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17화 (117/187)

<117화>

마법은 마법사의 직관으로 그려 낸다.

마력 코어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도식 과정, 즉 회로 술식과 염동력, 언령, 수인 따위의 체계화된 시전 과정을 거쳐 발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법이란 굉장히 기계적이며 냉철한 권능이었다.

철저한 계획성에 기반한 도식 과정, 치밀한 연산을 거치기에 인간의 감정이 섞일 여지가 별로 없는 것이다.

반면 기사의 투기는 완전히 달랐다.

모든 검술에서 투기란 정신의 영역.

검을 대하는 감정과 추구하는 가치, 즉 기사의 마음과 성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고위 기사들은 상대가 뿜어 대는 투기의 결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상대의 검술을 유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 거대한 의지가 느껴지는 마력.

‘루인…….’

카젠이 느끼고 있는 루인의 마력은 자신이 경험한 그 어떤 마법사의 것과도 궤를 달리했다.

한 인간의 치열한 자아, 그 강렬하고 끈질긴 열망이 세상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건 마치 기사의 투기 같았다.

오히려 투기보다 더한 농도로 압축된 마력이 그의 삶을 증거했다.

하이베른가의 대공자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어떤 마음과 기백으로 사는지, 그 전율적인 외침을 온 왕국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콰아아아앙-

-크아아아아악!

에어라인의 타일이 더욱 우그러진다.

자칫 블록 일부가 붕괴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

크라울시스가 내지른 비명 소리에 렌시아가의 몇몇 기사들이 검을 뽑으며 진득한 스피릿 오러를 드러냈다.

차아아앙-

카젠이 희미하게 웃었다.

“아이들 싸움에 참견하려는 것이오?”

레페이온이 손을 들어 기사들을 제지한다.

그 역시 카젠을 마주 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아직 혈기가 마르지 않은 기사들이오. 이해하시오.”

사자왕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놈은 역시 노련하게 가면을 쓰고 있었으나 같은 아비이기에 느낄 수 있었다.

저 웃음 뒤에 감춰 놓은 마음은 벌써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을 것이다.

놈의 자존감, 명예 역시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부글거릴 것이다.

그러므로 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루인의 아비 카젠은 여느 때보다 당당할 수 있었다.

“위대한 사자검을 내팽개치고 주문쟁이들의 마법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군.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를 아카데미에, 그것도 마법학부에 보내셨소?”

레페이온이 도발하고 있었으나 카젠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카젠은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흐하하하! 하이렌시아가가 모르는 일도 있었단 말이오?”

레페이온의 표정에서 처음으로 웃음기가 사라진다.

그것은 그가 웃으며 넘길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르마델 왕국의 모든 정보를 움켜쥐고 있다고 평가받는 하이렌시아가를 모멸하는 발언이었기 때문.

레페이온은 하이베른가의 동선조차 파악하지 못한 수하들에게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었다.

“정도가 심한 듯한데, 계속 내버려 둘 작정이오?”

양 가문의 대공자들을 시선으로 가리키며 진득이 입술을 깨무는 레페이온.

결국 그렇게 본 마음을 드러내고 만 레페이온을 향해 카젠이 묘하게 웃어 보였다.

“본가의 대공자는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소.”

“카젠!”

레페이온이 점점 이성을 잃어 가자, 카젠은 여전히 흐뭇하게 웃으며 루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걱정 마라, 레페이온. 약자를 짓밟는 건 우리 대공자의 방식이 아니니까.”

그때.

루인이 단상 위로 걸어오고 있었다.

한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질질질-

대공자 크라울시스가 발이 잡힌 채 끌려오고 있었다.

경악한 하이렌시아가의 기사들이 갑주를 출렁이며 단상 아래로 내려가려고 할 때 다시 레페이온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하이렌시아가의 기사들이 가까스로 멈춰 섰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눈빛만으로도 루인을 찢어발길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은 저 대공자 놈의 모든 행위를 만인들 앞에 각인할 때다.

놈을 기다리고 있는 건 결국 왕법.

왕국의 법도에 따라 놈의 모든 무례한 행위를 낱낱이 물을 것이다.

크라울시스를 단상 위로 끌어 올린 루인이 특유의 담담한 표정으로 카젠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루인 베른. 왕국의 대공이자 기수, 옛 정령과 백룡의 친구, 몽델리아 산맥의 지배자이자 본가의 오롯한 주인, 하이베른가의 가주님을 뵙습니다.”

