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루인의 엄청난 중력 마법과 마력 개방에 의해 정신을 잃었던 하이렌시아가의 대공자 크라울시스.
그가 겨우 깨어났을 땐 일주일도 넘게 시간이 흐른 후였다.
크라울시스가 격통에 미간을 찌푸리며 힘겹게 눈을 떴다.
희미한 시야, 얼룩져 있던 한 사람의 얼굴이 점차 또렷해진다.
“아버지…….”
“계속 누워 있거라.”
“…….”
화를 낼 줄 알았던 아버지가 의외로 담담한 표정이었다.
크라울시스는 도저히 아버지의 시선을 마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됐다.”
이 세상엔 가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괴물이 출현한다.
모든 상식과 체계를 무시하는, 어떤 해석도 불가능한 희대의 천재.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괴물과 자신의 아들을 동일한 잣대로 비교하는 것.
욕심 때문에 아들을 열등감으로 피폐해지게 만들 순 없다.
그건 아들의 삶을 시궁창에 내던지는 행위.
사람은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
환상검제 레페이온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몸은 좀 어떠냐.”
“……괜찮습니다. 기수 쟁탈전은 어떻게 됐습니까?”
“패배했다.”
“예?”
대공자 크라울시스는 잠시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알칸 제국 출신의 검산(劒山)은 자신이 아는 한 최강의 무력을 지닌 기사였다.
아직도 그가 가문 내 최고의 기사인 천 개의 환영, 율펜과 대결했던 광경을 잊을 수 없었다.
전율적인 투기, 마르지 않는 스피릿 오러 세례.
환상적인 선의 향연, 검산의 검술.
지극히 단순하지만 그 파괴력은 검술의 모든 체계와 상식을 부수는 것이었다.
초인의 세계를 엿본 당시의 광경은 크라울시스의 생애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카젠 대공이 그 정도로 강합니까?”
“검산의 상대는 카젠이 아니었다.”
초인을 상대할 수 있는 기사가 하이베른가에 더 있다니?
불길한 예감, 상상도 하기 싫은 인물이 떠오르자 크라울시스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베른가의 대공자는 아니겠지요……?”
레페이온이 한참이나 뜸을 들이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가 맞다.”
“예?”
“베른가의 대공자. 그가 카젠의 대전사였다.”
온몸을 벌벌 떠는 크라울시스.
두려움과 분노, 수치심과 패배감.
온갖 감정이 교차하며 구겨진 그의 표정이란 마치 악마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데오란츠가 우리를 배신했다.”
“예? 그게 무슨……?”
담담하게 기수 쟁탈전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모두 설명하는 레페이온.
이미 검산을 돌려받는 일을 합의한 국왕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베른가에게 힘을 실어 줬다는 말을 들었을 때.
크라울시스는 통증도 잊고 거칠게 일어나고 말았다.
“그게 말이 됩니까! 크윽!”
르마델의 국왕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이렌시아가의 꼭두각시.
“그뿐만이 아니다.”
“또…… 뭐가 남았단 말입니까?”
“놈이 아카데미를 장악했다.”
“아카데미요?”
아카데미의 생도들에게 후원을 천명한 하이베른가.
미끼로 내건 사자기사단과 사자검술, 거기에 엄청난 가치를 지닌 아티펙트들이 아버지의 입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자.
“대체 베른가는 그런 엄청난 전투 보조형 아티펙트들을 어디서 구한 겁니까?”
르마델 왕국은 알칸 제국이나 남부의 왕국들에 비해 마법적 역량이 현저히 떨어지는 국가.
마탑의 규모도 가장 작은 편에 속했고, 특히나 마도학자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였다.
당연히 아버지가 언급했던 아티펙트 중 하나만 왕국에 나타나도 보이는 족족 마탑의 연구실로 흘러들어 갔다.
알칸 제국의 것과 비슷한 수준의 아티펙트들을 제조하려면 최대한 연구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당연히 일반 기사들에게 돌아갈 전투 보조형 아티펙트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대귀족가의 유력 직계, 기사단장, 용병대장 정도가 아니라면 아티펙트를 평생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것이 현실.
알칸 제국은 전투 보조형 아티펙트들의 제조 비밀을 국가 전략 자산으로 규정하고 철저하게 통제하고 감시했다.
아티펙트 보급은 그들이 제국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 때문이었다.
