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사자정원의 임시 대공저 안.
카젠은 절도 있는 예법으로 대공의 인장을 바쳐 오는 루인을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한쪽으로 꿇은 무릎.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
이제는 도저히 자신의 아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기수 쟁탈전에서의 루인은 대공의 인을 빌려 잠시 권한을 행사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완벽한 대공, 아니 루인에게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대공가에 속한 기사들의 마음을 들끓게 만드는 어떤 미지의 힘.
그것은 베른의 이름 아래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가슴 벅차게 만드는 사자의 포효였다.
불의를 징치하는 심판관이자 누구보다 용맹한 기사였으며 백성들을 아우르는 진정한 군주였다.
이번 기수 쟁탈전으로 루인은 많은 것을 얻었다.
봉신가와 방계 기사들의 마음을 훔쳤고 렌시아가의 음모를 분쇄했다.
상식을 넘어서는 마법의 위상을 통해 아카데미를 장악했으며 시민들의 마음까지 얻어 냈다.
특히 초인과의 치열한 전투 중에도 시민들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며 고군분투했던 루인의 모습은 군주 그 자체였다.
대공자로서의 위상을 세우는 수준을 넘어선, 그야말로 모든 것을 얻어 낸 루인.
이 모든 것이 정녕 소년에 불과한 대공자의 나이에 가능한 일일까?
모든 것이 불가사의.
한사코 대공자의 직위를 거절했던 루인의 지난 과거를 생각하면 이건 명백히 달라진 루인의 태도였다.
녀석은 확실히 마음을 먹은 것이다.
대공자를 거부하지 않기로.
그리고 끝내 뜻을 세운 그의 거침없는 행보는 그야말로 전율이었다.
“아버지, 우리 형님 다리 저리겠습니다.”
잔잔히 웃고 있는 데인.
나직이 한숨을 내쉬던 카젠이 대공의 인을 받아 들었다.
대공자의 예를 풀며 일어난 루인이 자리에 앉았다.
“렌시아가의 대전사, 검산이라는 자는 왜 구금한 것이냐.”
“밝힌 그대로입니다. 놈은 르마델의 적성국, 알칸 제국의 초인입니다. 그런 자를 가문의 대전사로, 또 에어라인에 들인 것은 중죄라 할 만하지요.”
“내가 널 모르느냐? 그런 건 부차적이고 표면적인 이유겠지. 이 아비에게까지 숨길 작정인 것이냐?”
표정을 굳히는 루인.
“초인입니다. 그런 뛰어난 기사를 계속 렌시아가에 둘 수 없습니다.”
카젠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허나 방식이 너무 강짜였다. 레페이온이 그만한 초인을 영입했다면 출혈이 막심했을 터. 지금이야 금린사자기의 권위 때문에 잠시 물러났을 뿐, 조만간 반드시 발톱을 드러낼 것이다.”
루인은 아버지의 예상이 궁금했다.
“어떤 방식으로 말입니까?”
“뻔하지 않느냐. 틀림없이 왕실의 권위를 빌릴 것이다. 왕실의 조사관들이 직접 조사하겠다고 설치겠지. 그렇게 나오면 우리로선 달리 왕실에 인계하지 않을 명분이 없다.”
끼어드는 데인.
“분명 조사관들은 왕의 핸드 레페이온의 사람들일 겁니다. 별다른 조사 과정 없이 검산은 다시 렌시아가로 돌아갈 수 있겠죠. 음…… 형님?”
명백히 예상되는 불안한 상황인데도 루인은 그저 웃고 있었다.
그런 대공자의 웃음에 담긴 의미를 카젠은 쉽사리 읽지 못했다.
카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대공자에게 또 무슨 계획이 있는 게로구나.”
물어보고 싶었지만 카젠은 함부로 그럴 수 없었다.
괜히 물어봤다가 또 엄청난 사달을 일으킬 것만 같아 골머리가 아파 왔다.
또한 대공자는 본인이 결심하지 않는 이상 누가 묻는다고 쉽게 대답할 위인도 아니었다. 그것이 이 카젠이라고 해도.
결국 카젠은 화제를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네 마법은 도대체 무엇이냐. 그 창술은 또 무엇이고.”
그것은 하이베른가의 가주이기에 앞서 순수한 무인의 질문이었다.
특히 마법도 마법이지만 루인이 선보였던 창술 또한 결코 서툰 무투술이 아니었다.
대개의 무류(武流)란 반드시 고유의 형식이 있게 마련.
하지만 루인의 창술에 담긴 형(形)은 카젠이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종류였다.
루인의 창술은 격렬하고 묵직한 북부식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부드럽고 방어적인 남부식 무투술 같지도 않았다.
