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분명 형님이었습니다.”
데인의 단호한 대답.
아카데미의 생도 등위 체계상 이 시기에 에어라인에 입천하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사자왕 카젠.
그렇게 무등위 시절을 보내고 있을 자신의 큰아들이 에어라인에 등장했다는 데인의 주장에도 그는 별달리 놀라는 표정이 아니었다.
“너무 기분 상하지 말거라. 대공자가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테지. 너도 잘 알지 않느냐.”
데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그 눈빛엔 섭섭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흐뭇하게 작은 아들을 바라보던 카젠이 창밖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저 멀리 보이는 에어라인의 왕성 블록.
상승 기류의 진동에 잔잔히 흔들리는 에어라인의 타일들을 차분하게 바라보던 그는 이 나라의 국왕, 르마델의 군주를 떠올렸다.
데오란츠 마르손 알칸 데 르마델.
이제 더 이상 그의 생각이 읽혀지지 않는다.
왕국의 기수를 행진 사열의 후방에 배치하여 왕가와 하이베른의 명예를 동시에 짓밟은 주체는 놀랍게도 왕실.
이건 왕실이 스스로 금린사자기의 권위를 렌시아가의 아래로 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오늘의 이런 위험한 결정은 왕국의 핸드(Hand) 레페이온의 독단적인 의지만으로는 결코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몇 개의 떠오르는 가정.
가장 최악은 금린사자기의 군권을 이미 왕실의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경우였다.
어차피 렌시아가의 영향력 아래 귀속될 군권이라면, 그들과 더욱 단단한 우호를 쌓아 확실히 왕실의 편으로 만들어 놓겠다는 계산.
또 다른 가정은 왕실이 렌시아가에게 강력한 압박을 받고 있는 경우였다.
렌시아가의 권력이라면 왕실의 치명적인 약점 따위를 충분히 쥐고 흔들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카젠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할 때 다시 데인의 침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설마 본 가의 봉신가를 제외하면 더 이상은 우리의 추종 가문이 없는 것입니까?”
기원제와 같은 왕국의 성대한 행사를 처음 경험한 데인에게 그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추종 가문들에게 구름처럼 둘러싸여 존경과 찬사를 받는 렌시아가와는 달리, 하이베른에게는 어떤 가문도 찾아오지 않았다.
심지어 베른 공작령과 인접한 가문들조차 렌시아가의 환영정원으로 향했다.
그 옛날 베른 대공국에 충성을 맹세했던 북부의 가문들까지 렌시아가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는 건 너무 충격적이었다.
“아마도 그럴 게다.”
“…….”
비로소 데인은 가문의 새로운 변화를 위해 그토록 치열하고 조급하게 굴었던 형, 루인을 이해했다.
하이베른은 그저 껍데기만 남아 있는 왕국의 대공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저 깃대에 매달려 있는 금린사자기마저 사라져 버린다면…….
데인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았을 때.
스스스스-
이지러지는 공간, 오묘한 빛살이 몽글거리며 한 사람이 등장했다.
소스라치게 놀란 데인이 급하게 검을 뽑으며 아버지의 전면을 막아섰다.
“누구……! 어?”
어지럽게 흘러내린 짙은 흑발.
인간의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아득한 눈빛.
오묘한 미소로 웃고 있는 청년, 루인은 달라진 데인의 기세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장했구나. 데인.”
“…….”
욱하고 치민 감정, 내내 가슴을 간질이던 그리움이 진눈깨비처럼 사라진다.
“형님!”
와락!
루인이 데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버지의 시선과 담담히 얽혔다.
온몸의 감각이 찌르르 울려 온다.
지난 생 무수한 초인들과 부딪치며 경험한 독특한 감각의 파장.
투기를 완벽히 갈무리할 수 있다는 의미는 단 하나.
초인이거나, 그 경지에 가까워졌다는 것.
루인은 아버지가 일 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을 얼마나 치열하게 보냈는지 단숨에 느낄 수 있었다.
“…….”
그것은 카젠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의복 따위로 감출 수 없는 완벽한 비율의 단련된 육체.
선명하게 느껴지는 강인함, 빈틈없이 서 있는 녀석의 자세에 카젠은 목울대를 꿀꺽거렸다.
