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29화 (129/187)

<129화>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건가?”

레펜하이머 가주의 질문에 루인은 자신을 타워까지 안내해 준 집사를 응시했다.

“귀족가의 집사들은 평생 주인을 보필한다. 그대의 눈빛, 한숨 소리, 그런 작은 몸짓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그날의 심기를 헤아리는 인물이라는 뜻이지.”

“……한데?”

“그런 어브렐가의 집사가 내게 보인 태도는 지나치게 극진했다. 몸의 치장 수준, 전체적인 예법, 특히 저자는 내 눈을 단 한 번도 바라보지 않았다. 주인을 대하는 듯한 그의 완벽한 시선 처리에 나는 확신할 수 있었지.”

루인이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이 바보 같은 도발이 그대들의 진심이 아니라는 걸.”

마주 웃는 레펜하이머.

“고작 집사의 태도만으로 이 레펜하이머의 마음을 헤아렸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지. 또 다른 확신의 근거는 좌석 배치와 만찬의 상태다.”

“좌석 배치? 만찬?”

루인이 테이블을 훑었다.

“아무리 가면을 쓰려고 해도 인간의 심리라는 건 그리 쉽게 감출 수 있는 게 아니지. 지금 그대와 나는 정확히 맞은편이다. 이야기하고 싶다는 뜻이지. 내가 어떤 인물인지 그대는 헤아리고 싶은 것이다.”

“…….”

“게다가 만찬의 구성도 북부의 진귀한 특산물로 가득하다. 나를 정말로 불청객으로 취급했다면 이런 값비싼 식재료는 말이 안 되지. 어브렐가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평소에 먹는 일반식이 이 정도는 아닐 테고.”

루인이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으며 다시 레펜하이머를 바라본다.

“이제 말장난은 그만하고 가면을 벗어라. 어브렐가.”

레펜하이머는 전율이 치밀었다. 하마터면 놀란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을 정도로.

집사의 태도와 테이블을 슬쩍 살핀 것만으로도 상대의 심리를 모두 꿰뚫어 보는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그 치밀함에 정말이지 소름이 돋았다.

이건 단순한 마법의 천재 따위가 아니다.

놀라운 지혜과 심기, 더불어 끝없이 당당한 대공가의 기백.

왕국의 기수 사자왕을 마주한 것 이상의 압박감이 밀려온다.

레펜하이머는 겨우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일단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내 딸과는 어떤 사이인가?”

리리아를 통해 들은 이야기는 진실로 충격적이었다.

멸화(滅禍)의 치료를 가능케 하는 포션의 제조법.

이 대공자는 그걸 알고 있었다.

레펜하이머 가주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와 협상하려는 건 동맹 따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대가 제조한 포션으로 내 딸 리리아가 목숨을 구했다고 들었네. 또한 레예나에게도 그 기회를 주었고.”

루인은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리리아가 언니라 부르는 이는 어브렐가의 정실(正室)의 자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마법학부의 이명 생도, 설혼(雪魂) 레예스와 비슷한 발음의 이름이었기 때문.

레예스는 어브렐가의 권위를 이을 후계자.

루인은 리리아가 가문에서 겪어야만 했던 고초를 대략적이나마 예상할 수 있었다.

무심하게 대답하는 루인.

“친구 사이다.”

“친구……?”

루인의 대답에 레펜하이머 가주의 표정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허면 그 친구의 가문에 그대의 포션 제조법을 알려 줄 수 있겠는가?”

그제야 루인은 자신이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어브렐가의 혈족들, 그리고 레펜하이머 가주에게는 지금 헤이로도스의 술식이 문제가 아니었다.

가문의 저주, 멸화를 해결할 수 있는 포션의 제조법.

어린 혈족들을 죽음에서 구하기 위한 레펜하이머의 절박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것 때문이었군.”

가문을 온통 회색으로 색칠하면서까지 삶에 대한 집착을 끊어 내려 했던 것은 사실 어브렐가의 진심이 아니었다.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저주 앞에서, 그저 혈족들의 동요를 제어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

루인이 웃었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인데 못할 건 없지.”

내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레펜하이머가 주먹을 불끈 쥐며 동요하고 있었다.

그의 강렬한 두 눈이 다시 루인을 직시했다.

“정말인가!”

어브렐가의 수백 년 마도 연구, 그 치열한 노력으로도 멸화의 저주를 푸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저주의 굴레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하니 레펜하이머 가주는 금방 격동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포션의 제조는 그대들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포션의 제조법을 가르쳐 주는 것과 만들 수 있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단혼(斷魂)의 시약은 이종 교배를 통해 권능을 쌓아 올린 마족들을 징벌하기 위한 ‘마계의 형벌의 도구’다.

