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마법학부의 기숙사를 바라보는 기사 생도들의 눈빛은 강한 열망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포효하는 황혼’ 그룹을 선택한 것은 하이베른가의 중검(重劒), 사자검을 향한 존경과 흠모의 발로였다.
정치적인 역학 관계, 대귀족들의 권력 놀이, 그딴 것은 다 필요 없었다.
왕국의 주류 검술인 쾌검술을 언제나 잔재주로 만들어 버리는 하이베른가의 사자검술이야말로 황혼의 기사 생도들이 꿈꾸는 이상향인 것이다.
황혼의 최고 기사 생도들이 연달아 ‘칼날 지배자’에게 패배한 기억 따위는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서 저만치 달아났다.
그는 다름 아닌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물론 그가 보여 준 신위는 마법과 무투술이었다.
하지만 모든 시민들 앞에서 외쳤던 그의 서슴없는 당당함과 전율적인 기백은 하이베른의 사자 그 이상.
분명 그에겐 기사의 가슴을 들끓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런 대공자의 후원만 받을 수 있다면 생애 최고의 명예이자 더없는 영광일 것이었다.
“왜 우리 대공자님은 나오시지 않는 거지?”
“주문쟁이들에게 못 들었냐? 대공자님께서 먼저 후원을 언급하셨다고 했다! 분명 우리에게 기회를 열어 주실 거라고!”
“쉿! 더 이상 주문쟁이라는 말은 쓰지 마! 우리 대공자님께서도 주문…… 아니 마법 생도시잖아!”
강철의 하이랜더 올칸이 가슴 근육을 씰룩이며 비릿하게 웃었다.
“멍청한 놈들. 나와 대공자님은 이미 한 번 몸으로 대화한 사이다. 사나이들끼리 한 번 치고받지도 않고 무슨 관계가 진전될 수 있단 말이냐.”
황혼의 기사 생도들이 그런 올칸을 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크림슨 오오라의 극한, 적혈강체를 최대 출력으로 끌어올리고도 대공자에게 먼지 나도록 두들겨 맞은 것이 어제처럼 선명했다.
한데 올칸은 이미 그런 치욕 따위는 깡그리 잊은 듯, 아니 오히려 그 일을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때.
전신이 네모반듯한 근육질의 거한, 황혼의 리더 생도 ‘야생마’가 나타나 더 우람한 가슴 근육을 씰룩였다.
“올칸아 올칸아, 뇌까지 근육으로 차올라 버린 올칸아. 넌 여전히 멍청하기 짝이 없구나?”
“뭐야?”
피식.
“잘 생각해 봐라. 아직 하이렌시아가의 방계 성을 하사받지 않은 나와는 달리 너는 이미 받지 않았냐? 이미 넌 하이렌시아가의 사람이나 다름없는데 ‘우리’ 대공자께서 널 과연 받아들이실까?”
“개소리! 너도 하이렌시아가의 방계 성을 약속받은 것은 마찬가지다!”
“응, 이미 받은 것과 ‘예정’은 달라. 난 아직 거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넌 이미 물 건너간 거지.”
“다, 닥쳐라!”
하이베른가의 대공자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황혼의 두 기사 생도들이 서로 자신이 잘났다고 우기는 웃지 못할 풍경.
“대, 대공자님이다!”
“기수 쟁탈전의 승리자이시다!”
루인이 마법학부 기숙사의 정문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황혼의 기사 생도들이 일제히 루인을 바라본다.
열망으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들.
루인이 담담한 표정으로 생도복 상의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
“공표한다.”
꿀꺽.
대공자의 단 한마디.
예전부터 느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항거할 수 없는, 그리고 절로 가슴이 들끓는.
“이미 너희들도 들었다시피 하이베른가는 왕립 아카데미의 기사 생도들을 후원할 것이다.”
“우오!”
“그, 그 후원! 바, 받고 싶습니다!”
루인이 더욱 엄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후원 생도에게 우리 하이베른가가 선사하는 혜택은 총 세 가지다. 첫 번째―”
꿀꺽.
긴장감이 몰아친다.
“베른가의 사자기사단, 금린사자기 아래 전장을 누빌 수 있는 기회다.”
두근두근!
황혼의 기사 생도들은 하나같이 미칠 듯이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하이베른가의 사자기사단!