“절대 정상적인 방법으로 들여온 아티펙트들이 아닐 테지. 알칸 제국과 교류하는 암거래상들을 모조리 조사할 작정이다.”
크라울시스는 그게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암거래란 기본적으로 웃돈 거래다.
원래도 그 엄청난 가치 때문에 천문학적인 가격일 텐데, 그걸 웃돈을 더 얹어 매입을 한다고?
“그게 베른가에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 비대한 기사 병력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베른가는 모든 역량을 쏟아붓고 있었다.
더욱이 베른가를 장악한 수뇌부들 역시 죄다 부패한 자들.
얼마 전, 대규모 숙청 소식이 들려오긴 했지만 그래 봤자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영지의 재정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부(富)를 축적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을 터였다.
“가능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미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지.”
“…….”
크라울시스가 입을 다물자 레페이온이 에어라인의 왕성을 응시했다.
“또한 저 데오란츠가 갑자기 흑심을 품은 것도 베른가의 대공자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건 너무 과한 가정입니다.”
“확신할 수 있느냐?”
“근거가 부족한 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크라울시스의 말대로 근거는 없다.
그러나 기원제 기간 내내 대공자를 경험한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감(感)이 있다.
왕국의 모든 노련한 귀족과 대신들을 장악해 오며 길러진 육감.
그 감이, 베른가의 대공자가 사자의 가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의 실체라 말하고 있었다.
“대공자는 회복하는 즉시 아카데미에 입학하라.”
“예? 갑자기 그게 무슨…….”
“그것까지 가르쳐 줘야 하는 것이냐?”
“…….”
레페이온의 미간이 조여든다.
이내 그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아카데미의 기사 생도들은 우리 가문보다 베른가의 후원에 목맬 것이다.”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고작 아티펙트 하나로…….”
르마델 왕국에서 하이렌시아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군부 내에 자리를 잡든 정치계에 입문을 하든 하이렌시아가를 통하지 않고는 어떤 일도 도모할 수 없는 것이다.
“고작? 고작이라고 했느냐?”
“그렇지 않습니까? 아티펙트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적어도 이 왕국 내에 자리를 잡고 싶다면 우리 하이렌시아를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처음으로 레페이온은 아들을 향해 한심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다시 묻겠다. 놈이 아티펙트만 약속했느냐?”
“아……!”
“놈이 약속한 건 사자의 검술과 사자기사단이다. 아티펙트는 부차적인 문제지.”
“…….”
“죽을 자리라는 걸 알고도 군주의 손짓 한 번에 일말의 망설임 없이 전장으로 뛰어든다. 그게 기사라는 족속들이다. 그런 자들의 머릿속에 과연 출세가 전부겠느냐?”
“……아닙니다.”
“기사가 지닌 신념과 명예욕을 가볍게 보지 말거라. 그리고 너는 인간의 물욕을 참으로 우습게 보는구나. 특히나 전장의 위기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만드는 아티펙트다. 기사들에겐 천금을 주고도 맞바꾸고 싶은 물건이지.”
레페이온이 다시 표정을 풀었다.
“다시 묻겠다. 과연 너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
금린사자기 아래 전장을 누빌 수 있는 명예, 그리고 사자의 검술과 값비싼 아티펙트.
하이렌시아가가 제시하는 출세의 삶에 결코 모자람이 없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카데미로 가거라. 생도들의 동요를 막고 베른가의 동태를 살피거라.”
“예. 아버지.”
차분한 눈빛, 하지만 레페이온의 동공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빼어난 인재들을 지속적으로 영입할 수 없다는 건 본 가를 지탱해 온 뿌리가 흔들리는 일과 같다.”
“명심하겠습니다.”
레페이온이 집사를 호출했다.
“집사.”
임시 대공저의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렌시아가의 집사가 다가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예, 가주님.”
“대공자에게 환상고(幻象庫)의 출입을 일시적으로 허가한다.”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눈을 부릅뜨는 대공자 크라울시스.
“아버지……?”
“가문의 보물을 모두 동원해도 좋다. 감히 재물로 본 가를 도발한 그 대공자 놈에게 본때를 보여 주도록.”
하이렌시아가가 쌓아 온 재물의 성(城)이라면 이 르마델 왕국을 모두 사고도 남는다.
대공자 크라울시스의 눈빛이 자신감으로 불타올랐다.