또한 저 눈빛.
그것은 마법사의 현명함도 기사의 용맹함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철옹성처럼 단단해진 녀석의 안정된 눈빛에 결국 카젠은 인정하고 말았다.
“녀석…… 허풍이 아니었구나.”
<제가 다시 가문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더 이상 저와 토론으로 승부하실 수 없을 겁니다.>
자신의 감각권으로도 살필 수 없는 경지.
그 말은 벌써 이 대공자가 사자왕의 미지(未知)라는 뜻.
루인이 정식으로 가문에 돌아왔을 때, 어쩌면 자신이 큰 낭패를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카젠은 기분이 묘했다.
“아버지도 만만치 않습니다.”
“하하하!”
모든 투기를 완벽하게 갈무리하고 있는데도 이 사자왕의 성장을 알아본다?
비로소 카젠은 이 무시무시한 큰아들이 초인의 영역을 살필 수 있는 감각까지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벅차오른다.
하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형님. 그런데 여길 어떻게…….”
데인은 이런 루인의 불가사의한 능력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이베른가의 강력한 호위 기사들이 이곳 임시 사자정원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들의 민감한 감각을 뚫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마법이다, 데인.”
인간의 영혼을 추적할 수 있는 쟈이로벨이 함께하는 이상, 루인에게 이 정도의 호위가 장애가 될 순 없었다.
“마법…….”
아직 마법의 세계를 실전으로 겪지 못한 데인에게는 실로 당황스러운 경험.
마법이란 것이 대공가의 호위마저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면, 마탑을 움직이고 있는 렌시아 놈들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데인이 심각하게 표정을 굳히자 루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아무에게나 쉽게 가능한 것은 아니니까.”
영혼의 잔향을 추적할 수 있는 건 마신의 역량.
왕국의 현자라고 해도 그런 권능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루인이 아버지와 마주 앉자 데인도 함께 착석했다.
곧 루인이 탁자 옆 깃대에 매달린 금린사자기를 무심하게 응시했다.
“곧 기수 쟁탈전이 있을 겁니다.”
피식 웃는 카젠.
“레페이온이?”
환상검제 레페이온.
그의 역량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카젠은 일언지하에 그 말을 무시했다.
“그럴 일은 없다. 놈의 실력은 내가 가장 잘 안다. 내 기량의 절반도 따라오지 못할 놈이다.”
레페이온이 무서운 건 밀도 있는 계략과 사람을 다루는 수완이지 기사의 역량이 아니었다.
또한 렌시아가의 환상검술(幻像劍術)은 하이베른가의 사자검과 극상성의 관계.
같은 경지를 이룩한다고 해도 환상검으로는 중검의 극의인 사자검을 결코 꺾을 수 없다.
왕조 내내 렌시아가가 사자를 넘지 못한 역사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물론 몇 번의 이변이 있긴 했었지만 역사 전체로 따진다면 말 그대로 그건 이변에 지나지 않았다.
“반드시 일어날 일입니다. 아버지.”
더없이 단호한 루인의 눈빛.
그가 카젠을 향해 다시 선언하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마도 아버지는 패배할 것입니다.”
까마귀를 동원하는 건 엄청나게 돈이 드는 일.
게다가 민심까지 동요시키며 분위기를 조성하는 이유는 이번 기수 쟁탈전에 왕국의 모든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왕의 핸드 레페이온이 아무런 확신도 없이 이런 무모한 일을 벌이는 인물이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레페이온이 초인이라도 되었단 말이냐?”
“저는 도전자가 환상검제라고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
“뭐라……?”
그것은 너무나도 황당한 말이었다.
이 르마델 왕국에 사자왕의 권위에 도전할 만한 기사라면 환상검제 그 하나뿐이었기 때문.
“허면 누구란 말이냐? 이 왕국에 나 말고도 9성 기사가 또 있다는 뜻이냐?”
왕국의 은퇴자들을 제외하면 이 나라에 초인은커녕 9성 기사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환상검제 레페이온조차도 8성과 9성의 사이.