기수의 금린사자기를 호위하는 최고의 근위 기사단, 왕국의 초대 역사부터 존재해 온 전설적인 기사단이었다.
역사 속에서 이룩한 명예와 명성을 따진다면 왕실 기사단보다도 더욱 드높다.
기사를 꿈꾸는 이라면 사자기사단의 명성 앞에서 가슴이 뛰지 않을 이는 없는 것이다.
“두 번째, 사자검술(獅子劍術)을 배울 기회다.”
올칸이 두 눈을 부릅뜨며 경악했다.
“마샬 워 소드(Martial War Sword)를 말입니까!”
“그렇다. 직계 혈족에게만 허락된 후반의 비전검술을 제외한 모든 마샬 워 소드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우오오오!”
“저, 정말입니까!”
사자검, 마샬 워 소드는 천년 북부의 전설이자 왕국의 신비.
그런 꿈만 같은 중검의 정수, 전설적인 사자의 검술을 배울 기회라니!
기사 생도가 꿈꿀 수 있는 최고의 기회 앞에서 황혼의 생도들은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아티펙트 무구를 지원한다. 참고로 이건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로서의 내 개인적인 지원이다.”
“아, 아티펙트!”
츠츠츠츠츠츠-
곧장 소환되는 헬라게아.
루인은 무수한 마계의 유물들 중에서 하급 마졸들이 사용했던 몇몇 갑주와 무기들을 꺼냈다.
철컥-
루인의 부유 마법에 의해 공중에 뜬 채로 영롱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은은한 적광의 갑주.
“이건 대마법 방어 주문이 룬(Rune)으로 새겨진 일종의 안티 매직 아머다. 5위계 이하의 모든 마법을 상쇄할 수 있지.”
“5위계!”
“아, 안티 매직 아머라니!”
안티 매직 아머는 모든 기사들에게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무구.
전장에서 대량으로 전사자가 발생하는 이유는 대부분 마장기(魔裝機)와 원소 마법사의 마법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안티 매직 아머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사실상 부르는 게 값인 상황이었다.
제작에 소모되는 재료들이 워낙 희귀할뿐더러 그런 마법 무구를 제작할 수 있는 마도학자들 또한 극소수였기 때문.
게다가 5위계의 마법까지 막아 준다는 것은 그런 안티 매직 아머 중에서도 최상위의 아티펙트란 뜻이었다.
철컥-
그다음 루인이 헬라게아에서 꺼낸 것은 칙칙한 빛깔의 가죽 신발이었다.
“경량화(Lightweight) 술식이 룬으로 새겨진 신발이다. 몸무게를 절반 이상으로 줄여 주는 효과를 내지. 도약력과 스피드를 비약적으로 상승시키는 아티펙트다.”
촤르르-
“이건 윤활(Grease)의 술식과 안티 샤프(sharp)의 술식이 새겨져 있는 체인 메일이다. 윤활 마법은 다양한 공격 상황에서의 생존력을 높여 준다. 당연히 안티 샤프 술식 또한 스피릿 오러를 제외한 모든 창칼의 날카로움을 방어할 수 있다.”
우우웅-
“아공간 배낭이다. 이 작은 가방의 내부는 거의 작은 방 하나의 부피를 자랑하지. 당연히 경량화 술식도 걸려 있다. 이 가방에 몽땅 보급품으로 채워 넣는다면 수개월을 거뜬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진 장장 한 시간 동안의 아티펙트 소개.
이쯤 되자 황혼의 기사 생도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루인이 소개한 아티펙트들은 하나같이 쉽게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명품 중의 명품.
대부분 기사의 생존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주는 아티펙트들이었고, 당연히 기사 생도들로서는 욕망으로 번들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대체 저희가 어떻게 하면 하이베른가의 후원을 받을 수 있는 겁니까!”
“제발! 저를 선택해 주십시오!”
“저도!”
“존경드립니다! 칼날 지배자이시여!”
루인의 눈빛이 매섭게 빛난다.
“방금 칼날…… 운운한 기사 생도는 내 후원 기준에서 탈락이다.”
“아아아! 왜입니까?”
“기분이 매우 나빴다.”
“이, 이건 메모다!”
