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24화 (124/187)

<124화>

계획했던 일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이제 루인은 아카데미에 복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카데미에 큰 미련을 둘 필요는 없었다.

헤이로도스의 술식을 얻은 이상 독자적인 연구와 끊임없는 수련만 남은 상황.

백마법의 기반이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에서 굳이 마탑의 지혜를 갈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한 대공자 신분이 드러난 이상 아카데미 생활이 불편할 게 너무 뻔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루인이 아카데미에 잠시 남고자 하는 것은 테아마라스의 유적을 탐험하는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전생의 세계에서는 테아마라스의 유적이 세상에 드러난 적이 없었다.

그 일은 오랫동안 인간의 역량을 약화시켜 온 악제의 음모와 절대 무관하지 않을 것이었다.

일그러진 역사를 직감적으로 느낀 루인은 반드시 테아마라스의 유적을 살피고 싶었다.

‘후…….’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기수 쟁탈전으로 자신의 역량이 온 왕국에 드러난 상황.

어찌 보면 오히려 좋았다.

원래는 적당히 간을 보며 무투대회에 임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자신의 마법과 무투술은 생도 단계에서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명 생도들 중에서도 포기하는 녀석들이 줄을 이을 테니 귀찮은 상황이 제법 줄어들 것이다.

이제 고려해야 할 것은 지금부터 자신에게 접근하는 자들의 면면이었다.

왕국의 부나방들은 언제나 힘과 권력을 좇는다.

왕국의 신비 하이베른가, 그것도 대공자가 이렇게 직접 왕국을 활보하고 다닌 적은 역사상 처음.

렌시아가의 음모에 의해 곤욕을 치렀거나 몰락한 귀족들은 발에 채일 정도로 많다.

하이베른가가 렌시아가를 상대해 준다면 가슴이 두근거릴 자들.

이제부터 그런 날개 찢긴 부나방들이 자신에게 수도 없이 몰려들 것이다.

그리고 그 틈에는.

‘악제…….’

자신에게도 악제의 욕망이 드리울 수 있다.

지금 단계의 악제는 세계의 인재를 모으며 힘을 기르고 있을 테니까.

군단장으로 키울 만한 존재들, 그 후보가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만약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무슨 선택을 해야만 할까.

‘…….’

대마도사의 치밀한 자아로도 이 일에 대해서는 쉽사리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가볍게 생각하면 악제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염(靑炎)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청염은 분노의 감정을 먹고 자라난다.

악제를 향한 증오로 가득한 자신에게는 위험 부담이 너무 큰 것이다.

자칫하다간 청염을 받아들인 그 즉시 곧바로 영혼이 집어삼켜질 수도 있었다.

그런 악제의 청염을 치유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서 성녀(聖女)가 유일하다.

그녀를 만나기 전엔 함부로 청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월켄을 가문에 가두려고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성녀만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월켄의 청염 역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절의 성녀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신은 아는 것이 없었다.

다른 초인들과는 달리 성녀는 한창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인간 진영에 스스로 찾아왔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에게도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말한 바가 없었다.

그래서 한때는 그녀를 악제의 군단장으로 의심한 적도 있었다.

성녀에 대해서 아는 것은 단 하나.

‘아르디아나.’

순백의 아르디아나, 그녀의 이름 하나뿐이었다.

세상 만물을 치유하는 힘을 지닌 초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는 그녀의 성결함은 인간 진영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녀가 없는 전쟁 수행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루인은 그런 성녀의 모든 것을 기억해 내려고 노력했다.

남부식 사투리가 깃든 공용어.

하지만 북부인의 새하얀 피부색.

불에 그을린 듯한 목덜미의 낙인.

‘……낙인?’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특정 교단의 의식의 흔적, 혹은 노예의 징표, 그것도 아니면 서부 왕국들의 잔인한 풍습의 일부.

일단 루인은 로자렐 교국과 케실리아 왕국, 그리고 서부의 몇몇 열국들을 조사 선상에 올렸다.

더 이상 추려 내려고 해도 정보가 너무 없었다. 조사 범위가 너무 광범위한 것이다.

‘제길.’

아무래도 이런 일은 소드 힐보다는 까마귀들에게 더욱 어울릴 것이다.