경쾌하고 빠른 동부식 무투술도, 잔인하며 악랄한 서부식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그 모두를 닮아 있었다.
격렬하다가 부드럽고, 경쾌하다가도 잔인한, 그 모든 움직임이 루인의 동작에 녹아 있었다. 다만 특정할 수 없을 뿐.
분명한 것은 결코 하이베른가의 무투 방식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무인의 무투술은 말로 해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이미 기회가 있지 않습니까.”
나중에 가문으로 돌아가 붙어 보면 알게 될 텐데 뭘 벌써 궁상맞게 알려고 드십니까.
루인의 그런 목소리가 마치 환청처럼 들려온다.
카젠이 피식 웃어 버렸다.
“참으로 신비한 우리 대공자구나.”
문득 호기심이 치민 데인.
“아버지는 형님을 이기실 수 있겠습니까?”
카젠이 이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했다.
“대체 너는 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내가 아들 녀석에게 질 것 같으냐?”
“하지만 형님께서는 초인을…….”
“렌시아가의 대전사는 비록 초인의 경지를 이룩했지만 경험이 매우 적은 기사였다. 그의 이명을 미뤄 볼 때 아마도 평생을 홀로 수련했을 것이다.”
루인은 아버지의 도발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물론 맞는 말이기도 했다.
지금의 검성은 이리처럼 잔인하지도 승냥이처럼 교활하지도 못하는, 그저 힘만 무식하게 드센 멧돼지였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아버지의 검술은 그런 온갖 이리 떼와 승냥이들을 사냥하며 완성한 사자의 검.
그 경험의 깊이란 검성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번 기수 쟁탈전에 검성과 직접 맞붙으셨다고 해도 처음에는 낭패를 보시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아버지가 좀 더 유리했을 것이다.
지금의 검성은 그저 무식한 스피릿 오러가 전부다.
마구잡이로 뿌려 대는 캘러미티 라인을 제외하면 사실 검술이랄 것도 없었다.
녀석의 무서움은 훗날 캘러미티 블레이즈를 완성하고 발휘된다.
이대로 그가 캘러미티 블레이즈를 완성한다면…….
그것은 사상 최악, 절대적인 군단장의 등장을 의미했다.
그를 적으로 마주한다는 것을 상상도 하기 싫었다.
하루라도 빨리 그를 정상으로 되돌릴 방법을 찾아야 했다.
벌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아버지와 형님의 대결을 떠올리니 벌써부터 데인의 눈빛이 열정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정말 기대됩니다! 아버지!”
루인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검산을 가문으로 데려가면 그에게 별장을 내어 주시고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그저 수련할 공간과 음식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아, 그리고 가끔씩 대련을 해 주면 좋아할 겁니다.”
“대련……?”
“바라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금방 카젠의 두 눈이 흥미로 물들었다.
경험 없는 기사라고 해도 초인은 초인.
대련 욕심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데인, 너도 그의 옆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그의 마음을 얻고 가르침을 청하거라.”
검성 월켄이 데인에게 마음을 열지는 미지수였다.
일인전승의 폐쇄적인 검술유파에 몸담고 있는 그는 검술을 함부로 타인에게 전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형님.”
데인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형님이 그렇게 하라면 하는 것이다.
데인에게 있어 루인을 향한 믿음은 신뢰라기보단 신앙에 가까운 것.
말을 끝낸 루인이 어느덧 대공저의 문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루인이 계속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태도를 취하자 카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누가 오기라도 한 것이냐?”
“마침 오는군요.”
담담한 표정으로 호위 기사의 몸수색을 받고 있는 화려한 예복의 청년.
흰색 예복의 중심에 선명한 새겨진 에메랄드빛 드래곤 문양.
청룡 베스키아의 문양을 예복에 새길 수 있는 이는 왕족밖에 없었다.
익히 아는 얼굴, 데인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아라혼 저하!”
르마델 왕국의 1왕자, 아라혼 니소 르마델.
그가 루인을 보자마자 씨익 웃고 있었다.
“이거 원. 멋대로 서찰을 남기더니 반겨 주지도 않는군.”
루인이 마주 보며 피식 웃자 아라혼이 예를 갖추었다.
“하이베른가의 대공을 뵙습니다.”
금린사자기의 주인, 왕국의 기수는 국왕의 바로 아래.
왕국의 체계상 왕자와 대공의 위계는 같지만 그 위상은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어서 오시오, 아라혼 왕자.”
카젠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라혼을 반겨 주었다.
데인이 서둘러 의자를 빼며 아라혼을 향해 정중히 예를 다했다.
“여기 앉으십시오. 왕자님.”
“그대가 바로 왕국 역사상 최연소의 기사, 데인 경이군?”
