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사실 지상의 수도 왕성에서 개최되는 기원제는 백성들의 축제라 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에어라인의 기원제야말로 왕실과 대귀족들의 실질적인 기원제.
그러므로 기원제의 행사 준비에 동원되는 건 에어라인 아카데미의 생도들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요인 경호나 행사장 안내를 맡고 있는 기사학부의 생도들과는 달리, 마법학부의 생도들이 맡은 임무는 엄청난 양의 마력 폭죽 제작과 설치, 그리고 무게추 제거였다.
에어라인을 지탱하고 있는 무수한 마력 타일에는 부유를 가능케 하는 마정석과 무게추가 함께 설치되어 있었다.
처음 이 사실을 듣는 사람이라면 그게 무슨 비효율인가 싶겠지만, 타일 면적당 무게가 고르지 못한 점을 생각하면 필수불가결한 설치물이었다.
건물의 크기와 무게, 인구 밀도와 유동량 등에 따라 정교하게 세팅된 무게추가 없다면, 에어라인의 블록들은 울룩불룩한 형태가 되어 괴상한 구조가 되어 버린다.
이걸 막으려면 부유 마정석의 제작 단계부터 타일의 무게를 고려해야 하는데 그건 사실상 불가능한 이야기.
무게추가 제거되어 두둥실 떠오른 마력 타일을 바라보며 세베론이 나직이 감탄을 터뜨렸다.
“와…….”
에어라인의 하부, 폭풍과도 같은 바람을 맞으며 무게추를 조정하는 일은 경험 많은 3등위 이상의 마법 생도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타일이 떠오르자 선배 마법 생도들이 힘을 모아 중력 강화 마법을 시전한다.
주요 행사가 시작되어 인구 유동량이 급격하게 많아지기 전까지는 무게추 무게만큼의 중력 강화 마법이 필요했다.
세베론이 그런 선배들의 노련한 모습이 왠지 멋있다고 생각했을 때.
마력 폭죽에 마력을 주입하던 시론이 폭죽을 내팽개치며 그대로 드러누웠다.
“제길! 내가 이딴 거나 하려고!”
현자의 가문, 마도명가 메데니아가의 손자가 마력 폭죽이나 만들고 있다니!
피식 웃던 다프네도 유별난 행사의 규모에 감탄하고 있었다.
“……작년에 비해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네요. 이 정도까지 성대하진 않았는데.”
“하이베른가 때문이겠지.”
하이렌시아가의 규모에 비해 작다곤 해도 그들 또한 대공가.
그들의 직계와 방계, 봉신가의 규모는 역시 대공가답게 웬만한 중소 국가의 사절단과 엇비슷할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그 소문이 사실일까?”
벌떡 일어난 시론을 향해 세베론이 물었다.
“기수 쟁탈전?”
“그래.”
“백성들이 수군거릴 정도면 조만간 일어날 일이라고 봐야지. 미리 여론 작업을 한다는 건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거니까.”
“흐음.”
금방 복잡해진 시론.
하이베른가가 패배해도 문제고 하이렌시아가 새로운 기수를 거머쥐어도 문제다.
이건 단순히 왕국의 기수가 바뀌는 문제가 아니었다.
왕국에 한바탕 홍역이 몰아칠 수도 있는 일.
다프네가 말했다.
“조금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요. 굳이 기원제에 맞춰서 여론전을 시작했다는 게…….”
“이번 기원제를 기수 쟁탈전의 무대로 생각하는 거겠죠.”
고개를 끄덕이는 시론.
“그건 기수를 꺾을 확신이 섰다는 건데…….”
아무리 하이렌시아가가 새로운 대공가로 승작하여 더욱 기세를 상승시키고 있다지만 하이베른의 사자왕마저 꺾고 왕국의 기수를 차지한다?
그건 지난 기수 쟁탈전을 기억하는 르마델의 백성이라면 좀처럼 상상되지 않는 일이었다.
고작 다섯 합 만에 패배한 환상검제.
사자검, 그 위대한 검술 앞에서 환상검은 그저 화려한 잔재주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루인이 나타났다.
“앗! 너 언제!”
함께 기원제의 행렬을 바라보던 때로부터 정확히 사흘 만에 나타난 것.
사전에 아무런 말도 없이 인비저빌리티로 사라져 버렸던 루인 때문에 시론은 지금도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냐!”