이 세계의 백마법, 인간의 마도 지식으로는 제작이 불가능한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펜리르의 눈물, 이그릴라드의 영혼 꽃잎, 화산 불새의 알, 마지막으로 성체 드래곤의 용마력. 이것이 배합식의 주요 재료들이다.”

마계의 재료들과 최대한 비슷한 효과를 내는 인간계의 재료였다.

그중에서도 용마력은 루인의 불확실한 가정.

자신의 강대한 융합 마력과 최대한 비슷한 효과를 내려면 드래곤의 강력한 용마력 정도는 되어야 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초고순도의 마정이 필요한데, 아무리 어브렐가라도 그 정도 순도의 마정은 구하기가 힘들 것이다.

설사 자신이 마계의 마정을 준다고 해도 진마력을 추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터.

역시 레펜하이머의 얼굴은 경악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루인이 언급한 첫 번째 재료부터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펜리르의 눈물……?”

펜리르는 실제 모습을 본 인간이 드물 정도로 환상 속에 존재하는 동물이다.

도도하기로 이름 높은 요정족, 그런 요정족의 우두머리인 하이엘프의 군주가 다루는 영수.

그 자존감 높은 하이엘프들이 극도로 혐오하는 인간들에게 펜리르의 눈물을 내어 준다?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영수를 슬프게 만들어 눈물을 짜내는 일 따위를 그들이 해 줄 리 만무했다.

게다가 이그릴라드의 영혼 꽃잎, 화산 불새의 알까지는 어떻게 구해 본다고 해도 드래곤의 용마력은 정말 말도 안 되는 난이도였다.

수백 년간 인간들에게 나타나지 않은 드래곤을 대체 어디서 수소문하며, 그런 드래곤의 협력까지 이끌어 낸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이건 사실상 포션 제작을 포기하라는 말과 같다.

당연히 레펜하이머 가주로서는 의구심만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그대는 어떻게 그런 포션을 제작할 수 있었단 말인가?”

퉁명하게 대답하는 루인.

“나에겐 모든 재료들이 있으니까.”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는 ‘있었다’도 아니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말은 아직도 재료가 남아 있다는 뜻.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드래곤과도 친분이 있단 말인가?”

그 순간.

루인이 무심한 표정으로 염동력을 일으킨다.

우우우웅-

허공에 얽히기 시작하는 루인의 융합 마력.

강대하게 끓어오르기 시작한 루인의 융합 마력이, 출력의 최대치에 이르고 나서야 마력 잔상과 함께 서서히 흩어진다.

“대체……!”

레펜하이머 가주는 7위계의 마법사.

루인의 융합 마력에 담긴 말도 안 되는 거대한 기운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물론 다른 어브렐가의 혈족들도 마찬가지.

“내겐 굳이 드래곤의 용마력이 필요하지 않지.”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광활한 마력이었다. 인간임이 의심될 정도로.

레펜하이머 가주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대체 어떻게 그 나이에…….”

이게 정말 상식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일인가?

이제 고작 열일곱, 열여덟의 소년이다.

배 속에서부터 마법을 익혔다고 해도 이건 정말 말이 되지 않았다.

‘헤이로도스의 마도(魔道)가 이 정도였단 말인가…….’

불가사의한 헤이로도스의 마법이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일.

눈앞에 앉아 있는 하이베른가의 대공자가 하이렌시아가의 초인을 꺾었다는 사실을 그는 이제야 피부로 실감하고 있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그대가 보유한 재료들을 모두 어브렐가가 매입하겠네. 그리고 그대가 진실로 드래곤의 용마력을 대체할 수 있는 마법사라면…….”

깊숙이 고개를 숙이는 레펜하이머 가주.

“……부디 어브렐가를 도와주게.”

루인이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다 어브렐가의 혈족들을 훑어본다.

“어떤 대가도 치르겠다라.”

레펜하이머의 가주가 언급한 것은 분명 무한의 대가, 해석하기에 따라 매우 위험한 말이었다.

루인은 처음부터 생각했던 요구 사항을 담담하게 꺼냈다.

“내 요구는 간단하다. 그대들이 하이베른가의 권속이 되는 것.”

수백 년간 중부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며 중립을 유지해 온 어브렐가.

지금 루인은 그런 어브렐가에게 동맹도 아닌 권속을 말하고 있었다.

