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최근 루인의 심상을 괴롭혔던 것은 과연 자신이 지금의 경지로 초인을 상대할 수 있는가였다.
혈주투계(血朱鬪界).
근 1년간 악착같이 단련한 신체.
5개의 고리.
10만 리퀴르 이상의 융합 마력.
우연한 기회로 습득한 헤이로도스의 술식.
초인이라는 경지의 무게감을 미뤄 볼 때 분명 부족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헤이로도스의 술식.
대마도사의 마도(魔道)를 어느 정도 담아내기 시작한 헤이로도스의 술식은 최근 루인에게 확신을 심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혈우의 격노.
대마신 쟈이로벨의 휘하 마장 중 가장 강력하다고 평가받는 바르다쿠쟌의 대권능 흡수 병기.
파파파파팟!
초인이 비기, 검혼만으로도 모든 마력 칼날들을 튕겨 낸 검성은.
콰아아아앙!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짓쳐 오는 혈우의 격노에 부딪힌 순간.
“뭐, 뭐야!”
썰물처럼 투기가 빠져나가는 감각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러났다.
루인이 더욱 진한 붉은빛을 머금기 시작한 혈우의 격노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마왕들조차 두려워했던 바르다쿠쟌의 비기.
대마신 므드라의 서풍 지대, 수백만 마군들의 능력을 흡수하며 날뛰던 그는, 죽기 전 상상도 할 수 없는 권능을 폭사하며 홀로 서풍 지대의 삼분의 일을 날려 버렸다.
그가 장렬히 전사하자 마신 쟈이로벨은 그를 혈우 지대의 제1마왕에 추존했다.
“…….”
검성이 그런 혈우의 격노를 기이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당혹스러운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표정.
상상도 해 보지 못한 기이한 현상, 말도 안 되는 성능을 지닌 아티펙트의 등장에 검성이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투기를 흡수할 수 있다고?”
아직도 강렬한 충격의 여파에 가늘게 떨고 있는 혈우의 격노.
풍차처럼 창을 돌리던 루인이 곧장 바닥에 내려찍었다.
콰아아앙!
“보다시피.”
“그건…… 사기 아닌가?”
뭐라는 거냐. 미친놈이.
진짜 사기는 저 검성의 존재 그 자체다.
검을 쥔 모든 이들을 절규하게 만드는 검술의 천재.
무엇보다 죽을 때까지 단 한순간도 진화를 멈추지 않았던 검성의 검, 그 진정한 원동력은.
“하하…….”
루인이 검성의 달라진 눈빛을 바라보며 웃어 버렸다.
검성의 눈빛이 평소에 무료해 보였던 것?
그건 그가 검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검의 경지 외에 그의 삶을 자극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반짝이는 눈.
역시 녀석은 이 무식한 마도 병기를 마주하고도 새로운 재미를 발견한 아이처럼 초롱거리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레페이온은 저 검밖에 모르는 바보를 대체 무슨 방법으로 꾀어내었을까?
새삼 레페이온의 가공할 능력에 소름이 다 돋았다.
“이거 완전 대기사전의 카운터잖아?”
루인의 소름 돋는 미소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저 무식한 아티펙트는 기사들이 넘을 수 없는 절대병기다.
검을 부딪칠 수 없는 것.
한 번에 빠져나간 투기의 양을 가늠해 보면, 웬만한 기사들은 몇 번의 수만 교환해도 투기가 모조리 털려 버릴 것이다.
“흐음.”
지지직-
순간적으로 치솟는 스피릿 오러.
이내 스피릿 오러를 검기 형태로 발출하는 검성.
루인이 막강한 위력의 스피릿 오러를 혈우의 격노로 막았을 때.
까아아앙-
비로소 검성이 웃었다.
“스피릿 오러는 흡수를 못하네?”
혈우의 격노는 상대의 권능을 부딪쳐 흡수한다.
스피릿 오러는 발출하는 순간 육체와의 연결이 끊어진다.
검성은 그 특성을 즉각적으로 추론하고 약점을 발견한 것이다.
루인의 웃음기가 사라졌다.
검성이 더욱 무서운 건 이런 동물적인 감각.
“그럼 간단하군.”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루인이 재빨리 염동 마법을 일으킨다.
부우우웅!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시론이 침을 꿀꺽 삼켰다.
“미친…….”
