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20화 (120/187)

<120화>

까앙!

-형님, 팔은 괜찮습니까?

-흐흐. 아직 떨어져 나간 건 아니잖아. 그나저나 네 마력은 얼마나 남았지?

-스펠 두 개 정도…….

-크윽…… 이번에도 시간은 내가 번다. 그리고 언제나 말했듯이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날려 버려. 그리고 저 모자 쓴 군단장 새끼. 반드시 죽여라 루인.

-…….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좀 웃기긴 한데 그냥 오늘부터 우리 친구하자.

-…….

-함께 죽을 뻔한 게 몇 번인데! 그깟 나이가 뭐가 중요하냐? 하하하하!

츠츠츠츠!

까앙! 가가각!

-섭섭하다, 루인.

-잡소리 그만하고 집중해라. 이번에 저놈들을 섬멸하지 못하면―

-사드하를 네 미들네임으로 했다며? 친하기로 따지면 내가 먼저 아니야?

-그건…… 추모의 의미다.

-어차피 나도 오늘 죽을 것 같다.

-헛소리하지 말고 집중…….

-진짜다 루인. 아까부터 투기가 이어지지 않아.

-그럼 뒤로…… 뒤로 빠져……! 어, 어디 가는 것이냐!

-너의 다음 미들네임은 나 월켄이다! 루인 사드하 월켄 드 베른. 얼마나 멋있냐?

-왜 넌 항상 먼저……!

-넌 허약한 마법사잖아. 내 검은 약한 이를 지키는 검이다!

-꺼져라…….

츠캉!

촤촤촤촤촤촤!

-로웬느가…….

-울지 마라! 월켄!

-시르하…… 루이즈…… 라울…….

-정신 차려라! 너마저 잃는다면! 나는…… 나는……!

-부탁이 있다…… 루인…….

-너까지 그렇게 말하지 마라! 대체 왜 다들 나에게만 소원을 남기지 못해 안달이란 말이냐!

-절대로 무너지지 마. 네 정신만 무너지지 않는다면 우리 연합에 희망은 있다.

-네가 연합의 총사령관이다! 그런 건 네가……!

-아니. 연합을 이끌던 존재는 처음부터 너였어, 루인.

-으아아아아아!

-처음으로 죽지 않는 네가 부럽지 않네.

-제발…….

-먼저 이렇게 도망쳐서 미안하다, 루인.

눈물이 흘러내린다.

츠츠츠츠츠-

의지와 상관없이 반사적으로 밀려드는 추억.

증오로 모든 감정이 끓어오르면서도 녀석이 뱉던 농담이, 그 웃음이, 너무나도 생생해 가슴이 아리고 또 아렸다.

월켄의 두 눈 깊은 곳에 일렁이던 청염은 차가운 현실.

청염의 의미, 그 치밀한 악의 씨앗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분노를 멈출 수가 없었다.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악제의 악의(惡意).

촤촤촤촤촤촤!

악착같이 흑암의 융단을 걷어 내던 검성이 검을 회수하며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비틀었다.

“후우…… 후우…… 대체 어떻게 마법으로 이런 게 가능한 거지?”

그것은 정보의 격차였다.

지난 생, 검성과의 대련은 매일매일 쳇바퀴처럼 행해지던 루인의 가장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루인은 그가 완성했던 모든 비기를 알고 있다.

초인 너머의 경지, 초월자를 바라보고 있던 검성마저 흑암의 공포는 늘 압도적으로 이겨 왔다.

그런 검성의 초기 검술쯤은 비록 루인이 전생의 경지를 모두 회복하지 못한 상태라고 해도 손쉬웠다.

“이번 공격으로 완전히 끝낸다.”

이내 검성의 눈빛에 강렬한 투쟁심이 얽힌다.

어쩔 수 없이 창과 수차례 맞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투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자신이 지닌 최고의 검, 일격필살의 수법으로 끝내야 한다.

“캘러미티 블레이즈(Calamity blaze)는 아직 무리다.”

“뭐?”

루인이 검을 잡고 있는 검성의 자세만 보고도 단숨에 그가 펼칠 검술을 알아본 것이다.

“의식의 경계에서 얻은 작은 깨달음에 불과한 검술이다.”

“네가 그걸 어떻게……?”

“그런 검술을 현실의 검으로 구현해 내려면 투기보다 정신의 완성이 선행돼야 한다.”

“너―”

그 순간.

