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철창 속의 월켄은 애써 상황을 묻지도 빠져나오려고 하지도 않았다.
끊임없는 상념으로 얽히는 그의 눈빛.
루인은 그런 월켄의 머릿속이 지금 무엇으로 꽉 차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자신과의 대결을 복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내 루인이 철창 밖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그제야 월켄이 루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지막에 그건 대체 뭐였지……?”
아직도 경악스러웠던 당시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 월켄의 얼굴에는 온갖 의문으로 얼룩져 있었다.
마신의 정신 통제 마법 메아트마(ѩѯѯѹ)가 녹아 있는 루인의 소울 컨퓨전은 현자의 초월적인 정신 방벽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아직 마법에 대한 조예가 전무한 월켄으로서는 그저 아득한 재앙처럼 느껴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건 영혼의 의지, 인간의 자아가 투영된 정신 마법이에요. 정신계를 특별한 방법으로 수련하지 않는 이상 막을 방법은 없어요.>
루인이 월켄을 만나는 자리에 루이즈를 데리고 온 것은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그냥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았기 때문.
흑암의 공포.
적요하는 마법사.
그리고 위대한 검성(劒聖).
인간 진영을 이끌던 영웅들은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으며 긴 침묵을 이어 가고 있었다.
상념에 상념을 이어 갔으나 월켄은 결국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런 게 마법이라면…… 방법이 없겠군.”
현재 자신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소울 컨퓨전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월켄의 결론이었다.
검(劒)으로써 상대하지 못할 것은 없다고 믿어 온 검사의 삶이었다.
완성하기만 한다면 세상조차 상대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월켄에게 너무나 갑작스럽게 닥친 벽.
월켄은 마치 자연재해처럼 자신에게 닥친 인간을 다시 지독하게 응시했다.
“정신 마법이 그런 거라면 애초부터 기사는 마법사를 이길 수 없는 거냐?”
이어진 루인의 무심한 대답.
“마력은 마법사의 직관과 감각에 의존하지만 기사는 투기를 다루는 데 정신을 이용하지. 그러므로 정신을 수양하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기사가 더 유리한 측면이 있다.”
“기사의 정신……?”
“넌 아직 초인의 벽에 다다르지 못했다. 때가 되면 자연스레 정신 마법을 상대할 방법을 깨닫게 될 테니 조급해하지 마라.”
월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눈앞의 소년은 자신에 비해 적어도 열 살은 어려 보였으니까.
“그 말은 너는 초인의 벽을 돌파했다는 뜻이냐?”
“그랬지.”
“그랬지?”
루인의 묘한 과거형 어감에 월켄은 더욱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저도 루인 님에게 정신계를 다루는 법을 배우는 중이에요. 당신은 기사지만 정신계를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을 거예요. 함께 배워 보실래요?>
지금 루이즈의 간절한 목표 역시 정신 침투를 견디는 정신 방벽이었다.
같은 길을 헤매는 동지를 만났으니 그녀도 왠지 반가운 마음이 든 것이다.
그런 루이즈의 말에 월켄의 얼굴에 묘한 감정이 서렸다. 경계심과 반가운 마음이 공존하는 기이한 표정이었다.
“네 마법을 가르쳐 준다고?”
월켄의 검술 유파는 지극히 폐쇄적인 일인전승의 유파.
검술의 유출을 조심하라는 스승의 당부를 온 마음에 새기며 자라 온 월켄이었다.
그로서는 저렇게 쉽게 자신의 지혜를 베풀겠다는 루이즈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네. 루인 님만 허락한다면요.>
월켄이 다시 복잡한 표정으로 루인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루인.
“공존이 힘든 기사와 마법사가 사이좋게 공부를 하겠다는데 굳이 말릴 이유는 없다.”
월켄의 환해진 표정.
“그럼 지금 당장 가르쳐 줘!”
“나중에. 지금은 네게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
우우우웅-
루인이 염동력을 일으키며 허공에 수인을 맺자, 시야 교란 마법과 침묵의 술식이 사방으로 얽혔다.
루이즈가 그런 루인의 의도를 곧바로 읽어 냈다.
<전 이만 돌아가겠어요. 초인 기사님, 나중에 봐요.>
“아니! 가르쳐 준다고 해 놓고 갑자기 어디를!”
그렇게 루이즈가 임시 감옥을 떠나자 루인이 수인을 걷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월켄.”