그는 고아(高雅)하며 아름다웠다.

루인에게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말은 없었다.

더없이 귀족적인, 일체의 군더더기조차 없는 완벽에 가까운 예법.

분노로 이글거리던 렌시아가의 기사들마저 내심으로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카젠은 기껍게 화답하지 않았다.

하이베른가의 가주인 이상, 대공자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부터 따져야 했다.

하이렌시아가의 대공자를 저 지경으로 만든 합당한 이유가 그에게 반드시 있어야 했다.

카젠이 쓰러져 혼절해 버린 크라울시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유를 묻겠다.”

“이 하이베른가의 대공자에게 감히 무릎을 꿇으라며 욕보였습니다.”

아무리 냉정하려고 했던 카젠이었지만 자꾸만 씰룩이려는 입술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속 건방지게 굴길래 역으로 제가 꿇렸습니다.”

붉게 얼굴이 달아오른 카젠.

파르르 떨리는 수염, 연신 들썩거리는 어깨가 그가 얼마나 웃음을 참고 있는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가까스로 웃음기를 다스린 카젠이 힘겹게 다시 입을 열었다.

“모욕당한 명예를 회복하는 건 본가의 대공자, 대귀족으로서 합당하고 공의로운 일이다. 허나 그렇다고 기절까지 시킬 일은―”

“저도 고작 그 정도 마법에 기절까지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

또 한 번 얼굴이 붉어지고 마는 카젠.

이쯤 되니 레페이온은 열불이 터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개수작을 언제까지 이어 갈 작정이시오! 카젠 대공!”

인내심이 폭발한 레페이온이 기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당장 대공자를 수습하라!”

하이렌시아가의 기사들이 절도 있게 걸어가 대공자 크라울시스를 데려갔다.

그의 상세를 자세히 살피던 천 개의 환영 율펜이 레페이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투기가 조금 상한 것 같사옵니다. 그 외의 치명적인 외상은 보이지 않사옵니다.”

“더! 더 자세히 살펴라! 율펜!”

저 순수하고 우직한 기사 율펜이 또 마음에 들지 않는 짓을 한다.

없는 상처를 부풀려도 부족할 판국에 곧이곧대로 모두 말해 버리다니!

“정말 잠시 혼절한 것뿐이옵니다. 심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사옵니다.”

“…….”

검의 실력, 기사로서의 명성만 아니면 벌써 쫓아내고도 남았을 인사.

더욱 화가 치민 레페이온이 와락 구겨진 얼굴로 루인을 노려봤다.

“애초에 네 녀석이 이 왕의 핸드에게 존경과 예를 보이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다!”

이내 단상의 중심으로 걸어간 레페이온은 군중들을 향해 더욱 크게 외쳤다.

“이 레페이온은 왕가의 행정을 대표하는 자! 감히 왕의 권한을 대리하는 핸드에게 네놈은 지금도 예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핸드의 명예를 모욕한 죄는 과연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

천천히 일어나는 루인.

곧 그의 무심한 시선이 레페이온과 천천히 얽혔다.

“귀족가의 예법에 따르면, 같은 공간에 다양한 작위의 명예가 공존할 경우, 가장 드높은 자에게 예를 바치고 나머진 생략합니다.”

“……뭣?”

“제가 알기로 기사의 국가, 우리 르마델은 행정 권력보다 군권(軍權)을 우선하는바―”

이 나라의 군권을 상징하는 깃발, 금린사자기를 향해 다시 예를 올리는 루인.

“이 루인, 이 나라의 귀족으로서 지극히 정상적이고 합당한 예법을 다한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크하하하하하!”

어이가 없었다.

감히 이 하이렌시아가의 가주 앞에서 르마델의 정통성을 들먹이다니.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데오란츠 국왕 따윈 당장 폐위시킬 수도 있었다.

르마델의 권력을 팔 할 이상 움켜쥐고 있는 존재는 국왕이 아니라 이 레페이온.

왕국 각지의 대귀족들을 수도 없이 추종 가문으로 거느리고 있는 이 하이렌시아 앞에서 감히 예법의 우선순위를 운운하다니!

아직 애송이, 젊은 치기로만 세상을 살아가는 놈에게 진정한 어른들의 세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줘야 했다.

진정한 권력의 현실이 이 나라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두가 우러르는 가문이 어디인지 놈에게 명확하게 가르쳐 줘야 했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표정의 레페이온.

