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사람이 너무 화가 나도 생각이 붕괴된다.
레페이온은 자신의 눈과 귀로 전달된 정보와 감정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정말 현실이 맞단 말인가?
차분하게 가슴을 가라앉힌다.
다행히도 점차 직관이 되돌아왔다.
레페이온은 투기를 운용해 어지러운 심상을 바로 했다.
뿌드득-
그리곤 깃발을 쥐고 있는 놈의 손, 대공의 인(印)을 노려봤다.
가문의 모든 명예와 권한을 대리하는 저 대공의 인을 이미 대공자가 지니고 있다는 것.
또한 이 공개적인 공간, 왕국의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그런 대공의 인을 망설임 없이 드러냈다는 것.
그것은 저 왕국의 기수 카젠과 그의 대공자가 이 모든 일을 미리 설계했다는 뜻이다.
저 포악한 사자 놈들의 계획을 모르는 이상 섣불리 말려들어선 안 된다.
감히 자신의 가문을 하이(High)로 예우하지 않았거나, 왕의 핸드에게 반말로 건방지게 군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어쨌든 지금은 저 교활한 대공자가 하이베른가의 모든 권한을 대리하고 있었다.
“기수 쟁탈전은 우리 왕국의 유구한 전통이자 자랑스런 축제네. 그리 날을 세울 것까진 없지 않나?”
루인의 두 눈이 더욱 강렬한 살기를 머금었다.
대공의 인을 드러냈음에도, 역시 자신의 하대(下待)에 똑같은 하대로 대응하는 레페이온의 오만함.
“렌시아가. 나는 분명 금린사자기의 권위와 대공의 명예를 드러냈다.”
“잊었나 보군. 이쪽도 왕의 핸드이자 이 나라의 대공이라네.”
“대공?”
루인이 비웃었다.
“아직 대공가의 역사가 짧아서 그 처신이 그리 가벼운 건가?”
“뭐라……?”
“대공가라 내세울 거면 대공다운 처신을 해라, 렌시아가.”
레페이온은 자신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절감했다.
더 이상 하이베른가의 진정한 의도를 살피기 위해 몸을 낮추거나 가면을 쓰기가 힘들었다.
참을 수 없이 밀려오는 모멸감.
“우릴 압박하고 싶었다면 정식적으로 영지전을 벌였어야 했다. 고작 세헬가를 부추겨 뒤에서 광산이나 만지작거렸던 놈들이 뭐? 대공가? 치졸하게 까마귀를 동원해 민심이나 조작하는 것들이 대공가?”
콰아아앙!
금린사자기를 다시 단상에 처박은 루인이 심연처럼 가라앉은 눈으로 렌시아가의 기사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왕국의 사자, 나의 대공가는 협잡하지 않는다.”
콰아아앙!
“도전은 기껍다. 허나 저열한 협잡은 도전자로 예우하지 않는다.”
콰아아앙!
<왕국의 사자, 나의 대공가는 말싸움 따윈 하고 싶지 않으니 기수 쟁탈전의 대전사로 내정된 이는 지금 당장 이 금린사자기의 앞으로 나서라.>
콰아아아앙!
단상에 박힌 채 연신 거칠게 펄럭이는 금린사자기.
하이베른가의 기사들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격동했다.
루인의 절대언령, 가슴을 울려 오는 사자의 대담한 선언.
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는 오히려 사자왕 카젠보다 더욱 왕국의 기수에 걸맞은 위용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기사들이 영혼을 바쳐 꿈꿔 온 무언가였다.
그는 명예로운 기사의 삶, 상상 속에만 존재해 온 미지의 완성(完成)이었다.
무엇이 그를 저토록 단단하고 당당하게 만든단 말인가?
그것은 저 금린사자기도 하이베른가의 권위도 아닐 것이다.
기수전을 방어할 수 있다는 완벽한 확신.
어떤 힘과 맞닥뜨리더라도 분쇄할 수 있다는 흔들림 없는 믿음.
오직 강자만이,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움켜쥔 이만이 보일 수 있는 강렬한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기사들은…….
그런 강자(强者)를 두려워하면서도 동경했으며 굴복하면서도 칭송한다.