권속(眷屬)이란 보통 한 가문에 충성을 맹세한 봉신가를 의미한다.

즉 지금 루인은 이들에게 하이베른가의 봉신가가 되어 달라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허, 허허허!”

마도명가 어브렐가는 르마델 왕국의 최상위 서열에 속한 대귀족가.

특유의 중립적인 성향 때문에 왕실과 렌시아가의 눈에 들지 못해서 작위가 낮을 뿐, 제 실력대로라면 후작 작위는 거뜬히 받아 낼 수 있는 가문이었다.

한데 레펜하이머 가주는 루인의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제법 진지하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만큼 멸화의 저주를 극복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매단 저울의 추가 너무 무거워졌군.”

합리적인 거래가 아니라는 말.

루인이 레펜하이머 가주를 향해 싱긋 웃었다.

“어디 구경 한번 해 보지. 그대가 매달고 싶은 무게 추를.”

즉각적으로 대답하는 레펜하이머.

“권속을 받아들이겠네. 대신 내 딸 중 하나와 혼인해 줄 것을 제안하겠네.”

금방 루인의 미간이 구겨졌다.

어떻게 된 게 이 귀족이라는 족속들은 자신의 예상을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리리아를 향한 자신의 경고가 현실이 되자 루인은 자신의 무게 추를 바꿔 달기로 마음먹었다.

“혼인 말고도 가문 사이의 결속을 유지해 줄 다른 방안은 얼마든지 있다. 이를 테면―”

“하지만 혼인 동맹이 가장 쉽고 확실하지.”

“…….”

루인은 욱하고 치밀어 올랐으나 빌어먹게도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 혼인 동맹은 가장 손쉬운 결속의 수단, 인류사에서 그보다 강력한 동맹의 징표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 말을 끝까지 들어라.”

“혼인 동맹보다 더 확실한 게 있다면 말하게.”

헬라게아를 소환하는 루인.

츠츠츠츠츠-

공간을 찢으며 나타난 헬라게아, 그 무시무시한 기운이 등장하자 마법사들인 어브렐가의 혈족들이 동시에 경악했다.

“이, 이게 무슨!”

“그, 그게 뭔가!”

마법사의 아공간이라기엔 너무 광대무변한 느낌.

영혼에 직접 마력이 투사되는 듯한 그 농밀한 마력의 잔향은 어브렐가의 혈족들이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한 것.

이내 루인이 헬라게아 안에서 금괴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툭 얹어놓았다.

“어브렐가에게 재물을 선물하지. 재물은 혼인보다 더욱 강력한 약속의 수단이니까.”

“재물?”

레펜하이머가 피식 웃었다.

어브렐가가 중부의 용병대들을 장악하고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바로 저 금(金)이다.

드높은 마도 지식으로 만든 아티펙트들을 유통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는 어브렐가에게 감히 재물을 들먹이다니.

“역시 아직 어리시군. 이 어브렐가의 가주 앞에서 재물로 유혹하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츠츠츠츠츠-

또다시 시커먼 공간의 아가리 속에서 뭔가가 삐죽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보기만 해도 눈부신 광채를 뿜어내고 있는 화려한 롱 소드.

마치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익숙한 모양. 그렇게 레펜하이머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츠츠츠츠츠-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새하얀 로브가 천천히 드러난다.

눈에 익은 룬 문양, 성결을 상징하는 십자가.

아직도 말라붙은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그 순결의 로브는 인간의 역사를 배운 이라면 누구나 추앙하는…….

“서, 성자 아스타론의 로브?”

성자 아스타론.

그 옛날 인간계를 침략한 마왕에 맞서 인류를 구한 위대한 용사.

“설마…… 혹시 그 검도……?”

“아스타론의 성검이다.”

“그, 그럴 수가!”

마왕 발락카스와 대혈전을 벌였던 그는 치열한 혈투 끝에 마왕과 함께 시공의 폭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자신을 희생하여 인류를 구한 것이다.

그는 인류가 성자(聖子)로 추앙하는 몇 안 되는 대영웅이었다.

지금 그런 엄청난 고대 영웅의 유물이 다시 세상에 등장한 것이다.

“내 생각엔 말이지. 어브렐가의 전 재산을 열 번을 처분한다 해도 이 검과 로브를 사진 못할 거 같거든.”

레펜하이머 가주는 믿을 수 없었다.

도대체 마왕과 함께 사라진 고대 영웅의 유물이 왜 하이베른가의 수중에 들어가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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