먹잇감을 만난 포식자처럼 그의 눈빛이 흥미로 이글거렸다.

그런데 그때.

“허나 저로서는 큰 선물을 받은 입장인지라 이 나라 귀족의 본분만 아니라면 핸드께 가장 먼저 예를 올리고 싶었지요.”

루인이 짓고 있는 묘한 미소.

갑자기 돌변한 루인의 태도에 레페이온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선물?”

씨익.

“가주께서 우리 하이베른가를 그토록 기껍게 생각하시는지 미리 알았더라면 진즉에 찾아뵙고 예를 표할 걸 그랬습니다.”

“대체 무슨 소리냐?”

루인이 베스키아 산자락의 머나먼 북쪽, 파네옴 광산을 시선으로 가리켰다.

“파네옴 광산을 정성껏 요리하신 후에 저희 가문에게 선물로 주시지 않았습니까?”

“…….”

“세헬가를 부추겨 그 교활한 다리오네가를 상인 연합에서 축출하고, 일자리를 잃은 광산의 주민들을 저희 공작령에 유랑민으로 보내신 건 정말 감탄을 금할 수 없는 기막힌 수였습니다. 가주께서 그런 식으로 부족한 영지민을 보충해 주실 줄 저희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 순간 레페이온에게 창에 꿰뚫린 듯한 전율과 긴장이 몰아쳤다.

“자비롭고 현명하신 왕국의 핸드께서 설마 저희 하이베른가를 혼란에 빠뜨리고 봉신가들끼리 분열하라고 그 많은 유랑민을 보냈겠습니까? 그건 선물이지요. 아주 기막힌 선물.”

그제야 레페이온은 파네옴 광산에서 일어난 모든 빌어먹을 일에 이 대공자가 끼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들였던 세헬가가 무너지고 다리오네가의 가주인이 하이베른가로 귀속된 일의 모든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뿌드득-

악착같이 이를 깨무는 레페이온.

“한데 본가에서 잘 지내고 있는 보웬 다리오네 남작이 요즘 들어 괴상한 소리를 한다던데…… 하하! 설마요? 우리 자비롭고 현명하신 핸드께서 그런 일을? 암 그럴 리가 없지. 빚을 너무 져서 정신이 나간 것이 분명해.”

루인의 시선이 수많은 생도들과 백성들, 하이렌시아가의 추종 가문들을 훑고 있었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을 테지요.”

기묘한 어감.

그것은 왕국의 기원제, 모든 귀족과 백성들이 주시하고 있는 이곳에서 마치 보웬 남작의 증언이라도 공개하겠다는 투였다.

이건 무슨 노회한 정적을 마주한 기분.

결국 루인은 왕국의 핸드, 레페이온 대공의 살기가 담긴 미소를 구경할 수 있었다.

“너…… 정말 자신이 있는 것이냐?”

루인이 씨익 웃었다.

“네? 혹시 광산을 잘 운영할 자신 말입니까?”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느낌, 이런 더러운 기분이 대체 얼마 만인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레페이온은 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가 자신의 최대 정적이 될 거라고 직감했다.

“물론 자신이 있습니다. 핸드께서 큰 선물을 주셨는데 광산이 망하면 그 무슨 망신이겠습니까.”

여전히 사람 좋게 웃는다.

그러나 레페이온은 루인과 마주하며 더 이상 웃지 못했다.

“한데, 요즘 까마귀들이 이상한 소리를 하고 다니던데. 그…… 아! 기수 쟁탈전!”

겨우 생각났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손뼉을 치다가 씨익 웃는 루인.

“아니 도대체 금화를 얼마나 뿌리셨길래 일주일도 안 돼서 수도 왕성에 소문이 쫘악 퍼진 게지요?”

“…….”

루인이 하이렌시아가의 기사 측을 응시한다.

“연로하고 노쇠하신 핸드께서 직접 나서실 것 같진 않고……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아예 이 자리에서 소개를 시켜 주시지요. 대체 누굽니까? 하이렌시아가의 대전사가?”

이내 금린사자기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루인.

깃대를 움켜쥔 루인의 오른손에 대공의 인(印)이 드러났다.

단상의 중심에 처박히는 금린사자기.

콰아아앙!

심연처럼 가라앉아 있던 루인의 두 눈에 불같은 광망이 이글거린다.

“렌시아가. 나는 지금 이 하이베른가의 상대가 누구냐고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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