이곳으로 오기 전 루인은 모든 각오를 끝냈다.
평범한 방식으로는 결코 월켄을 구할 수 없었다.
악제의 청염(靑炎)을 반드시 제거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일은 엄청난 위험 부담을 져야만 하는 일이었다.
진실이 아닌 거짓으로, 자신을 숨기는 방식으로는 절대로 월켄을 설득할 수가 없었다.
월켄의 흔들리는 동공.
자신을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루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초인 기사, 혹은 검산으로만 불려 왔다.
스승님 외에는 부르는 사람이 없었던 자신의 이름을 이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라는 녀석은 매번 허물없이 부르고 있었다.
한데 듣기에 좋았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그러고 보니 기수 쟁탈전 당시, 녀석이 했던 모든 말들이 불가사의투성이였다.
“아직 완성하지 못한 나의 캘러미티 블레이즈를 너는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지?”
순간, 루인의 강렬해지는 눈빛.
“나는 너의 미래를 아는 자다.”
“뭐?”
월켄은 당황했지만 그런 존재를 들어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점성술사나 예언자란 말이냐?”
“아니.”
끼이이익-
루인이 열쇠 꾸러미로 철창을 열더니 월켄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어진 루인의 말에 월켄의 얼굴이 점점 더 경악으로 얼룩졌다.
“네 검술은 총 8식으로 나뉘지. 소드 브링어(Sword Bringer), 소드 스파이럴(Sword Spiral), 소드 서큘러 콘(Sword Circular Cone), 소드 스톰 라이저(Sword Storm Riser)의 전(前) 4식.”
“…….”
“캘러미티 라인(Calamity Line), 캘러미티 웨이브(Calamity wave), 캘러미티 블레이즈(Calamity Blaze), 그리고 미래에 완성될 네 궁극의 경지인 캘러미티 카오스(Calamity Chaos)의 후(後) 4식.”
“…….”
“투기의 명칭은 혼돈의 오러. 네 검술 유파는 그 옛날의 대륙을 제패한 패왕 바스더로부터 이어진 궁극의 검술.”
“…….”
“네 유파가 일인전승의 비밀 유파인 이유는 아직도 알칸 제국이 패왕 바스더의 잔당과 후손들을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기 때문이지. 모조리 씨를 말리기 위해.”
“…….”
“그래서 넌 알칸 제국을 증오한다. 그때의 너도 알칸 제국의 기사가 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순간적으로 월켄의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네놈! 감히 네 뒷조사를……!”
“뒷조사?”
경악한 월켄의 시선을 담담히 마주 바라보던 루인이 손짓으로 그의 가슴을 가리켰다.
“넌 언제나 가슴에 슈톨렌 인형을 품고 다닌다.”
“뭐……?”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여동생의 슈톨렌 인형. 가족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
월켄의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지금도 알칸 제국은 악착같이 바스더의 후예들을 추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잊힌 제국의 검술, 패왕 바스더의 흔적 따위는 까마귀들을 동원하면 추적이 불가능한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슈톨렌 인형은 달랐다.
그건 스승에게도 말하지 않은, 오로지 자신만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
“어떻게 네가…….”
자신의 미래를 아는 자라니.
그런 게 정말 가능하단 소린가?
“월켄, 너는…….”
루인은 앞으로 그가 겪게 될, 미래의 모든 일들을 담담히 말해 주었다.
악제의 존재.
자신들이 싸워 온 세월.
잃게 될 동료들과 세계의 최후까지.
루인은 단 하나도 더하거나 빼지 않고 그에게 모든 것을 전했다.
월켄의 상상도 할 수 없다는 표정.
도저히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듯, 그의 얼굴은 온갖 혼란으로 얼룩져 있었다.
“어떻게 그런 존재가…… 그런 처참한 일들이…….”
마치 인류의 역사에 존재해 온 모든 파멸들을 합쳐 놓은 듯한 참혹한 미래.
한데, 그 모든 과정을 설명하는 루인의 태도가 뭔가 묘하다.
그것은 그의 감정.
마치 직접 관찰이라도 한 듯, 너무나도 생생하고 절절한 마음이 그에게서 느껴진다.
그런 월켄의 직감은 금방 루인의 입을 통해 증명되었다.
“그래. 네 미래의 동료, 흑암의 공포가 나다.”