“집에 다녀왔다.”
“……집?”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는 루인.
지상, 그것도 왕국의 북부를 다녀왔단 말인가? 사흘 만에 그 먼 길을?
“그런데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루인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마력 폭죽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 이거 우리에게 할당된 임무예요.”
“이 폭죽들 전부 마력을 주입해야 한다.”
우우우웅-
그 즉시 루인의 융합 마력이 맥동했다.
헤이로도스의 술식을 활용해 융합 마력을 수천 갈래로 쪼갠 그는 그대로 모든 궤도들을 미세하게 조정하기 시작했다.
화아아아악-
일제히 가늘게 진동하는 마력 폭죽들.
시론이 그런 마력 폭죽 더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폭죽 끝에 매달려 있던 작은 수정들이 모두 초록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력이 모두 완충되어 버린 것이다.
시론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에 쥐고 있던 마력 폭죽을 던져 버렸다.
“에이 씹…….”
자신도 무려 메데니아가의 직계다.
하지만 상대적인 박탈감.
저 무식한 헤이로도스의 술식은 솔직히 너무한 감이 있었다.
“아…… 역시 대단하네요.”
“진짜 허탈하네.”
다섯 시간이 넘는 동안 하나하나 마력을 주입하던 생도들이 하나둘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당연하게도 모두 시론과 비슷한 표정.
생도들이 그런 마력 폭죽들을 기다란 촉매선에 매달아 건물 사이사이에 설치를 마쳤을 때는 이미 에어라인이 어둑해지고 난 후였다.
어느덧 기원제의 첫 번째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첫 번째 날의 아침 날씨는 좋지 않았다.
강렬한 눈보라가 폭풍처럼 에어라인을 휘감고 있었다.
봉신가의 쟁쟁한 기사들을 위시한 채, 하이렌시아가의 행렬이 연회장으로 입장했다.
이름만 들어도 기사 생도들의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하이렌시아가의 기사들이 수도 없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는 왕의 핸드(Hand) 환상검제 레페이온이 있었다.
빈틈없이 정돈된 새하얀 머리칼.
심계를 추측할 수 없는 날카로운 눈빛.
기다란 망토와 화려한 예복을 걸친 채 마치 왕과 같은 눈빛으로 서 있던 그는, 핸드의 지팡이를 갈무리하며 오연히 행사장을 굽어보고 있었다.
두 개의 커다란 타일에서 사열 대기하고 있던 아카데미의 생도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생도 이전에 르마델의 백성으로서 왕의 핸드에게 보일 수 있는 가장 극진한 예우.
그때, 환상검제 레페이온의 뒤편.
그의 대공자, 크라울시스가 등장했다.
그의 이름은 독특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두 개의 달, 그중에 더 붉고 커다란 달 크라울시스가 그의 진명이었다.
만물을 비추는 달의 이름을 한낱 인간의 이름으로 정하는 것은 어쩌면 오만한 일.
하지만 그의 가문은 왕실의 권력을 압도하는 하이렌시아가였다.
새하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허리를 숙이고 있는 생도들을 아버지와 함께 굽어보는 대공자 크라울시스.
한데 희미하게 웃으며 예복의 단추를 매만지던 그의 얼굴에 곧 미묘한 감정이 일렁였다.
저 멀리 생도 사열의 가장 뒤편.
허리를 숙이지 않고 당당히 서 있는 놈이 하나 있었던 것.
역시 아버지의 시선도 그놈에게 향해 있었다.
점점 표정이 굳어지는 크라울시스.
“제가 잡아 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대공자 크라울시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을 때.
“무등위군. 거기에 마법 생도다.”
이 먼 거리에서 생도의 견장을 확인할 수 있는 아버지의 실력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무등위 마법 생도?’
크라울시스는 최근 들어 가문의 후원 생도들이 연속적으로 보고해 온 무등위 마법 생도를 떠올렸다.
잊혀진 워메이지의 수법으로 단숨에 최상위권에 랭크된 새로운 이명 생도.
꽤 특이한 소문과 이력을 지닌 놈이었기에 그렇지 않아도 한 번쯤은 아카데미에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가끔은 제 분수도 모르고 기사를 증오하는 마법사들이 나타나기도 하지. 이 레페이온이 그런 머저리 애송이들까지 일일이 상대해야 한단 말이냐.”