차아아아앙-
-충!
하이베른가의 모든 봉신가와 방계 기사들이 일제히 하이베른가의 대공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기사가 보일 수 있는 가장 극진한 예(禮), 검을 뽑아 자신들의 심장에 갖다 댄 것이다.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가치와 영광.
그런 위대함을 목격했을 때 기사들은 자신의 심장을 바친다.
콰아아앙!
“없는 것으로 알겠다.”
홱-
금린사자기를 회수한 루인이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을 때.
다소 떨리는, 분노로 가득한 레페이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정말 네놈이 대전사로 나설 것이냐?”
대공의 인을 소지한 채 금린사자기로 도전자를 맞이한다는 것은 본인이 기수의 대전사라는 강변이었다.
겨울 하늘의 차가운 별처럼, 강렬하게 빛나는 루인의 두 눈이 다시 레페이온을 직시했다.
슬며시 비틀리는 루인의 입매.
“이제야 숨기지 않는군.”
레페이온이 마주 웃는다.
녀석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하이렌시아가, 이 레페이온이 준비한 패가 얼마나 엄청난 패인지.
그를 초빙하여 직계의 성을 내리기 위해 가문의 모든 역량을 동원했다.
사람임에도 신과 같은 위상을 구가하는 존재.
검으로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룩한 자.
초인(超人).
알칸 제국에서 초빙해 온 그 위대한 기사는 아직 초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저 카젠이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하물며 그의 새끼 사자임에 더 말할 가치도 없었다.
“대전사를 데려오라.”
세헬가와 상인 연합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무기력하게 당한 것은 전부 저 깃발, 금린사자기 때문.
하이베른가가 파네옴 광산을 차지하여 왕국의 북부를 완벽히 장악한 이상, 그들의 근본적인 힘, 왕국의 기수(旗手)를 반드시 빼앗아야만 했다.
그래서 레페이온은 오늘의 대전사를 위해 많은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초인은 결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비로소 오늘에서야 저 사자는 그 생명이 다할 것이다.
저벅저벅.
하이렌시아가 봉신가들의 진영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한 기사가 있었다.
아무렇게나 자란 금빛 머리칼.
덥수룩한 수염.
갑주도 예복도 걸치지 않은 그는 여행복 차림에 달랑 검 한 자루만 허리에 차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기사라기보단 평범한 용병에 가까운 느낌.
마치 무료하다는 듯 하이베른가 측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단상 위에 올라섰다.
레페이온이 희미하게 웃으며 자신의 중지에서 대공의 인을 빼냈다.
“어서 오시오, 검산(劒山). 이리, 이걸 받으시오.”
이 초인, 검산이라는 특이한 이명의 기사는 아직 세상의 예법에 약했다.
그는 특이하게도 한 대에 오직 한 명에게만 전승되는 일인전승 검술유파의 전승자.
산에서만 지냈던 그가 세상에 나온 지는 고작 삼 년 남짓이었다.
루인은 무료한 표정으로 대공의 인을 받아 드는 그를 찬찬히 바라보고 있었다.
‘검산…….’
그에게, 저 검밖에 모르는 바보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이명.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운명, 그 필연을 믿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인간에게 운명이란 것이 있다면.
그 운명을 끝없이 부수며 살아온 것이 이 흑암의 공포, 루인이 지나온 인생.
하지만.
이제는 그 운명이라는 놈, 우연을 가장한 그 필연이라는 괴물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금린사자기를 쥔 손이 사정없이 떨려 온다.
회귀(回歸) 후.
이토록 온 마음이 동요되었던 적이 있었던가.
도저히 녀석의 시선과 얽힐 수 없었다.
녀석의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자신이 비루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멸망 이전의 머나먼 과거.
이 거짓 평화의 시대에서도 얼핏 보면 무료한 눈빛, 저 퉁명한 표정이 어떻게 그대로일 수가 있단 말인가.
그가 휘날리는 금린사자기를 한 차례 응시하더니 루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혹시 죽을 수도 있는데. 괜찮겠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시기, 녀석의 검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고작 삼십 대에 초인의 경지를 가능케 한 녀석의 투기, 혼돈의 오러는 제어가 매우 어려웠다.