“흑암의 공포……?”
루인의 이야기 속, 자신의 가장 절친한 동료 흑암의 공포가 이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라니?
월켄은 헛웃음이 일어났다.
“그럼 뭐 예언자 같은 것이 아니라 너는 미래에서 되돌아오기라도 했단 말이냐?”
“그렇다.”
“미친!”
우주의 섭리를 부정하는 말.
월켄은 비록 경험이 부족했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난 끝까지 살아남아 너희들의 영혼을 담보로 마계의 절대적인 악신과 도박을 벌였다. 마침내 그의 절대주문, 시간 회귀 술식을 얻었지. 그러나 내 경지로는 펼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쟈이로벨이―”
“흥! 그토록 무수한 초인들이 죽고 검성이라 불린 나마저 죽었는데 넌 무슨 수로 살아남아 도박을 했다는 거지?”
루인이 말한 자신이 이룩하게 될 경지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런 경지로도 상대할 수 없는 적이 존재한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데, 그런 자신조차 죽었고 모든 초인들도 절망으로 생을 마감했다는데 이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만 살아남았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이어진 감정 없는 루인의 대답.
“난 죽지 않는다.”
말할 수 없는 공허가 느껴지는 간결한 한마디.
모두에게 남겨진 자, 동료의 소원을 등에 이고 있는 자의 삶의 무게가 한동안 월켄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어떻게 죽지 않는 인간이…….”
그 순간.
푸욱-
뭐라 말할 새도 없이 갑자기 자신의 가슴에 단검을 박아 넣은 루인이 천천히 기울어 간다.
갑작스레 일어난 참변에 월켄이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그런데.
<이, 이런 미친놈을 보았나! 고작 옛 동료를 설득하기 위해 이 쟈이로벨의 고귀한 진마력을 소모하게 만들다니!>
자줏빛 귀화로 너울거리는 미지의 존재.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괴한 표정을 하고 있는 마신 쟈이로벨, 당연히 월켄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츠츠츠츠츠-
마신의 절대적인 진마력이 세계와 어지럽게 섞이기 시작한다.
진마력, 흑암이 너울거린다.
이어 루인의 육체로 시커먼 암흑이 스며든다.
스윽.
다시 일어나 앉은 루인은 역시 별다른 감정 없는 얼굴이었다.
곧 그가 자신의 육체에 얽힌 흑암의 기운을 떨쳐 내더니 생도복의 상의를 풀어 헤쳐 가슴을 드러냈다.
“난 죽지 않는다.”
“…….”
<개 같은 놈……!>
지난 몇 달 동안 겨우 회복한 진마력이 모조리 털려 버리자, 쟈이로벨은 그 분노를 여실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떨고 있었다.
또다시 긴 시간 동안 진마력을 회복해야 했기에 하는 수 없이 쟈이로벨은 루인의 영혼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츠츠츠츠츠-
루인의 머릿속으로 자줏빛 귀화가 모두 스며들자.
“……어째서 이런 비밀을 모두 드러내는 거지?”
혼란과 충격을 넘어선 현실.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월켄에게로 루인의 음울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청염(靑炎). 악제의 권능. 그 씨앗을 지금 네가 품고 있다.”
“뭐, 뭐라고?”
루인이 말했던 청염.
악제의 군단장들에게 주어진 전율적인 권능, 그 엄청난 악의를 자신이 품고 있다니?
말했던 대로라면 오히려 자신은 그들을 상대하는 영웅이 아니던가?
“다행히 아직 미완성의 청염이다.”
“……완성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루인의 섬뜩한 눈빛.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자유 의지가 사라진다. 지금도 점점 사라져 가고 있지. 그리고 결국엔―”
“…….”
“영혼 귀속, 네 육체는 그의 영혼과 감정 아래 귀속된다.”
월켄, 검성이 굳어졌다.
“그럼 내가…….”
“그래. 육체는 남겠으나 네 정신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루인의 두 눈에서 처참한 증오가 흘러내렸다.
“네가 산속에서 나와 만났던 사람들. 한 명도 빠짐없이 내게 모두 말해라. 기준은 너와 한 번이라도 대화를 한 사람이다.”
“너, 너무 많아.”
월켄의 어깨를 잡는 루인.
“모두 기억해 내야 한다, 월켄. 그중에 반드시 악제(惡帝)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