* * *
새벽 달리기 수련을 위해 기숙사에서 나오던 루인 일행.
하지만 그들은 훈련장을 향한 발걸음을 더 이상 이어 가지 못했다.
“와…… 이게 다 뭐야?”
“망측해.”
달랑 팬츠 한 장만 두르고 웃통을 깐 근육 괴물들이 연신 근육을 출렁이며 마법학부의 앞마당을 쓸고 있었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치워진 계단.
잡초 하나 없이 완벽히 정리된 화단.
블록 타일의 사이사이에 낀 때까지 그야말로 완벽하게 닦아 놓았다.
가히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이, 이게 하루 만에 가능한 일인가?”
멍해진 시론.
밤을 새며 청소를 했어도 이런 광경을 만드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가히 인간의 집착이 아니었다.
-기침하셨습니까! 대공자님!
자신을 향해 일제히 근육을 출렁이며 허리를 숙이는 황혼의 기사 생도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루인.
한겨울인데도 온몸에 땀이 그득하다.
근육 괴물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김.
얼마나 열심히 청소를 했을지 단숨에 느껴진다.
씨익.
“고생이 많군.”
-아닙니다! 대공자님!
루인이 기사 생도들을 향해 손을 휘휘 저으며 걸어갔다.
생도들이 그런 루인을 따라 조심스럽게 근육 괴물들의 틈으로 걸어갔을 때.
새벽 일찍 기숙사를 나섰던 리리아가 돌아오고 있었다.
리리아를 발견한 루이즈가 루인을 바라봤다.
<리리아가 돌아오고 있어.>
리리아는 루인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가문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나?”
“아카데미의 생도는 공간 이동탑을 쓸 수 없다더군…….”
“뭐?”
다프네가 아차 하는 표정을 했다.
“아 맞다! 맞아요! 그런 규정을 본 적이 있어요!”
“규정?”
“네. 아카데미 생도는 왕국의 전략 자산으로 규정되어 있거든요. 왕법상 전시가 아니면 왕국의 전략 자산을 공간 이동탑으로 운송할 수 없는 거죠.”
시론이 당황해하며 물었다.
“우리가 전략 자산이라고? 아니 살아 있는 사람을 보급품 취급하다니 그게 말이 되냐?”
“규정이 그래요. 높은 분들께서 정해 놓은 왕법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순 없잖아요.”
사실 르마델 왕국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에서 아카데미 생도들은 전략 자산 취급을 받는다.
아카데미 생도들은 나라의 동량이자 미래였지만 국가의 투자에 보답해야 하는 자산이기도 한 것이다.
“그럼 어떡해? 역시 마차로 가야 하나? 최소 몇 주는 걸릴 텐데…… 언니가 많이 아파?”
세베론의 걱정스런 물음에 리리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루인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최대한 두꺼운 옷을 세 겹 정도 껴입어라.”
루인의 그 말에 리리아는 즉시 커다란 짐 가방을 열어 두꺼운 코트를 몇 벌 꺼냈다.
역시 그녀는 별다른 의문이 없었다.
그만큼 루인을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외투를 계속 껴입자 리리아는 팔이 약간 들린 채로 엉거주춤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생도들은 그런 리리아의 귀여운 모습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귀여워!”
“펭귄 같다 리리아!”
입술을 깨무는 리리아.
“……시끄럽다.”
루인이 갑자기 생도들을 돌아본다.
“내가 없더라도 수련은 쉬지 마라.”
“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시론이 당황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츠츠츠츠츠츠-
헬라게아가 열린다.
루인의 손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괴생명체의 흉측한 꼬리가 들려 있었다.
“꺄아아아악!”
“그, 그게 뭐냐 도대체!”
리리아를 바라보는 루인.
“업혀라.”
“……뭐?”
“긴말하기 싫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어둠의 기운이 가득한 혼돈마(混沌魔)의 꼬리다.
이른 새벽이 아니었다면 꺼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다프네. 내가 떠나면 주변 마력의 잔재를 지워라.”
“떠, 떠난다니 그게 무슨 소리죠?”
리리아가 루인의 등에 올라탔을 때.
파아아아아앙-
거친 풍압과 함께 루인이 사라졌다.
“…….”
“…….”
“…….”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생도들.
저 멀리 까맣게 점으로 변한 루인을 멍하니 응시하며 시론은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황혼의 근육 사내들도 일제히 빗자루를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