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월켄은 스승으로부터 독립한 지 이제 2년째였다.
천재답게 그는 꽤 많은 사람들을 기억해 냈다.
대충 추려 낸 인원은 230여 명.
하지만 월켄은 확신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전부 기억해 낸 것은 아닐 거다. 분명 빠진 사람이…….”
세계를 멸망으로 이끌었던 악의의 씨앗, 청염이 자신에게 덧씌워진 일은 그로서도 큰 충격.
루인은 그가 기억을 더듬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했는지를 모두 지켜보았다.
“됐다. 충분해.”
루인은 곧장 받아 적은 명단을 섬세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의식을 깊게 드리운다.
정보들을 체계적으로 분화한다.
의미 없이 배제하거나 허투루 솎아 내지 않는다.
끝없는 추론과 가정, 변수 검증을 통해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결과를 반복한다.
역시 루인의 1차적인 대분류는 렌시아가의 인물들과 그 외의 사람들이었다.
월켄이 기억해 낸 230여 명 중에서 근 100여 명이 렌시아가의 직계와 방계 쪽 인물들.
그것이 가장 의미 있는 특징이었고 두 번째로 특이한 것은.
“이 렌시아가의 기사 말이지.”
“……기사? 누구를 말하는 거냐?”
“듀웰로.”
“아! 듀웰로!”
“그래. 그에 대해서 좀 자세히 말해 봐.”
듀웰로라는 인물이 다른 모든 이들에 비해 특이한 것은 그의 출현 시기가 월켄과 똑같다는 점이었다.
루인은 이미 렌시아가의 모든 직계와 방계, 봉신가들의 가계도, 또한 기사 명부를 모두 외우고 온 상태.
한데 듀웰로라는 기사는 그런 가계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똑똑하고 괜찮은 사람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뭐랄까. 검밖에 모르는 내게 세상을 가르쳐 주고 싶어 하는 그런 느낌이랄까? 비록 검술은 별로였지만 친한 형님으로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루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세상에 나와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너와 가장 친하다고 볼 수 있나?”
“그렇지.”
그렇게 루인은 듀웰로라는 이름을 마음속에 각인했다.
렌시아가의 가계도와 기사 명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했으니까.
그런데 그때.
끼이이익-
갑작스레 임시 감옥의 문이 열린다.
임시이긴 했으나 이 장소는 아버지와 데인, 그리고 루이즈만이 알고 있는 비밀 공간.
루인이 수인을 맺으며 융합 마력을 뻗었을 때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세. 루인 대공자.”
익숙한 초인의 기도.
그는 다름 아닌 루인이 가문에서 맞닥뜨렸던 소드 힐의 노인이었다.
무심한 얼굴로 수인을 회수하는 루인.
“난 이런 식의 등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이해하게. 소드 힐은 대외적으로 드러날 수 없으니.”
소드 힐의 노인이 철창 안으로 들어온다.
초인은 초인을 알아보는 법.
소드 힐의 노인에게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세에 검성 월켄은 경악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투기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전율이 끊이지가 않는다.
상상할 수 없는 투기의 밀도.
마치 하나의 검처럼 느껴지는 날카롭게 벼려진 기운.
월켄은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상위의 경지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직접 검을 맞댄다면 일검도 견디지 못하고 패배할 것이다.
“그리 놀랄 것 없네. 나는 오히려 자네가 더 놀라우니까.”
이제 고작 서른 남짓.
그런 나이에 초인이라니 왕국에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발전하며 강해질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후배였다.
흐뭇하게 월켄을 바라보던 노인이 다시 루인을 응시한다.
“우릴 만나고 싶어 했다고 들었네.”
“고개 아프니까 일단 앉아.”
“그러지.”
담담한 표정으로 밀짚이 깔린 바닥에 앉는 노인.
“소환 운운했던 건 사실이 아니어야만 할 것이네. 우리 은퇴자들을 끌어내기 위한 밑밥으로 믿고 있겠네.”
씨익.
“아니라면?”
한숨을 내쉬는 노인.
“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미 모든 오해가 풀린 상황에서 루인은 이들에게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왕국의 수호자 집단이니 그 나름의 사정이 있게 마련. 루인은 굳이 따지고 싶지 않았다.
“자넨 정말 놀라운 마법을 구사하더군.”
“마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나?”
노인이 쓰게 웃는다.