“렌시아가가 왕국에 까마귀들을 깔았습니다. 그들이 어떤 기사를 내세울지는 모르겠지만 까마귀를 깔았다는 건 그만한 확신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까마귀?”
단순히 정보를 수집하거나 의뢰를 하는 것이 아닌, 여론을 조작하는 데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든다.
그런 엄청난 돈을 들여서 여론을 조작한다는 건 결코 간단한 의미가 아니었다.
그러나 카젠은 내내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레페이온을 제외한다면 천 개의 환영 율펜과 궁구하는 자 실바릴 정도.
하지만 그들은 아직 40대다.
9성 기사로 대성할 가능성은 있겠지만 현재의 시점에서는 자신의 상대가 되진 못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루인이 깍지를 풀며 담담하게 말했다.
“레페이온이나 실바릴, 율펜처럼 렌시아가의 전통적인 강자라면 아버지께서 직접 상대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인물이 도전자로 나선다면 반드시 대전사를 세우셔야 합니다.”
“대전사(代戰士)?”
사자왕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진다.
도전자를 맞이한 왕국의 기수가 대전사 뒤에 숨는다는 건 스스로 명예를 시궁창에 내다 버리는 행위.
지금 루인은 그런 치욕을 감내하라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내 으스러지게 말아 쥔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치는 카젠.
쾅!
“불가!”
하지만 루인은 두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셔야 됩니다.”
“불가하다고 하였다!”
물빛처럼 투명해진 루인의 시선이 카젠을 해부할 듯 직시하고 있었다.
그 어떤 설득보다도 무서운 침묵.
그런 대공자의 시선과 얽히던 카젠은 어느새 자신의 등이 축축하게 젖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대체 이 녀석은……!’
가문에서도 무시무시한 녀석의 눈빛이었지만 지금은 그 아득한 농도가 더욱 짙었다.
나직이 한숨을 내쉬던 카젠이 의문을 드러냈다.
“대전사라니 도대체 누굴 말이냐? 네 말대로라면 9성에 근접하거나 그 이상의 초고위 기사, 즉 초인이 나선다는 의미가 아니더냐?”
사자왕조차 상대할 수 없는 기사를 도대체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카젠은 봉신가와 방계에 존재하는 모든 고위 기사를 떠올렸지만 기수의 대전사로 내세울 만한 기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한데.
루인의 입에서 놀라운 결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제가 대전사로 나설 것입니다.”
더없이 크게 떠진 카젠의 두 눈.
“네가……?”
사자왕의 대전사로 대공자가 나선다는 의미.
금방 카젠의 표정이 희열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제 세상에 너를 드러내겠다는 의미인 것이냐!”
자신의 큰아들,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는 분명 가문의 숨은 검으로 살겠다고 했다.
이내 루인의 입가에 번지는 자조 섞인 웃음.
이 빌어먹을 왕국이, 이 잔인한 세상이 대마도사의 출현을 종용하고 있었다.
렌시아가를 조종하는 힘이 타이탄족이라면, 그리고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악제와 관련이 있다면.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는 숨을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자신이 서 있는 이유는 악제의 멸망을 위해서였으니까.
허나.
“네가 과연 초인을 상대할 수가 있겠느냐?”
왕국의 기수가 자신의 대전사를 결정하는 기준은 바로 실력이다.
카젠은 루인에게 그 실력을 보이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츠츠츠츠츠-
어둠의 기운이 밀려와 공간을 찢는다.
개방된 헬라게아에서 꺼낸 상상할 수 없는 위력의 창, 혈우의 격노(激怒).
쿠구구구구구-
곧바로 초월자의 정신으로 빚은 융합 마력이 현신한다.
살갗이 저며 오는 듯한 마력의 압박, 그 무시무시한 기운에 데인이 소스라쳤다.
“혀, 형님!”
쏴아아아아아-
정원을 메워 가는 수천 개의 마력 칼날들!
그렇게 루인은 대마도사의 염동을 온 대지에 드리웠다.
그가 무시무시한 창을 꼬나든 채 엄청난 살기로 웃고 있었다.
“부족하시다면 말씀하십시오. 지금의 이 모습은 제 경지의 지극한 일부, 제 마도(魔道)의 작은 단면(斷面)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