그 즉시 대공자 크라울시스는 아버지의 뜻을 헤아렸다.
아버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죄는 크다.
그러나 그 일을 왕의 핸드가 직접 묻는 건 격에 맞지 않는다.
크라울시스가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그가 다시 천천히 걸어가자 사열하고 있던 생도들이 물결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어느덧 무등위 마법 생도, 루인의 전면에 등장한 대공자 크라울시스.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은 표정의 루인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무렵.
차앙-
크라울시스가 검을 뽑았다.
“꿇어라.”
왕의 핸드에게 예를 보이지 않는 건 일종의 중죄다.
또한 그것이 왕국의 중요한 행사 자리라면 더더욱.
그런데 그때.
“하, 하이베른가다!”
“하이베른!”
“사자왕이다!”
백성들의 외침 소리.
르마델의 위대한 대공가, 왕국의 기수 역시 기원제의 연회장으로 입장을 시작한 것이다.
눈부신 금린사자기가 에어라인의 하늘 위로 솟아오른다.
사열의 맨 앞, 강철의 하이랜더 올칸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타오르는 열정, 그의 강렬한 눈빛이 금린사자기를 향해 흔들림 없이 고정되어 있었다.
중검(重劒)을 추구하는 황혼의 기사 생도들.
그들이 가장 동경해 온 검술명가, 그 위대한 사자의 가문이 마침내 등장한 것이었다.
기사의 가슴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왕국의 위대한 기수가.
수십 년 만에 그 위용을 드러낸 하이베른가는 그 등장만으로도 기사 생도들의 가슴에 뜨거운 불을 지피고도 남음이었다.
위대한 사자왕은 예복 대신 육중한 갑주였다.
기사 생도들은 언제든지 전장으로 나아가겠다는 사자왕의 각오를 선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오른편.
왕국의 최연소 기사, 데인이 아버지와 같은 갑주를 걸진 채 당당히 서 있었다.
그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을 때.
철컥철컥.
단상에서 내려오는 데인.
기사 생도들의 흠모를 한 몸에 받으며 걸어오던 데인은.
영혼으로 추앙해 온 자신의 형님,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를 향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예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기사 데인 헤네스 베른.”
루인의 시선과 담담히 얽히다 다시 고개를 숙이는 데인.
“한없이 경원하는 마음으로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를 뵙습니다.”
에어라인에 정적이 전염된다.
도저히 벌어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론의 표정.
입을 막으며 경악하는 다프네.
아예 주저앉아 버린 세베론과 정신이 혼미해진 슈리에까지.
차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 오직 루이즈뿐이었다.
등급 생도들이라고 다를까.
강철의 하이랜더 올칸은 온몸을 떨고 있었다.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던 황혼의 야생마 그라간도 충격으로 굳어졌다.
등나무 탑의 리더 생도 볼칸, 홍염의 파수꾼 에덴티아도 하나같이 닥친 현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역시, 가장 당황하고 있는 건 하이렌시아가의 대공자, 크라울시스였다.
“일어나라 데인.”
데인이 담담히 일어났을 때.
융합 마력이 최대로 개방된다.
콰아아아앙-
거칠게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루인을 중심으로 물결처럼 퍼져 나간다.
위태롭게 진동하는 타일.
이내 심연처럼 가라앉은 대마도사의 두 눈이 크라울시스를 해부할 듯 직시했다.
“꿇어라.”
“……뭐?”
10만 리퀴르 이상을 자랑하는 루인의 융합 마력이 모조리 중력 강화 마법으로 투사되어 크라울시스의 양어깨에 작렬했다.
쿠구구구구구구-
갑자기 상상도 할 수 없는 힘이 자신의 전신을 눌러 오자 크라울시스는 투기를 전력으로 끌어올려 대항하려 했으나.
“크으으으……!”
푹 꺼져 버린 타일과 함께 끝내 허물어진 크라울시스.
이내 루인의 투명한 동공이 그를 향했다.
“예를 문제 삼을 거라면―”
저 멀리 위풍당당하게 휘날리고 있는 금린사자기를 시선으로 가리키는 루인.
“금린사자기를 배알하고도 예를 보이지 않는 네놈은 무엇으로 다스려야 하지?”
어느새 무릎을 굽혀 크라울시스와 시선을 맞춘 루인.
고르고 새하얀 그의 치아가 밝게 빛났다.
“죽여도 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