“세이지 늙은이들의 동요가 꽤 심각하네. 헤이로도스의 술식이라던가?”
시전 시간을 무시하는 염동 마법.
기사의 검을 상대하는 그 가공할 장면은 은퇴한 마법사 집단 옴니션스 세이지(Omniscience Sage)들에게도 충격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사담은 이쯤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우릴 만나자고 한 이유는 뭔가?”
“소드 힐이 수집하고 있는 모든 정보의 공유를 요청한다.”
“정보……?”
하이베른이 렌시아가에게 열세일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정보의 부재였다.
하이베른에는 제대로 된 정보 조직이 없었다. 반면 렌시아가는 왕국의 곳곳에 자신들의 눈을 드리우고 있었다.
“특히 렌시아가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암투와 음모, 알력 관계 등을 살피고 싶다. 주변 왕국의 정세나 알칸 제국에 관한 정보도 좋다.”
“불가, 불가하네. 소드 힐의 정보는 외부로 반출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네.”
소드 힐은 왕국의 존망을 암중으로 살피는 수호자 집단이다.
당연히 다루는 정보 역시 극히 제한적인 비밀들을 다룬다.
루인이 대공자를 그만두지 않는 이상 그는 세상과 얽혀 있는 존재.
아직은 욕망으로 살아가는 자에게 함부로 왕국의 은밀한 정보들을 쥐여 줄 순 없었다.
그것은 그가 왕족이라고 해도 마찬가지.
“거래와 협상 쪽이 편한가 보군.”
“그 일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네.”
“데오란츠 국왕의 암살을 막을 수 있는데도?”
“구, 국왕 폐하의 암살……?”
루인이 웃었다.
“지금의 왕비께서도 대역이잖나?”
“뭣!”
르마델 왕가는 라슈티아나 왕비의 죽음은 절대로 세상에 공표할 수가 없다.
과거에도 그랬으니 별다른 이변이 없는 이상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녀의 죽음을 외부에 알렸다간 르마델 왕국은 또 전란에 휩싸인다. 알칸 제국의 황제가 딸의 죽음을 용납할 리 없을 테니까.
공주를 지키지 못했다는 명분으로 제국이 움직인다면 남부의 열국(列國)들도 모두 동요할 것이다.
침략의 단초.
이 명분을 알칸 제국이 놓칠 리가 없었다.
“대체 그 사실을 그대가 어떻게…….”
라슈티아나 왕비가 대역이라는 사실은 놀랍게도 국왕 데오란츠도 모르고 있는 비밀.
왕비와 함께 살을 부대끼며 사는 남편조차 모르는 비밀일진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가 알고 있다니?
소드 힐이 뒤집어질 일이었다.
“그 대역 왕비. 그녀도 조심해야 할 거야. 조만간 자진(自盡)할 예정이거든.”
“자, 자진?”
언젠가 왕실의 연회장에 참여한 모든 귀족들이 보게 될 것이다.
위험한 난간에 목이 매달린, 대역 왕비의 처참한 죽음을.
그 일을 기점으로 이 르마델 왕국은 완벽하게 파멸의 길에 빠지게 된다.
어머니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1왕자 아라혼은 그때부터 진정한 괴물이 될 테니까.
물론 루인은 그런 처참한 역사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대의를 좇는 당신 같은 자들은 항상 간과하는 게 하나 있지. 그런 대의 앞에 모든 개인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것.”
“…….”
“인간의 역사는 항상 그런 파멸의 쳇바퀴였지. 참 이상해. 그 역사의 잔인한 수레바퀴를 겪고도 왜 인간은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조, 좀 더 자세히 말해 보게!”
이렇게까지 말해 줬음에도 본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못한다.
지금 이 노인의 머릿속에는 왕국의 존망 외에 그 어떤 것도 가치가 될 순 없었다.
대역 왕비의 불행한 삶을, 그 기구한 여인의 인생을 살펴볼 측은지심조차 잊어버린 것이다.
인간의 신념이란 것은 이래서 무섭다.
왕국의 안위라는 대의, 그 뒤틀린 정의 (正義)가 저 노인의 모든 것을 병들게 한 것.
루인은 그런 노인이 측은하여 쓰게 입맛을 다셨다.
“인간에겐 견딜 수 있는 한계란 것이 있다. 그대들이 대역 왕비에게 무엇을 강요하고 있는지를 잘 생각해 봐라.”