“과람한 칭찬이십니다.”
몸은 굽히면서도 당당한 자존감과 절도, 기사의 기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자의 가문, 대공가 하이베른의 자제답게 데인의 첫인상은 훌륭하기 짝이 없었다.
“그대의 형이 그대의 반만 닮았으면 소원이 없겠군.”
“흰소리 그만하고 앉아라.”
“하, 이거 봐, 동생.”
루인의 자연스러운 하대에 카젠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사자왕의 불편한 심기를 읽은 아라혼이 이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대공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어차피 친구 먹기로 해서. 뭐, 아직 적응은 잘 안 되지만 그러려니 합니다.”
“아비를 닮아 불민한 아들이오. 용서하시오.”
“그게…… 대공님을 닮은 거였습니까?”
이번엔 루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후…… 존댓말이 그렇게 좋다면―”
“아, 그건 내 쪽에서 거절하지. 저번에도 오히려 기분이 더 별로더라고.”
“알아들었으면 앉아라.”
“그러지.”
자리에 앉은 아라혼이 웃으며 카젠을 응시했다.
“참으로 잘난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아라혼 역시 모두 지켜보았다.
하이베른가의 대전사로 나선 루인의 기수 쟁탈전을.
하이베른가를 방문했을 때 녀석이 한없이 당당했던 이유를, 그 압도적인 위압감을 그제야 모두 이해한 아라혼.
초인의 경지에 이른 하이렌시아가의 대전사를 상대할 수 있는 역량은 르마델의 1왕자, 아라혼의 친구로서 손색이 없었다.
더구나 왕국의 사자가(家),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오히려 자신이 먼저 요구했어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과찬의 말씀, 아직 모자람이 많은 아들이오. 왕자께서 잘 지도해 주시오.”
“풋! 지도라고요?”
루인이 보낸 서찰을 보며 몇 번이고 경악했는지 모른다.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철저한 계획, 그 아득하고 치밀한 심계란 자신이 겪은 모든 노회한 정치인들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서찰 하나만으로 현자를 넘어서는 지략을 고스란히 느끼게 만드는 존재, 그런 루인을 무슨 지도를 하라니.
아라혼이 여전히 미소 띤 채 다시 카젠을 응시했다.
“제안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제안……?”
카젠이 루인을 쳐다봤다.
기원제 기간, 왕실의 행사로 바쁠 1왕자가 갑작스럽게 방문하여 제안을 운운하는 것은 분명 대공자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었다.
“저를 후원하겠다는 확실한 하이베른가의 공표를 내어 주십시오.”
왕국의 기수, 사자의 명예는 하이베른가가 지닌 가장 강력한 힘.
왕국의 건국 때부터 내려온 사자의 위상은 견고한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저로서는 공녀님과의 혼약 동맹이 가장 좋긴 한데, 그랬다간 이놈이 저를 죽일 것 같으니 후원으로 만족하겠습니다.”
실제로 아라혼이 데아슈를 언급하자 루인이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물론 데인의 눈빛도 동시에 맹렬해졌다.
“그것으로 우리 하이베른이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이오?”
“……베른 공작령을 향한 왕실의 행위 일체를 중단시키겠습니다.”
1왕자 아라혼 역시 엄연히 왕실의 구성원.
오랫동안 하이베른가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해 온 왕실의 치부를 밝혔으니 그로서도 속이 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으음…….”
루인이 가문에 남기고 간 서류를 통해 이제는 카젠도 알고 있었다.
오랜 세월 하이베른가를 괴롭혀 온 왕실의 협잡을.
“지금까지 우리 하이베른가가 르마델의 특정 왕자를 일방적으로 후원한 적은 없었소.”
“어려운 부탁이란 것을 압니다.”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소. 그대는 아직 후계 구도가 확실히 서지 않은 르마델의 일개 왕자요. 명목상의 1왕자라는 뜻이지. 그런 그대가 무슨 수로 왕실을 움직이는 렌시아가의 술수를 막는단 말이오?”
그때, 루인이 끼어들었다.
“이 녀석의 역량은 제가 만들어 줄 작정입니다.”
“대공자가?”
“빚은 확실하게 받아 내는 편이니까요. 그리고 마침내 아라혼이 왕세자가 되는 데 성공한다면―”
“성공한다면?”
루인과 아라혼이 동시에 웃는다.
“왕세자 아라혼은 하이베른가의 재 공국 선포를 도울 겁니다.”
“뭐, 뭐라?”
그것은 카젠에게 있어서 충격을 넘어선 전율이었다.
대공국의 꿈.
한참 동안 신중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카젠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데아슈가 올해 몇 살이었지?”
루인과 데인이 동시에 소리친다.
“아버지!”
“정신 차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