녀석이 자신의 투기를 완벽히 제어하고 초인의 경지 너머를 바라본 때는 지금으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허구한 날 펍에만 들락거리니 검에 눈이 달릴 리가 없지.”
“음?”
상대가 마치 자신을 안다는 투로 말하자 그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우리. 혹시 본 적이 있나?”
“…….”
처절했던 삶, 불꽃 같은 그의 미래를 모두 보았지만 감히 루인은 대답할 수 없었다.
녀석이, 우리가 지켜 내지 못한 모든 것들이 떠오른다.
차라리 녀석의 눈이 증오와 후회, 원망과 연민으로 얼룩져 있다면 조금은 견디기가 쉬웠을 텐데.
이런 자신의 서글픈 비감(悲感)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현실이 루인은 새삼 견디기 힘들었다.
“데인.”
갑작스런 형님의 부름에 데인이 자세를 바로 했다.
“예, 형님.”
루인이 금린사자기를 다시 깃대에 꼽았다.
이어 그가 헬라게아를 소환한다.
츠츠츠츠츠츠-
혈우의 격노(激怒)가 공간을 찢으며 핏빛 동체를 드러내자.
“지금부터 일어나는 전투를 영혼에 새길 각오로 살피거라.”
서슬 푸른 루인의 목소리, 말할 수 없이 단단한 압박감.
형님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터.
데인이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루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그 옛날 검술왕 데인이 평생토록 갈망해 온 검술.
물론 아직 그 완벽한 극의(極意)는 아닐 것이다.
허나 현 단계의 그의 검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데인의 성장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생도들은 기수 쟁탈전의 자리를 마련하라.>
루인의 절대언령이 모든 생도들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루이즈가 경악했다.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
아직 자신의 경지로는 이 엄청난 인원 모두에게 절대언령으로 의지를 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생도들이 홀린 듯이 의자를 치우며 무대를 마련하고 있었다.
더 이상 루인을 생도로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루인이 어느덧 텅 비어 버린 하객석을 향해 눈짓했다.
“렌시아가의 대전사를 기수 쟁탈전의 도전자로 받아들이겠다. 내려가지.”
그렇게 말하던 루인이 단상 아래로 걸어가자 검산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를 쫓았다.
“마법사로 보이는데 무기가 창?”
루인이 말없이 창을 꼬나들었다.
혈주투계로 운용하는 마신창술(魔神槍術)은 과거 완성되기 전의 그가 가장 까다롭게 생각하던 무투술.
차라리 마법이 낫다며 투덜거리던 녀석의 그때를 떠올리니 루인은 금방 아련해졌다.
“질 것 같은가 보군.”
“헛소리!”
검산이 검을 뽑자 상상도 할 수 없는 초인의 투기가 흘러나왔다.
파아아아앙-
블록 전체가 위험하게 흔들린다.
생도들과 기사들이 경악하며 검산을 쳐다봤다.
초인 특유의 유형화된 스피릿 오러, 검혼(劒魂)의 기세가 그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우우웅-
특유의 진녹빛 오러가 유형화되어 그의 전신에 아롱졌다.
너울거리며 황홀하게 반짝이고 있는 그의 검혼을 바라보던 루인이 온 대지에 마력 칼날을 드리웠다.
츠츠츠츠-
갑자기 사방에서 수천 개의 마력 칼날이 떠오르자 검산은 금방 호기심을 드러냈다.
“호! 이게 말로만 듣던 마법인가 보네? 그런데 마법사의 마력이란 것이 원래부터 투기와 비슷한 거였나?”
하지만 루인은 저 멀리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루이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적요하는 마법사여.
너와 시르하,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녀석이 여기에 서 있다.
세상을 지켰던 인류의 검(劒), 그 위대한 무인이, 그 뜨거운 사내가 여기 우리 앞에 다시 왔다.
인류를 이끌던 자.
검성(劒聖).
촤촤촤촤촤!
루인의 마력 칼날이 동시에 쏟아진다.
혈우의 격노에서 뿜어져 나온 진노의 불꽃이.
이내 검성의 세상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