“…….”
이 정도면 충분했다.
루인은 더는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노인의 시선을 외면했다.
“……국왕 폐하의 암살은 무슨 뜻인가?”
여전히 시선을 외면하고 있는 채로 차갑게 말하는 루인.
“말했다시피 거래다. 협상하기 싫다면 꺼져라.”
복잡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노인.
이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는 대역 왕비의 정체까지 알고 있다.
그런 그의 입에서 거론된 ‘국왕 암살’이었기에 함부로 재단할 수가 없었다.
마냥 넘길 수 없는 말.
“미치겠군.”
저 아무 감정 없는 얼굴을 보아하니 애초에 자신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예상하고 있다는 표정이다.
왕국의 숨은 초인으로 살며 무수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이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만큼 오묘한 느낌의 존재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다.
“……받아들이겠네.”
루인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까 요구했던 정보와는 별도로, 왕실 조사관들의 명단과 신상, 그리고 그들 개개인의 성격, 인생관, 평소 행실, 재산 형성 과정, 은원 관계 등의 종합적인 정보부터 넘겨라.”
“너, 너무 방대하네.”
“시간이 걸려도 좋다. 임시 정원, 아니 아카데미 기숙사로 가져와.”
“암살 건에 대한 정보는…….”
“내게 쥐여질 정보의 질을 가늠하고 판단하겠다.”
“그런 경우가 어딨단 말인가!”
꾸르르릉!
초인의 압도적인 투기가 감옥 전체에 울려 퍼진다.
그러나 루인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어이가 없군. 은밀함이 생명이라더니.”
순간적으로 초인의 힘을 드러낼 정도로 노인은 이성을 잃고 있었다.
왕국의 수호자, 위대한 소드 힐이 고작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따위에게 일방적으로 끌려다니기만 하니 열불이 터져 버린 것이다.
루인이 소드 힐의 정보를 손에 쥐고도 입을 싹 닦아 버린다면 마땅히 대응할 방법이 없는 것.
노인은 여기서 물러날 수가 없었다.
“그대도 르마델의 대귀족이다! 왕실의 안위를 살필 의무를 지닌 기사다!”
“왕실을 지켜?”
어이가 없었다.
왕국의 숨은 수호자 집단이다.
그런 자들이라면 왕실이 지난 수백 년간 하이베른가의 공작령에 무슨 짓을 해 왔는지를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군주와 신하 사이에 지켰어야 할 신의성실의 의무는 오래전에 무의미해졌다.
먼저 신의를 저버린 건 르마델 왕실 쪽.
“왕실이 본 가에 뭘 요구할 입장은 아닐 텐데. 저지른 일이 있는데 말이지.”
잠시 동요하는 듯하다가도 소드 힐의 노인은 결코 굽히지 않았다.
“뭐라도 좋네! 제발 그 끔찍한 일을 막을 수 있게만 해 주게!”
한숨을 내쉬는 루인.
“후…… 좋아.”
노인의 두 눈에 열광이 서리자 루인이 언급하기도 싫은 듯 표정을 찌푸렸다.
“국왕에게 그 추악한 짓을 그만두라고 해라.”
“그, 그게 무슨…….”
“알잖나? 꼭 내 입으로 이야기해야 하나?”
“아, 아니…….”
극도로 당황해하고 있는 노인.
루인이 아예 되돌아 앉으며 말했다.
“아직도 국왕을 죽일 만한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나?”
“누구……?”
데오란츠 국왕의 은밀한 치부.
지금의 대역 왕비는 그의 변태적인 성욕을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었다.
“그대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바보로군.”
“…….”
“설마 국왕의 그런 고약한 취향까지 왕으로서 존중하고 추앙하는 건 아니겠지?”
드디어 깨달은 듯 가늘게 몸을 떨고 있는 소드 힐의 노인.
“그렇다는 건 대역 왕비가……?”
루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 조소를 머금었다.
“말했잖아.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다고. 막다른 길에 몰린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르마델 국왕을 암살하는 자는 바로 대역 왕비.
과거의 그날, 1왕자 아라혼은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를 잃었다.
마침내 그의 갈 길 없는 복수심이 향한 곳은 아버지의 모든 것이었던 르마델 왕국 그 자체였다.
소드 힐의 노인이 유령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