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고즈넉한 평원 위에 자리 잡은 대저택.
꽤 먼 거리임에도 저택의 정원에 우뚝 솟아오른 마도사 드리미트의 동상이 한눈에 보인다.
루인이 그런 어브렐가(家)를 담담히 바라보고 있을 때 리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몸을 녹여야겠다.”
리리아가 새파랗게 변한 루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러나 루인은 묵묵히 헬라게아를 소환해 혼돈마의 꼬리를 밀어 넣을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절로 몸이 오들오들 떨려 오는 혹한의 계절이었다.
그런데 루인은 피부가 찢기는 듯한 그런 세찬 바람을 맞으면서도 한 번도 쉬지 않았다.
그래서 리리아는 세 개의 산맥을 넘을 동안 루인이 손에 쥐고 있던 괴생명체의 꼬리에 대해 물을 수가 없었다.
“괜찮다. 이런 추위쯤은.”
리리아가 살리고 싶은 가족의 목숨이었다.
그 절절한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회귀에 성공한 자신이 가장 먼저 했던 행동 역시 아버지를 살리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루인은 무리를 해서라도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다.
생도들이 보는 앞이라 다소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이제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라는 사실이 모두 공개된 마당.
더 이상 자신은 생도들이 함부로 흑마법사로 몰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또한 자신의 친구들과 하이베른가의 후원을 갈구하는 황혼 녀석들이 그럴 이유도 없었다.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루인의 그 말에 리리아는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그래. 심상 수련을 하고 있겠다.”
곧바로 아무렇게나 바닥에 앉아 이미지를 시작하는 루인.
리리아는 그런 루인에게 질려 버렸다.
이 차디찬 평원의 중심에서 마법사의 이미지라니.
리리아는 추위에 새파랗게 질려 있는 루인을 도저히 그냥 두고 갈 수 없었다.
“함께 가자.”
루인이 말없이 리리아를 올려다본다.
자신은 더 이상 일개 아카데미 생도가 아니었다.
자신의 행보 하나하나에 많은 정치적인 해석이 덧씌워질 수 있었다.
하이베른가의 대공자가 어브렐가를 방문하는 순간 온갖 소문과 억측이 난무하게 될 것이다.
어브렐가로서는 난처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네 가문이 렌시아가의 핍박을 받을 수 있다.”
어브렐가는 중부의 대귀족가다.
왕국에 이름난 용병대들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정통의 세력가.
중부의 용병대들을 장악하고 있는 그런 대귀족에게 루인이 방문한다는 것은 세력을 확장하려는 하이베른가의 의도로 읽힐 수 있었다.
당연히 렌시아가가 그 일을 가만히 지켜볼 리 만무했다.
리리아가 입술을 삐죽인다.
“상관없다.”
루인은 마치 고집을 피우는 아이 같은 리리아의 행동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어린 소녀다.
하지만 정치적인 계산 없이 그저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기에는 왕국의 권력 지형이 너무 험했다.
“너로서도 좋은 일 아닌가? 본가는 중부의 용병대들을 장악하고 있다. 아버지와 협상하여 그들을 네 가문의 권속처럼 부릴 수 있다면 네 가문에 큰 힘이 될 텐데.”
“뭐……?”
루인은 자신이 잠시 오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리리아는 아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감정적인 분이 아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분이지. 하이베른가가 적당한 조건을 제시한다면 충분히 협상이 가능할 거다.”
루인이 묘한 얼굴을 했다.
“그 조건으로 혼인 동맹을 요구해도 괜찮은 것이냐?”
“……혼인?”
피식.
“귀족가들끼리의 거래에서 혼인보다 더 강력한 믿음의 징표는 없다. 네 아버지가 내게 혼인 동맹을 요구한다면 난 어떻게 해야 되지?”
“누, 누구하고…….”
루인이 반문했다.
“누구긴. 너와 나겠지. 이미 함께 아카데미를 다닌 인연도 있겠다, 데리고 온 사람도 너겠다, 충분히 엮으려고 할 것이다.”
“아아……!”
생각지도 못한 상상에 리리아의 혈색이 순식간에 붉어진다.
한데, 그런 그녀의 표정에서 묘한 의문이 떠올랐다.
