리온, 맹제르, 그리고 타가옐이 단체전에 참여한다. 타가옐, 마법 생도들 중에서 스카우트할 만한 녀석이 더 있나?”
“유리우스를 데려오지.”
생동하는 화염, 유리우스.
그는 타가옐과 더불어 마법학부의 최고를 다투는 마법 생도였다.
“좋아.”
브훌렌이 천명한 파티의 조합에, 이를 지켜보던 이명 랭커들이 넋 나간 표정을 하고 있었다.
기사 3명.
이명 랭킹 1위의 브훌렌, 3위의 일리온, 5위의 멩제르.
마법사 2명.
12위의 타가옐, 13위의 유리우스.
특히 타가옐과 유리우스는 개인전의 불리한 랭커전에서 당당히 최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마법 생도들이었다.
순수하게 역량으로만 따진다면 그들은 결코 브훌렌이나 일리온 못지않았다.
기사 생도들이 전방에서 시간을 벌어 주고 있는 상황에서만큼은 실로 무시무시한 마법을 선보일 수 있는 마법사들.
“와 씨! 저 조합을 어떻게 이기냐?”
“난 그냥 포기해야겠다.”
“맞아. 차라리 조금 부끄럽고 말지.”
그때.
저벅저벅.
커다란 자루를 등에 이고 검의 정원에 나타난 한 소년.
“크…… 크라울시스 대공자님!”
갑작스럽게 나타난 크라울시스의 등장에 그의 방계 검수 브훌렌이 절도 있게 무릎을 꿇는다.
다른 기사 생도들도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쿵-
자루를 바닥에 내려놓은 크라울시스가 기사 생도들을 천천히 훑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나.”
브훌렌이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무투대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지. 무투대회가 코앞이니까.”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던 크라울시스가 자신이 가져온 자루를 시선으로 가리킨다.
“브훌렌 네시우스 니스할. 자루를 살펴봐라.”
브훌렌이 조심스럽게 자루를 열자.
“어?”
화아악-
강렬한 마력의 잔향이 사방을 휘어 감는다.
자신의 마력이 순식간에 흩어지자 타가옐이 중얼거렸다.
“안티 매직…….”
강력한 마력 얽힘 방해 현상.
“모든 봉신가와 방계, 동맹 가문에서 구해 온 대마법 보구(寶具)다.”
이명 랭커들의 경악한 시선이 모두 대공자 크라울시스에게 향한다.
지금 이것들이 하이렌시아가와 동맹을 맺고 있는 대귀족가들의 모든 가보(家寶)라고?
“제법 대가를 치르고 가져온 물건들이지.”
이 무시무시한 아티펙트들을 대여, 혹은 매입하기 위해 크라울시스는 가문의 환상고(幻像庫)에 있는 재물의 5분의 1을 소비했다.
크라울시스가 더욱 사악하게 웃었다.
“너희들은 모두 나의 대전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