정보를 모으고 사람을 추적하는 데 있어서 까마귀들보다 뛰어난 존재들은 없었으니까.

결국 그 더러운 놈들과 또 손을 잡아야 하는 상황.

과거, 놈들에게 당했던 것을 떠올리니 또다시 뒷골이 당겨 왔다.

이번에는 철저히 그들의 우위에 설 생각이었다.

전생의 정보를 활용한다면 교활한 까마귀들도 숨을 헐떡이게 만들 수 있다. 그들은 어떤 자들보다 정보에 목말라한다.

그렇게 루인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그의 별관으로 데인이 찾아왔다.

“형님! 큰일 났습니다!”

나타나자마자 호들갑을 떠는 데인에게로 루인의 의문이 이어졌다.

“무슨 일이길래 그러는 것이냐.”

“국왕께서 저희 가문을 호출했습니다!”

“국왕……?”

순식간에 구겨진 루인의 얼굴.

설마하니 아직 기원제가 끝나지도 않은 시점에서 렌시아가가 움직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것도 무려 데오란츠 국왕까지 직접 동원해서.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느냐?”

“벌써 방문단을 꾸리고 계십니다.”

“가자.”

* * *

카젠이 말끔한 대공자의 예복으로 갈아입고 나타난 루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서 오거라. 대공자.”

“예. 아버지.”

루인이 진상품을 단장하고 있는 가솔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바로 검산의 인계부터 요구할 겁니다.”

“일단 조사단부터 파견하라고 시간을 끌 작정이다.”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가 대공가라고 해도 달리 막을 명분이 없다. 왕법보다 우선하는 건 없지 않느냐.”

“대공의 인을 제게 주십시오.”

미간을 구기는 카젠.

“이참에 아예 네 녀석이 가주를 하지 그러느냐?”

“그것도 괜찮은 거 같습니다.”

“……뭐라?”

카젠은 기분이 묘했다.

갑자기 태도를 바꾼 대공자가 반가우면서도 틈만 나면 사자왕의 자존감을 긁어 오는 녀석의 행동에 자꾸만 호승심이 치미는 것.

“이 아비가 그리도 미덥지 못한 것이냐?”

“사자왕의 검(劒)은 드높습니다.”

“음?”

“하지만 이건 정치이지 않습니까.”

자꾸만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대공자의 맹랑함에 기가 찼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허락할 수 없었다.

“네 역량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는 데오란츠 국왕. 그는 널 상대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으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의 자신은 대마도사가 아니라 어린 소년의 몸이니까.

하지만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루인이 조심스럽게 쟈이로벨의 눈치를 살폈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역시 마신이라는 건가.

눈치 하나는 정말 귀신같다.

일단 그전에 아버지부터 단속해야 했다.

“데오란츠 국왕이 괴상한 말을 해도 당황하거나 동요하지 마십시오.”

“괴상한 말? 그가 또 무슨 강짜를 부릴 것 같으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온 루인.

자신의 서찰을 보기 전까진 왕실을 향한 아버지의 충성심은 맹목적인 것이었다.

한데 지금은 말투부터 행동까지 적개심으로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이베른가를 약화시키기 위해 왕실이 직접 수백 년간 그런 짓을 해 온 사실을 알아 버렸으니.

“그런 게 있습니다.”

그렇게 제 할 말만 하고 임시 대공저를 빠져나가 버린 루인.

카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아무래도 우리가 성급했던 거 같구나, 데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네 형이 저렇게 막 나가기 시작하는데 네 녀석은 걱정도 되지 않는단 말이냐?”

데인이 웃었다.

“왜 그러세요. 걱정도 하지 않으시면서.”

데인이 형을 뒤쫓았다.

“좋으면 그냥 좋다고 하세요.”

“시끄럽다.”

사자왕은 두 아들이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 * *

루인은 담담하게 왕국의 대전을 훑고 있었다.

시야가 닿는 모든 곳에서 가공된 에메랄드들이 반짝였다.

이 화려한 에메랄드 보석들만 처분해도 왕국의 재정은 몇 년간 거뜬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천 년의 역사를 지닌 왕국답게 모든 것이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폐허가 아닌 르마델 왕국의 멀쩡한 면모를 살피는 건 이번이 처음.