검성이 우두커니 선 채로 검만 휘두르고 있었다.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진녹빛 스피릿 오러가 쏜살같이 루인에게 쏘아진다.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
시론은 그런 스피릿 오러들이 무슨 마법처럼 느껴졌다.
콰아앙!
콰아아앙!
중위계 배리어 마법과 온갖 쉴드 마법들이 짓쳐 오는 스피릿 오러의 속도만큼 똑같은 간격으로 재생성되고 있었다.
파괴, 생성, 파괴, 생성.
바늘구멍 같은 여유조차 없어 보인다.
무식한 스피릿 오러 세례에 루인이 자랑하는 강력한 무투술이 완벽히 봉쇄되어 버린 것이다.
“저게 초인…….”
시론은 몸서리가 쳐졌다.
자신이 경험한 기사의 스피릿 오러는 저런 종류가 아니었다.
극도로 집중한 기사의 정신, 그 강렬한 투기로 맺을 수 있는 것은 검 끝에 겨우 일렁이기 시작한 스피릿 오러가 다였다.
그걸 저렇게 윈드 커터(Wind Cutter)처럼 발출하는 것도 놀라운데, 저런 무식한 재생성과 속도라니.
콰아아앙!
콰아앙! 콰아아앙!
쉴드와 배리어들이 부서질 때마다 강력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번져 나간다.
피부가 찌릿찌릿할 정도.
스피릿 오러도 스피릿 오러지만 초를 쪼개며 생성되는 루인의 염동 마법도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마치 초인의 투기가 먼저 소진되느냐, 루인의 마력과 염동력이 먼저 소진되느냐의 싸움.
“루인 님이 움직이고 있어!”
“뭐?”
놀랍게도 루인은 그 와중에 배리어와 쉴드를 조금씩 전면에 배치하며 천천히 전진하고 있었다.
오히려 마법사가 근접전을 펼치기 위해 전진하는 기상천외한 광경.
그때 시론의 눈빛에 당황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저 기사…… 물러나는데?”
검성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창술을 펼칠 만한 거리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다프네가 감탄을 터뜨렸다.
“와, 이 전투는 정말 귀하네요.”
배워 온 상식과 관념이 모조리 붕괴되는 기분.
누가 기사고 누가 마법사인지 이제는 헷갈릴 지경이다.
“헤이스트(Haste)다!”
루인의 전신이 새하얀 빛살에 휘감기고 있었다.
육체의 생명력과 활력을 증폭하는 강화계 특화 마법, 헤이스트의 전형적인 전조 현상.
저 무식한 염동 마법으로 초를 쪼개며 배리어와 쉴드를 생성하고 있으면서도 헤이스트마저 걸 여유가 있다고?
“다프네 말처럼 루인은 정말 드래곤이 아닐까?”
“방해하지 말아요!”
콰아아아앙!
마지막 배리어가 산산조각 나며 푸른 빛살을 뿜어낼 무렵.
헤이스트로 강화된 루인의 혈주투계, 혈우의 격노가 뿜어낸 마신창법이 빛살처럼 검성을 향해 쏘아진다.
인간의 시계(視界)로 가늠할 수조차 없는 엄청난 속도.
시뻘건 창대가 휘어지며 자신의 머리를 쪼개어 오자 검성이 악착같이 이를 깨물었다.
소드 서큘러 콘(Sword circular cone).
아직 미완성의 검, 하지만 근접전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카드.
거대한 원뿔 형태의 검형(劒形)이 점점 시야로 가득 차오르자.
루인이 온몸에 쉴드를 덧씌우며 그대로 원뿔의 중심을 가격했다.
콰아아아아앙!
강렬한 빛살과 함께 퍼져 나가는 상상할 수 없는 위력의 충격파.
순식간에 블록 전체가 기우뚱 기울어지며 에어라인은 금방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으아아아악!”
“잡아! 아무거나 잡아!”
기울어진 블록의 각도로 인해 자칫 엄청난 인파가 압사할 수도 있는 상황.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도 대마도사와 검성은 여전히 혈투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꽈직!
반동을 이용해 하늘 위로 솟구친 검성은.
그대로 중력 가속도를 타고 빛살처럼 지상으로 파고들었다.
쏴아아아아아-
루인을 향해 수도 없이 뻗어 나간 검의 선형, 캘러미티 라인(Calamity Line).