측량할 수 없는 농도의 융합 마력이 루인의 염동에 의해 술식으로 구현된다.

그것은 마신 쟈이로벨의 정신주박술 메아트마(ѩѯѯѹ)의 열화판 마법이 아니었다.

헤이로도스의 술식으로 재탄생된 절대적인 정신계 마법.

백마법의 체계에서 소울 컨퓨전(Soul confusion)은 이론상의 경지였다.

그러나 만 년 이상 단련된 루인의 정신계는 드래곤, 아니 오히려 그들을 능가할 지경.

쿵!

알 수 없는 미지의 힘이 뇌리로 스며든 순간 모든 감각이 무너진다.

신경계가 모조리 마비된 듯, 더 이상 육체를 통제할 수가 없다.

철커덩-

눈을 부릅뜨며 검을 떨어뜨린 검성.

관절 인형처럼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는 검성을 향해 루인이 천천히 걸어간다.

“통제도 하지 못하는 검술로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할 것이냐.”

청염을 받아들인 인간은 양심과 인격이 순수한 동물처럼 변한다.

사람이 벌레를 밟아 죽일 때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같은 인간을 향해서도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간성의 말살 끝에 완성될 청염은 이 세계의 재해(災害)였다.

악제의 군단장들.

오히려 악제보다 그런 군단장들에게 죽어 나간 인간의 수가 훨씬 많았다.

검성이 그런 악마가 되는 미래를 루인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남은 융합 마력을 모조리 치환하여 혈주투계에 투입한다.

탈력감으로 새하얗게 변한 루인의 얼굴.

퍼퍽!

검성의 몸을 파고든 강력한 권격에 그의 몸이 천천히 기울어 가자.

루인이 아무런 감정도 없는 표정으로 그를 부축했다.

저벅저벅.

검성을 들쳐 메고 단상을 향해 걸어가는 루인.

어지럽게 흩날리는 눈, 에어라인이 적막으로 물들었다.

아무도,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르마델 왕국에 무수한 역사와 전설이 있었으나 오늘처럼 충격적인 기수 쟁탈전은 존재하지 않았다.

전율과 공포, 그리고 광기.

전력을 다한 루인의 마도(魔道)는 아직 이 세계가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것.

방금 루인은 모든 마법의 상식을 부정했다.

그의 염동 마법은 초 단위를 쪼개며 짓쳐 오는 모든 초인의 검술을 막아 냈다.

마음만 먹는다면 에어라인조차 부술 수 있는 검술, 그런 위대한 초인을 대인전으로 상대할 수 있는 마법사는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전투의 마지막은.

“초, 초인이 왜 갑자기 기절한 거지?”

“……컨퓨전 계열의 정신 마법이다.”

“리리아!”

어느덧 시론 일행에게 나타난 리리아는 아직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슈리에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결국 견뎌 냈군요! 그런데 괜찮겠어요? 아직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괜찮다, 슈리에. 그동안 돌봐 줘서 고맙다.”

슈리에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간의 리리아는 이렇게 쉽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슈리에가 묘하게 리리아를 바라보고 있을 때 시론의 망연자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컨퓨전(confusion)일까?”

루인이 염동 마법으로 모든 시전 과정을 생략해 버렸기 때문에 생도들은 그의 술식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내가 당해 봐서 알아. 술식은 읽을 수 없어도 마력의 흐름이 그때와 똑같다.”

“그래, 너라면…….”

이 중에서 리리아는 루인의 정신 마법을 겪어 본 유일한 마법사, 그녀의 감각이라면 확실히 믿을 수 있었다.

“하…… 컨퓨전이라니…….”

초인과 동일한 위상의 현자에게도 아득하기만 한, 그것은 명백히 초인 너머의 영역이었다.

얼마 전 스스로 드러낸 루인의 마법 위계는 이제 5위계.

도대체가 저 인간은 앞뒤가 맞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컨퓨전이 초인의 정신을 제압할 정도라면 사실상 초인보다 상위의 경지인 건가?”

다프네가 고개를 저었다.

“컨퓨전은 상대의 무력과 상관이 없어요. 컨퓨전을 막을 수 있는 건 투기나 검술 같은 경지가 아니라 오로지 정신력, 즉 정신 방벽의 유무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건 스승님께서…….”

“할아버지가?”

현자 에기오스가 그런 언급을 했다는 건 그가 정신 마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뜻.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정신 마법을 연구하다가 그 난해함에 미쳐 버린 마법사들이 부지기수였다.