혹시라도 까먹을까 봐 품에서 필기구를 꺼내 맹렬히 손바닥에 메모하기 시작하는 황혼의 기사 생도들.
루인이 다시 황혼의 기사 생도들을 굽어본다.
“첫째 후원 기준은 기사로서의 실력이겠지.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예?”
“왜죠?”
하이렌시아가 후원 생도를 선발했던 기준은 오로지 실력이 전부였다.
최소 5성 기사는 되어야 그들의 눈에 들 수 있었던 것이다.
“하이베른가는 기사도를 중시한다. 그러므로 너희들의 행실을 첫 번째로 보겠다.”
“해, 행실?”
“예? 행실이라니요?”
두 눈을 멀뚱멀뚱 뜨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반응들.
루인이 생도복 상의의 포켓에서 다른 서류 뭉치를 꺼냈다.
이어진 루인의 일장 연설에, 생도들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황혼의 기사 생도 디라노. 마법학부의 여생도 로아나를 지속적으로 추행했군. 모멸을 느낄 만한 성희롱도 다수. 심지어 여생도 로아나가 피해 다니자 명백히 저열한 목적의 스토킹까지.”
저 뒤편에서 듣고 있던 디라노가 경악성을 내질렀다.
“으, 음모입니다! 모함입니다!”
“기각한다. 목격한 증언자들의 진술이 완벽히 일치한다. 원한다면 그녀의 심리상담을 담당했던 디다데오 교수의 증언을 이 자리에서 틀 수도 있다.”
루인이 웃으며 음성 마법 아티펙트를 주머니에서 꺼내 흔들어 보이자 디라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황혼의 기사 생도 구켄타. 넌 마법 생도 헨리와 기숀에게 정기적으로 상납을 받았군. 왕국과 시민을 지켜야 할 자가 도리어 빼앗다니. 이런 상습 편취야말로 기사로서의 가장 최악의 자질이다.”
구켄타가 소리친다.
“그, 그건 잠시 빌린 겁니다!”
루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구켄타를 바라본다.
“정기적으로 원금과 이자를 갚는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있어도 한 번도 갚지도 않고 3년 내내 정기적으로 빌릴 수 있다는 건 살면서 처음 듣는 소리군. 세상은 그런 걸 금전대차(金錢貸借)라 하지 않아. 갈취라고 하지.”
“…….”
“황혼의 기사 생도 다도스―”
루인이 말을 하다 말고 인상을 찡그린다.
내용이 사실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악랄해서 차마 공개적으로 공표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당장 퇴교를 당한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지경.
루인이 다도스의 서류를 구겨 버렸다.
“넌 기사가 아니라 쓰레기다.”
루인은 하이베른가의 일원이었기에 기사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명예를 함부로 재단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서슴없이 쓰레기라 매도할 수 있는 명백하고도 추악한 증거가 있었다.
그래서 저 다도스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윌리아스 너는…….”
황혼의 기사 생도들이 그동안 벌이고 다녔던 행위를 들추는 일은 아티펙트 무구 소개 때보다 더욱 길게 이어졌다.
과연 그동안 당했던 게 서러웠는지 마법학부의 선배들은 악착같이 후배 피해자들의 증언들을 모아 왔다.
얼마나 치밀하고 열정적으로 모아 왔는지 양도 양이지만 증거의 디테일이 상당한 수준이었다.
황혼의 기사 생도들은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 앞에서 하나같이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루인의 말이 끝냈을 땐 거의 대부분의 생도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놈들이 기사라니. 정말 가관일 노릇이군.”
루인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난 수준.
“내 기준에서 하이베른의 후원을 받을 수 있는 생도는 지금의 너희들 중 아무도 없다.”
“아아…….”
이렇게 포기하기에는 이미 봐 버린 것이 너무 많았다.
하이베른가의 검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
거기에 무수한 명품 아티펙트들의 향연까지.
그때, 황혼의 기사 생도들이 갑자기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절규를 토해 냈다.
“저, 저희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제발 기회를 주십시오!”
기숙사로 돌아가던 루인이 물끄러미 뒤를 바라본다.
“내게 갱생을 보여라.”
“예?”
“……갱생이요?”
씨익.
“굳이 설명하진 않겠다. 기사로서 스스로 죄를 느끼며 갱생하라. 합당한 판단은 나중에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