알칸 제국만 아니었다면, 르마델은 일찍이 북부의 왕국들을 통합하고 제국으로 나아갈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을 지닌 국가였다.

‘저자가…….’

루인은 청록빛 기다란 가운(Gown)을 늘어뜨린 채 고아하게 입장하고 있는 데오란츠 국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과연 국왕은 국왕이었다.

세상의 중심은 이곳이라고 말하는 듯한 추상같은 기운이 그에게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의 눈길이 이곳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묘한 긴장감으로 힘이 들어갔다.

가히 세계를 멎게 할 만한 기백과 분위기였다.

‘…….’

루인은 저런 엄청난 자가 사람의 인성이 의심될 정도의 변태 성욕자라는 것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전생에서 역사적으로 드러난 사실.

“베른가의 대공, 금린사자기의 기수, 카젠이 폐하를 배알하나이다.”

카젠이 국왕에게 예를 다하자, 하이베른가의 모든 기사들이 함께 몸을 숙였다.

그때.

“하이렌시아가의 대공, 왕국의 핸드, 레페이온 대공께서 입장하십니다.”

카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떤 귀족도 감히 국왕 앞에서는 하이(High)로 자신을 드높일 수 없다. 한데도 저 바람잡이 놈은 감히 하이렌시아 운운한 것이다.

그러나 국왕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이런 상황이 이미 왕실의 일상이라는 뜻.

땅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

그 참담한 현실에 카젠은 자신이 얼마나 왕국의 사정에 무심했는지를 절절히 깨닫고 있었다.

대전에 입장한 레페이온은 곧장 데오란츠 국왕의 우편에 나란히 섰다.

국왕과 같은 시선으로 대신을 바라볼 수 있는 건 왕의 핸드뿐이었다.

“카젠 대공.”

국왕의 부름에 그제야 카젠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예. 국왕 폐하.”

“렌시아가의 기사를 구금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인사치레 하나 없이 곧장 의도부터 드러내고 있는 데오란츠 국왕의 태도에, 카젠은 말할 수 없는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이옵니다.”

데오란츠 국왕이 무료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베른가는 렌시아가의 기사를 석방하라.”

카젠의 눈빛이 불꽃처럼 이글거린다.

하이베른가의 사정을 묻는 과정조차 없다. 왕실 조사관을 받아들이라는 것도 아니었다.

대공가의 체면과 위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왕의 즉각적인 요구.

마치 일개 기사를 다루는 듯한 왕의 행동이었다.

금린사자기를 쥔 카젠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기원제의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을 무참하게 살해하려고 했던 르마델의 죄인입니다.”

데오란츠 국왕이 청룡의 상징, 왕의 셉터(Sceptre)를 바닥에 내리찍는다.

“그가 알칸 제국의 기사라고 들었다. 그러므로 르마델의 왕법으로 그를 구금할 수 없다. 또한―”

“…….”

“짐의 영토 안에서 그에게 왕법을 묻지 않는 치외 법권의 권리를 허락할 것이다.”

카젠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아무런 공도 세우지 않은 타국의 기사에게 사면권(赦免權)을 허락하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그렇다.”

사면권은 왕이 행사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권력.

도를 넘은 국왕의 태도에 이글거리는 카젠의 눈빛이 금방 레페이온을 향해 짓쳐 들었다.

그런데 그때.

어느덧 일어난 루인이 데오란츠 국왕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점점 루인의 입매가 기이한 각도로 비틀리며 미소를 그려 낸다.

인류 연합의 대마도사, 흑암의 공포가 사기였던 진정한 이유는 끝도 없는 부활도 전율적인 흑마법도 아니었다.

세계의 공포였던 대마도사.

그의 진정한 힘은…….

츠츠츠츠-

데오란츠 국왕의 동공에 자줏빛 귀화가 잠시 이글거리다 사라진다.

그가 갑자기 카젠을 바라보았다.

“방금 말은 취소다. 농담이었느니라, 하하하!”

응?

그의 곁에서 황당해하는 레페이온.

“아무런 공도 없는 타국의 기사인데 짐이 어찌 사면권을 허락할 수 있느냐.”

“폐, 폐하?”

“베른가가 구금했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터. 핸드는 더 이상 짐을 귀찮게 하지 말고 기원제나 잘 마무리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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