“너는…… 괜찮은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루인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뭘 얻을 수 있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네 말대로 어브렐가의 가주께서 중부 용병대들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제안한다면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조건이다.”
“조건……?”
루인이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너, 귀족가들끼리의 혼인 동맹에 무슨 감정이나 사랑, 그런 걸 상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
말없이 입술을 깨무는 리리아.
“혼인 동맹은 말 그대로 그냥 동맹이다. 결혼은 동맹의 결속력을 상징하는 수많은 요건의 하나일 뿐이지.”
루인이 천천히 일어난다.
“나 역시 그런 귀족가들끼리의 거래에 감정을 섞을 생각은 없다. 그 정도 각오도 없이 함부로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를 가문에 들일 생각은 마라.”
깊게 가라앉은 동공,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루인의 눈빛에 리리아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루인은 대공가의 대공자로서 입장을 전할 땐 언제나 서슬 푸른 칼날처럼 냉철하고 도도했다.
아카데미에선 누구보다도 감정적으로 굴었던 그였기에 리리아로서는 당황스러울 만도 한 것이다.
“……가자.”
그런 리리아의 행동에 루인의 눈이 금방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일부러 모질게 겁을 주었는데도 함께 가자고?
“권력 놀음. 귀족 간의 거래. 그딴 거 전부 다 관심 없다.”
먼저 걸어가는 리리아.
“내 눈엔 그저 내 목숨을 구해 준 친구가 추위에 떨고 있을 뿐이다.”
루인이 씁쓸하게 웃다가 그녀를 따라 나섰다.
그녀의 마음이 모진 풍상을 겪으며 닳고 닳는다면 저 순수한 마음도 언젠가 빛이 바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리리아의 순수(純粹)를 응원해 주고 싶었다.
한때나마 대마도사도 그런 시절이 있었으니까.
* * *
하이베른가의 대공자가 방문했다는 소식에 어브렐가의 하인들이 분주해졌다.
본래 귀족가 간에 예고도 없이 방문하는 건 대단히 무례한 행동.
그러나 왕국의 대공가는 말이 달랐다.
더구나 기수 쟁탈전의 대전사로 나서서 마법으로 초인을 꺾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라면 더욱더.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는 현 르마델의 귀족 사회에서 폭풍의 핵 같은 존재였다.
그런 대공자의 첫 행보가 어브렐가였으니 황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를 품고 있는 것이다.
어브렐가에 도착하자마자 리리아는 언니의 병상으로 달려갔다.
루인은 응접실 홀에 홀로 남아 창밖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
어브렐가의 첫인상은 ‘회색’이었다.
모든 구조물과 장식물들의 색깔이 하나같이 어두운 잿빛.
건물, 벽난로, 방 전체, 심지어 정원의 꽃들까지 잿빛의 그레이플이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회색에 집착할까 궁금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회색이 상징하는 의미에 그 뜻이 숨어 있었다.
회색은 자연 상태나 생명의 속성에 반대되는 속성, 즉 인공물과 무생물을 상징한다.
마법에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는 어브렐가의 혈족들.
하지만 용족의 저주, 멸화(滅禍)를 앓고 있는 그들은 생에 집착하면 할수록 그 삶을 갉아먹게 된다.
비생명, 죽음을 상징하는 잿빛을 시야가 닿는 모든 곳에 칠해서라도, 삶에 대한 인간의 집착을 끊어 내려는 처절한 몸부림인 것이다.
루인은 그런 어브렐가가 측은했다.
어떤 이유로 이들에게 용족의 피가 섞인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그것 또한 욕망의 결과일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욕망에 잡아먹힌다.
그 욕망 때문에 인간의 세계는 멸망과 탄생을 수도 없이 반복한다.
역사를 통해 그 처절한 역사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도 인간들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똑똑-
응접실을 울려 오는 노크 소리에 루인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들어오시게.”
공손한 걸음으로 응접실에 들어온 어브렐가의 집사는 함부로 루인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깐 채 루인에게 다가가 제 주인을 마주한 것처럼 깊숙이 몸을 숙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귀족가의 예법을 철저하게 배운 사람이었다.
“연회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대공자님. 가주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걸음하시지요.”
