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데오란츠 국왕의 갑작스러운 왕명은 하이베른의 기사들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이렇게 가볍게 이랬다저랬다 하기엔 왕의 말은 너무나 절대적이며 성결한 것.
“…….”
누구보다 당황하고 있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왕의 핸드 레페이온이었다.
그는 대전으로 오기 전 이미 데오란츠 국왕과 모든 협상을 끝마쳤다.
이제 저 이 빠진 사자를 징벌하는 일만 남았는데 갑자기 이게 다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대는 또 무슨 말로 날 구슬릴 생각인가?”
“폐, 폐하?”
“왕명에는 번복이 없으니 그대는 가타부타 토 달 생각을 말라.”
사고가 마비될 지경의 레페이온.
최근 일주일은 그야말로 최악의 나날들이었으나 적어도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국왕이 르마델을 대표하는 양 대공 가문 중 직접적으로 한 가문만을 두둔하게 만드는 일은 적잖은 정치적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일.
당연히 레페이온은 데오란츠 국왕에게 충분한 대가를 지불한 상황이었다.
그때, 루인이 나서며 절도 있게 다시 무릎을 꿇는다.
“왕명은 절대적이며 불변하는 것. 베른가는 충심으로 왕명을 받들겠사옵니다.”
르마델의 대전 안에 있는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루인에게로 모여든다.
그만큼 하이베른가의 대공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고아한 기운은 모든 귀족들을 집중하게 만들었다.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듣기 좋은 목소리.
정갈한 몸짓과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시선 처리.
특히나 그가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이번 기원제에서 드러난 그의 역량 때문일 것이다.
초인(超人)을 제압하는 마법사.
그 하나만으로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는 왕국의 귀족들을 충격과 경악의 소용돌이로 빠지게 만들었다.
기사가 아닌 초인의 등장.
그것도 사자검가 베른의 가문에서 등장한 절대적인 마법사.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벌써부터 새로운 영웅의 등장에 관한 찬미의 시들을 읊어 댔다.
물론 폐쇄적인 에어라인에서 발생한 사건이었기에 아직은 귀족들 사이의 소문이었다.
그러나 소문이란 바람보다 빠른 법.
결국은 왕국의 모든 백성들이 알게 될 것이다.
레페이온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백성들이 칭송하게 될 르마델의 새로운 영웅.
그것도 신비의 하이베른가.
백성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는 베른가의 새로운 영웅은 오히려 귀족가의 정치꾼들보다 더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게다가 그런 영웅이 마법밖에 모르는 우직한 성향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교활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저 대공자는 자신의 음모를 오히려 역이용했다.
가문을 조종하여 파네옴 광산을 먹어 치우고 대규모 유랑민을 모조리 영지민으로 받아들였다.
거기에 하이렌시아가의 은밀한 권속이나 마찬가지였던 세헬가와 다리오네가까지 베른가의 영향력 아래 귀속시켰다.
왕국의 깃발, 금린사자기를 지닌 천년 대공가에서 저런 엄청난 괴물이 나타난 것은 재앙이었다.
레페이온이 입술을 깨물며 냉정을 되새긴다.
일단 국왕의 태도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 더 큰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대전회의를 해산해야 했다.
“핸드 레페이온, 또 다른 의결 사안이 없다면 이만 대전회의를 해산할 것을 제안드리옵니다.”
한데, 데오란츠 국왕이 어느덧 묘하게 웃고 있었다.
“아니다. 대전에 여러 대신들이 모인 김에 그동안의 짐의 고민을 결정지어야겠군.”
고민?
대체 또 무슨 말을?
또다시 당황스러워하고 있는 레페이온을 향해 데오란츠 국왕의 청천병력과도 같은 선언이 이어진다.
“나 데오란츠 소 뮬란드 르마델은 왕국의 적법한 왕으로서 온 백성들에게 엄숙히 선언한다. 1왕자 아라혼 니소 르마델에게 ‘청룡의 정원’의 출입 권한을 부여한다. 그에게 왕가의 신성한 이름, 뮬란드를 미들네임으로 하사할 것이다.”
충격으로 굳어 버린 레페이온.
청룡의 정원은 왕의 적법한 후계자만이 출입이 가능한 정결한 곳.
또한 왕가의 상징, ‘뮬란드’를 미들네임으로 하사받았다는 것은 그에게 공작 이하의 작위 부여권, 즉 왕세자의 권한이 주어졌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레페이온은 정상적인 사고를 이어 갈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떨고 있었다.
“…….”
그런 레페이온만큼이나 놀란 사람은 왕좌의 옆, 예복을 차려입고 서 있던 1왕자 아라혼이었다.