검성을 상징하는 검술, 그 강렬한 선(線)의 향연에 루인의 눈빛에는 아련함과 광기가 동시에 번들거렸다.
구구구구구구-
수만 년의 세월을 격하고 흑암(黑暗)의 마도가 다시 세상에 출현한다.
어둠과 함께 드러난 광기의 기운.
융합 마력과 헤이로도스의 술식으로 재탄생된 마법, 다크니스 필드(darkness Field)는 그 등장만으로도 지켜보는 모든 이들을 경악케 했다.
광기의 어둠이 증식한다.
빛을, 공간을, 세상을 집어삼키기 시작한 다크니스 필드가 마치 융단처럼 캘러미티 라인을 흡수한다.
이내 다크니스 필드가 검붉은 빛을 머금으며 강렬하게 타오른다.
감당할 수 있는 물리력이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벌어지는 전조 현상.
루인이 이를 깨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신이 감당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다칠 것이다.
온몸에 다시 쉴드를 두른다.
역시 캘러미티 라인.
비록 그의 검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라 해도 검성은 역시 검성이었다.
최소 8성 기사의 검력쯤은 거뜬히 막을 수 있는 다크니스 필드가 걸레짝처럼 찢어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루인은 조각난 다크니스 필드를 수습하여 군중들의 머리 위에 둘렀다.
촤아아아아-
쉴드를 찢고 들어온 캘러미티 라인이 루인의 온몸에 혈선을 만들어 냈고.
“크으윽!”
순간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핏물.
이어 영향권 내의 모든 공간에도 선의 향연이 이어졌다.
촤촤촤촤!
블록 바닥에 거미줄처럼 얽혀 새겨진 무시무시한 선들을 바라보며 생도들은 전율하고 있었다.
이것이 정녕 인간의 검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조화란 말인가?
초인의 무시무시한 권능 앞에서 생도들은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탁-
타일에 착지한 검성이 신기한 동물을 발견한 듯 루인을 쳐다봤다.
“와, 정말 안 죽네?”
전력을 다한 캘러미티 라인을 막아 낸 상대는 처음이었다.
그 순간.
“넌 누구냐.”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는 검성.
상상할 수 없는 분노의 깊이, 그 광기의 진폭에 저절로 두려움이 치민 것이다.
“내 이름을 묻는 거라면 월켄이다.”
“…….”
이런 게 검성 월켄이라고?
그의 마음은 어떤 이보다도 따뜻하다.
불쌍한 생명들, 그 하나하나를 지키려고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희대의 영웅이다.
그 위대한 기사가, 그 고결한 검성이, 이렇게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군중들을 향해 캘러미티 라인을 뿌려 댄다고?
이자는 검성이 아니었다.
루인은 확신하고 있었다.
“넌 기사가, 월켄이 아니다.”
검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자신을 아는 듯한 태도도 거슬리는데, 놈은 이제 자신의 정체성마저 부정한다.
“내가 기사가 아니라고?”
간질거리는 투쟁심이, 그 분노의 진폭이 점점 검성의 마음속을 헤집는다.
열광처럼 이글거리는 마음, 분노와 증오가 확산하며 그의 마음을 삽시간에 일그러뜨려 놓았다.
그 순간.
루인이 혈우의 격노를 떨어뜨릴 만큼 경악한다.
“……청염(靑炎)?”
분명 보았다.
순간적으로 검성의 두 눈동자에서 일렁이는 푸른 불꽃을.
악제의 집행자, 혹은 그의 군단장들이 권능을 드러낼 때면 반드시 드러나는 그 섬뜩한 현상.
온몸이 떨려 온다.
분노가 열꽃처럼 번져 간다.
온몸을 헤집고 짓이겨 오는 그 끔찍한 감각, 그 더러운 느낌을 도저히 떨쳐 낼 수가 없다.
설명할 수 없는 검성의 모습.
남아 있는 융합 마력, 대마도사 루인의 모든 권능이 일시에 쏟아진다.
쿠구구구구구-
마치 세계가 끝날 것만 같은 미지의 무언가가 고조되고 있다.
대마도사의 무너진 추억이, 상상할 수 없는 분노가 되어 그의 세상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내 토해지는, 절망에 가까운 침울한 목소리.
“……이미 검성은 죽었구나.”
이 세계의 시간선이.
과거와는 명백히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빌어먹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