현자의 경지마저 돌파하고 싶은 할아버지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걱정부터 치미는 것이 시론의 마음이었다.

“아, 그리고 리리아! 저 녀석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였어!”

리리아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든 세베론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귀족, 그리고 기사의 가문이라고는 짐작했었다.”

듣고 있던 시론이 반문했다.

“왜지?”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루인의 자아는 마법사라기보단 기사에 가까웠다.”

리리아의 말을 듣고 난 후 시론은 지난 모든 날의 루인을 떠올려 보았다.

과연,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루인의 모든 행동들이 맞아떨어졌다.

분명 기사 가문에서나 어울릴 법한 의식 체계.

“하지만 대공자는 조금 의외군.”

“그래, 이제 왕립 아카데미가 뒤집어질 거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아카데미에 하이베른가의 후원을 이끌어 낼 거라고 했을 때 우린 눈치챘어야 했어요.”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잠깐만! 다들 조용!”

어느덧 다시 단상 위에 올라선 루인.

곧 그가 검성의 목을 가격했다.

퍼억!

루인이 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버린 검성을 무심하게 바라보다 하이렌시아가 측을 향해 차갑게 선언했다.

“렌시아가의 대전사, 도전자 검산은 패배했다.”

이미 기사 쟁탈전의 시작부터 온몸이 굳어져 버렸던 레페이온에게 더한 충격은 없었다.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새파란 애송이인 줄로만 알았던 그는 저 사자왕 카젠보다 더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사자왕 카젠이 이런 엄청난 괴물을 키우고 있었다니!

수도 없는 까마귀들을 동원해 왕국의 모든 이목을 집중시킨 결과는 처참했다.

알칸 제국의 숨은 초인이 패배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를 영입하기 위해 가문의 모든 정보력과 인적 자원을 갈아 넣었다.

알칸 제국 놈들이 먼저 영입하기 전에 철저하게 계산된 전략으로 그의 마음을 움켜잡았던 것이다.

“패배를 인정하는가?”

“……인정한다.”

레페이온의 입가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가 상상도 해 보지 못한 결말이었지만 뼈를 깎는 심정으로 수습을 다짐하고 있었다.

르마델 왕국의 핸드는 그만한 힘과 역량을 가지고 있으니까.

민심이야 또다시 까마귀를 동원하면 그만이다.

이번 기수 쟁탈전을 부정한 결과로 몰아갈 것이다.

마법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 저 대공자가 최후에 보였던 마법들은 불길하고 어두운 마법이었다.

마계의 악마에게 영혼을 판 흑마법사로 몰아가기 딱 좋은 상황인 것이다.

“눈알을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

“…….”

“모든 계략을 받아 주마. 하지만 그 끝엔 본 가의 참혹한 징벌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문득 하이베른가 진영을 향해 목소리를 드높이는 루인.

“하이베른가는 이번 기수 쟁탈전의 도전자를 구금(拘禁)한다.”

하이베른가의 기사들이 각자의 무기를 갑주에 부딪쳤다.

-충!

변칙적인 루인의 선언에 레페이온의 얼굴에는 당혹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첩자 혐의다. 알칸 제국의 기사더군.”

“헛소리! 그는 본 가의 직계 성을 하사받은 기사다!”

“감히 적성국의 기사를 가문으로 받아들여 성을 하사하고 왕국의 비밀인 에어라인까지 입천하게 하다니! 렌시아는 제정신인가?”

더욱 목청을 높이는 루인.

“적성국의 기사가 에어라인을 파괴하려는 현장을 시민들 모두가 목격했다. 내가 아니었다면 행사장의 사람들 절반은 이미 죽었다. 그러므로 이번 기수 쟁탈전은 역모의 전조다.”

환상검제 레페이온이 체면을 포기하며 벌떡 일어났다.

“개 같은 소리! 혐의가 있다고 해도 르마델의 왕법으로 가늠할 일! 네놈에게 무슨 단죄할 권한이 있단 말인가!”

“금일부로―”

루인이 금린사자기를 움켜쥔다.

콰아앙!

“하이베른가는 영지전을 각오한다.”

갑작스러운 루인의 행동에 멍하니 굳어져 버린 레페이온.

루인이 금린사자기를 창처럼 하이렌시아가를 향해 겨누었다.

“지금부터 첩자의 압송을 방해하는 이를 왕국의 적으로 규정한다. 하이베른가의 기사들은 대공의 명을 따르라.”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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