그가 멍하니 데오란츠 국왕을 바라보다가 이내 루인을 향해 시선을 옮긴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아라혼의 시선과 얽히던 루인이 묘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그 순간 아라혼은 솟구치는 전율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느낀 것은 놀람보다는 공포였다.
도대체가 이게 뭐지?
<이 녀석의 역량은 제가 만들어 줄 작정입니다.>
녀석이 그 말을 한 지 이제 고작 사흘.
물론 지금까지 확인한 대공자의 역량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심 기대가 되면서도 어떻게 도와줄지 궁금하긴 했지만 이건 대체…….
아버지 데오란츠 국왕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왕세자 책봉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6왕자 케튜스 녀석만을 마음에 들어 하는 내심만 비추던 상황.
대신들과 귀족들의 여론 또한 데오란츠 국왕이 오랜 전통을 깨고 케튜스 왕자를 왕세자로 책봉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오늘, 모든 예상을 깨고 갑자기 자신을 왕세자로 책봉하다니?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모든 일에는 전조(前兆)가 있다.
특히나 왕국의 미래를 결정짓는 후계 구도의 정립은 모든 귀족과 대신들이 눈에 불을 켜고 살피려는 제1순위의 정보다.
이제 자신은 하이렌시아가가 6왕자 케튜스를 은밀하게 지지해 온 사실을 알고 있다.
그 말은 르마델의 귀족들 대부분이 케튜스를 지지하고 있다는 뜻.
한데 이번 일은 그런 모든 전조(前兆)를 무시하는, 그야말로 대이변과 같은 상황이었다.
아라혼이 다시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를 바라본다.
여전히 묘하게 웃고 있는 루인.
아버지의 이번 선언이 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한데 그 짧은 시간에 대체 무슨 방법으로 아버지를 움직였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전율적인 공포를 느꼈다.
저런 자와 만약 적이 되었다면?
하이렌시아가의 모든 역량을 합친 것보다 더 무서운 존재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가, 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왕세자 문제는 신중하셔야 하옵니다 폐하.”
저 교활하고 치밀한 왕의 핸드가 노골적으로 본심을 드러내며 흔들리고 있다.
왕세자 책봉을 확정한 국왕의 결정에 반기를 든다는 것은 이 아라혼과 정적이 되겠다는 확실한 선언.
결국 아라혼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저 루인을 확실하게 믿어 보기로 했다.
“1왕자 아라혼. 국왕 폐하의 담대한 결정에 엄숙히 따르겠나이다.”
흐뭇하게 웃는 데오란츠 국왕.
“좋다. 1왕자 아라혼은 앞으로 왕세자의 본분을 다하도록 하라.”
“예, 폐하.”
아라혼을 향해 저런 친근한 미소라니?
게다가 아예 핸드의 말조차 무시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같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대전의 대신들.
“폐, 폐하!”
그 순간.
데오란츠 국왕의 두 동공에서 자줏빛 귀화가 일렁이다 사라진다.
그러자 그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짐이…….”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 그의 얼굴엔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대체 이게 무슨…….”
데오란츠 국왕은 도저히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의 육체인데도 어떤 통제도 하지 못했다.
그저 느낀 것은 미지의 무언가, 전율적인 존재의 지배력이었다.
그 지극했던 공포심에 결국 데오란츠 국왕은 혼절하여 쓰러졌다.
“폐하!”
“폐하!”
비명 섞인 대신들의 외침이 이어졌을 때, 레페이온 대공이 쓰러지는 데오란츠 국왕을 황급히 부축했다.
“폐, 폐회를 선언한다!”
하이베른가의 가주, 카젠 대공이 멍하니 대공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어느덧 기숙사에 돌아온 루인.
-끄으으으으…….
연신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쟈이로벨을 향해 루인은 면박을 줬다.
“앞으로 어디 가서 마신이라고 하지 마라. 고작 그 정도로 무슨 엄살이 그렇게 심한 것이냐.”
-닥쳐라 개 같은 놈!
인간의 영혼을 숙주로 삼지 않고 일시적으로 통제권을 빼앗는 영혼제압(靈魂制壓)은 마신만이 가능한 권능의 일부였다.
허나 문제점은, 진마력이 아닌 마신의 순수한 영혼력, 즉 신마력(神魔力)이 소모된다는 점이었다.
이런 신마력은 그 위험한 마계에서도 오직 악신 발카시어리어스에게만 자유자재로 가능한 영역이었다.
오직 그만이 순수한 신마력을 활용하여 마계의 위험한 존재들을 굴복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쟈이로벨에게 있어서 신마력이란 아직 다루기 힘든, 미지의 영역에 존재하는 권능.