루인이 천천히 일어나자 어브렐가의 집사는 더욱 시선을 내리깔며 몸을 틀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고맙네.”
루인은 집사의 안내에 따라 정원을 지나 어브렐가의 타워에 도착했다.
어브렐가의 타워 역시 잿빛 벽돌로 지은 건물이었다.
쿵-
끼이이이익-
육중한 타워의 문이 열리자 일단의 무리들이 루인의 시야에 들어왔다.
기다란 직사각형 테이블을 앞에 두고 어브렐가의 혈족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인이 그들의 시선을 담담히 받으며 타워의 내부로 진입했다.
어브렐가의 가주는 가장 드높은 자리, 가주의 권좌에 앉아 루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금방 루인의 눈빛이 불처럼 타올랐다.
‘건방진.’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는 금린사자기의 명예를 이을 존재.
한데도 감히 일어나지도 않고 가주의 권좌에 앉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감히 자작 따위가 대공가의 명예를 대리하는 대공자를 도발하고 있는 것이다.
냉랭한 표정의 루인이 자신의 맞은편 자리에 앉자, 그제야 어브렐가의 가주, 레펜하이머의 무거운 입이 열렸다.
“드디어 그대를 보게 되는군.”
레펜하이머는 루인이 헤이로도스 술식의 전승자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부터 만나고 싶어 했다.
마도가문으로서 최고의 영애라 할 수 있는 마법학회의 개최를 포기하면서까지 에어라인에 수도 없이 입천을 통보한 것이다.
하지만 학부장 헤데이안의 방해로 루인을 만나는 일이 번번이 무산되던 상황.
그런 루인이 이렇게 제 발로 찾아와 주니 그로서는 실로 반가울 따름이었다.
“헤이로도스의 전승자라는 것이 사실인가?”
서슴없이 이어지는 레펜하이머의 하대에, 루인은 리리아를 생각해 애써 참아 왔던 분노를 끝내 터뜨리고 말았다.
“레펜하이머 자작. 그대는 대공가가 우스운 것인가?”
레펜하이머는 루인의 그런 반응을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대는 아직 이 왕국의 귀족 명부에 공표된 귀족이 아니네. 아직 사교계에 데뷔도 하지 않은 그대가 어찌 귀족가의 법도를 말한단 말인가. 또한―”
“…….”
“그대가 귀족가의 법도를 말할 거라면 정식으로 방문을 통보하고 본 가의 승낙 여부를 물은 후 시일까지 합의했어야만 했다. 한데 그대는 그러지 않았지. 허면 대공가를 향한 예우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닌가?”
“…….”
“그나마 기수 쟁탈전의 대전사로 나선 일로 그대의 신분이 확실해졌기에 갑작스럽게 연회를 마련한 것이네. 법도대로라면 우리는 그대를 불청객 취급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
루인은 레펜하이머가 입을 열기 시작한 처음부터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이 훤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돼먹지 못한 연기는 집어치우고 본심을 드러내라. 어브렐가.”
“……연기?”
왕국의 역사에서 어브렐가는 북부의 하이베른가와 남부의 렌시아가 사이에서 끝까지 중립을 유지한 가문.
이들이 이렇게까지 자신만만할 수 있는 이유는 강력한 마도 군단과 엄청난 수의 용병들을 예로부터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들은 역사상 가장 화려한 성세를 구가하고 있는 지금의 렌시아가 앞에서도 도도하게 굴었다.
“나는 마법사라는 족속들을 잘 알아.”
테이블 위에 화려하게 펼쳐진 만찬을 찬찬히 훑고 있는 루인.
“헤이로도스의 술식에 대한 욕망을 이렇게 온 마음에 드러내고 있는 주제에 굳이 나를 도발하는 이유야 간단하지.”
잔잔히 웃기 시작하는 레펜하이머.
“그게 뭔가?”
씨익.
“나와 협상하기 전, 내 그릇을 시험하기 위함이다. 확신이 선다면 어브렐가가 동원할 수 있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헤이로도스의 술식을 확보하려 들겠지.”
“호오…….”
루인이 어브렐가의 혈족들을 둘러본다.
“그대들은 어브렐가 역사상 최초로 중립을 깨려 하고 있다.”
루인과 레펜하이머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