당연히 이런 초보적인 신마력을 함부로 투사하는 것은 마계에 있는 본체에 심각한 내적 타격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영혼력의 복구를 장담할 수 없다! 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모험을 감당해야 한단 말이냐……!
영혼이 지닌 의지는 순수하고 강력했으나 신마력은 그런 강고한 영혼을 잠시나마 잠식할 수 있는 권능을 부여한다.
초보적인 신마력을 활용하는 일은 그 길고 긴 마신 쟈이로벨의 생애 내에서도 세 번을 넘지 않았다.
그만큼 위험한 도박인 셈.
절대적인 존재의 영혼력, 신마력은 어떤 수련과 노력으로도 쌓을 수 없었다.
신마력의 고하를 결정짓는 것은 오직 ‘존재의 격(格)’.
이번 일로 쟈이로벨은 수만 년의 생애로 쌓은 그 ‘격’이 현저하게 하락했다.
그럼에도 루인은 쟈이로벨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조용해. 누군가 오고 있다.”
왕국에 자신의 역량을 드러낸 이후 루인은 일정 영역을 자신의 마도(魔道)로 레어화했다.
각종 탐지 마법과 알람 마법, 그리고 미세한 융합 마력을 주변에 떨쳐 마력권을 형성한 것이다.
이제 그 어떠한 어쌔신이나 초인조차도 루인의 레어에 들키지 않고 침범할 수는 없었다.
이는 전생에서 그가 평생 해 온 습관이었다.
“애들이군.”
익숙한 마나의 잔향에 피식 웃으며 안심하는 루인.
곧 반쯤 열린 문으로 시론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들어가도 되냐? 아니 됩니까……?”
“들어와.”
시론을 따라 세베론과 다프네, 리리아, 루이즈 등이 차례로 루인의 기숙사 안으로 들어왔다.
친구들이 초롱초롱 반짝이는 눈빛들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루인은 또 한 번 피식 웃어 버렸다.
“다들 많이 놀랐나 보군.”
놀란 정도인가.
에기오스 학부장마저 경악하게 만든 헤이로도스 술식, 그 절대적인 역량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런 루인의 역량이 초인마저 제압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지만.
하지만 그가 이 왕국의 기사들에게 있어서 신실한 종교와 같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라는 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기사 생도들이 모두 루인 님만 기다리고 있어요.”
루인이 창밖을 바라본다.
웃통을 벗고 우람한 근육을 드러낸 황혼의 기사 생도들이 죄다 마법 생도의 기숙사로 몰려들어 와 있었다.
“알고 있다.”
“만날 생각이야……? 아니 생각이십니까?”
루인이 계속 어색해하고 있는 시론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하던 대로 해라. 원칙적으로 아카데미에서 귀족 신분은 통용되지 않아.”
“그건…….”
물론 오직 실력으로만 우열을 가리는 아카데미의 특성상 그것은 원칙적이고 당연한 교칙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무용지물.
엄연히 아카데미에는 다양한 귀족가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었다.
“그렇게 해.”
시론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어색하겠지?”
“그래.”
무심한 표정의 리리아가 말했다.
“고맙다.”
흐뭇하게 웃는 루인.
“고통 속에서 많은 것을 느꼈을 테지.”
죽음의 위기를 겪은 인간은 많은 것이 달라진다.
그런 달라진 감정이 리리아의 표정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돈 좀 줘.”
“음?”
갑자기 돈이라니.
게다가 빌려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달라고?
“언니를 만나고 싶은데…… 마차로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공간 이동탑으로 다녀오고 싶다.”
귀족들에게도 공간 이동탑의 사용료는 상당히 부담된다.
그런 공간 이동진은 엄청난 사용료 때문에 군사적인 목적을 제외하면 사실상 평시에는 거의 활용되지 않는다.
츠츠츠츠츠-
즉시 헬라게아에서 금괴 하나를 꺼내 리리아에게 내미는 루인.
“다녀와라.”
수련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간절한 마음, 그녀의 그런 열정적인 마도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기에 루인은 금괴가 결코 아깝지 않았다.
“저 녀석들은 어떻게 할 거야?”
세베론의 질문에 루인이 웃었다.
“좀 더.”
“응?”
루인이 창틀에 기대 턱을 괴었다.
“저 녀석들의 몸이 달아오르려면 아직은 멀었지.”
호기심이 동한 다프네가 물었다.
“정말 저 무식한 황혼 녀석들을 후원할 생각이에요?”
씨익.
“후원? 하이베른가가 그리 만만해 보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