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에어라인의 아침이 무척 분주해졌다.
많은 물자들이 상업 지구 블록을 향해 밀려들고 있었고 좁은 거리에 사람 역시 넘쳐나고 있었다.
기원제.
추수감사제와 더불어 르마델 왕국의 가장 큰 행사를 앞둔 에어라인은 왕국의 여느 도시와 똑같은 풍경이었다.
더구나 에어라인에는 왕국의 중추라 할 수 있는 대귀족들이 모두 몰려들 예정.
특히 하이렌시아가와 봉신가, 그들과 협력 관계에 있는 방계 가문들, 거기에 동맹 가문들까지.
그런 렌시아계의 사절단만 해도 그 수가 수천여 명에 이르렀다.
또한 현 왕실의 직계 왕족들과 그들의 친인척들까지 합한다면 이 좁아터진 에어라인 위에 일만 명 이상이 모여드는 것이다.
덕분에 길드 상인들의 표정은 밝았다.
이 짧은 기원제 동안 반년 수입과 맞먹는 매출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
대귀족들은 에어라인의 특산품을 일종의 사치품으로 여겼다.
그들에겐 에어라인의 특산품들을 얼마나 많이 구입해서 고향으로 되돌아왔는지가의 부(富)와 명성을 판가름하는 척도.
당연히 안 그래도 미쳐 버린 에어라인의 물가는 더욱 살인적으로 높아졌다.
상업 지구 블록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몇 번 흥정을 시도하던 세베론이 포기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야…… 아무것도 살 게 없네.”
시론이 웃었다.
“돈이 없는 거겠지.”
“안 그래도 우울한데 너무 때리지 마.”
이 에어라인의 특산품은 놀랍게도 의류였다.
직물의 산지도 아닌, 또한 특별히 방직 기술이 훌륭한 것도 아닌데도 에어라인의 의류가 불티나게 팔리는 이유.
그것은 에어라인에서 재가공된 의류의 디자인이 왕국을 선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최상위 권력층을 동경하고 흠모하는 건 인간의 본능.
당연히 이 부르주아의 에어라인에서 유행하는 의류 스타일은 언제나 왕국 전역을 휩쓸었다.
시론은 왕성에 비해 수십 배는 비싼 옷들이 불티나게 팔리는 광경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역시 인생은 돈인가…….”
그런 시론의 읊조림에 루인이 피식 웃어 버렸다.
왕국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백성들은 평생을 이 에어라인의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간다.
지금 에어라인을 거닐고 있는 것 자체가 특권이자 계급.
“아직 귀족가의 물을 빼려면 한참은 멀었군.”
“뭐 인마?”
그때 다프네의 걱정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리아는 괜찮겠죠?”
리리아가 혼수상태로 무의식적인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을 때 유적 동굴에는 슈리에만 남았다.
“난 리리아를 믿는다.”
루인은 그녀가 살아남을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멸화의 심장을 지니고도 그 힘든 수련을 한 번도 빠진 적 없는 의지와 열정.
그런 불꽃같은 삶을 향유하던 리리아에게 고작 고통 따위가 장애가 될 순 없었다.
<저도 남을 걸 그랬어요.>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 주고 싶은 사람은 없다, 루이즈. 슈리에는 리리아와 남다른 사이이니 잘 돌볼 거야.”
다프네가 다시 루인을 쳐다봤다.
“그나저나 뭔가 큰일이 일어난 것처럼 마법학부가 뒤집어졌던데…… 역시 루인 님 때문이겠죠?”
“…….”
보나 마나 자신이 남겨 놓은 마정 때문에 모든 교수들과 마법 생도들이 호들갑을 떨며 연구실에 모여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인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고작 마정 하나로 리리아를 살릴 수 있었고 마법학부에 뜨거운 열정을 지폈다.
마법사들이 열정을 불태울 연구를 만났으니 아마도 꽤 오랫동안 그들은 살아 있는 기분을 느낄 것이다.
뭔가 시원한 기분이었다.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족쇄를 어느 정도 해금(解禁)한 느낌.
너무 거대한 목표 의식 때문에 생겨난 관계의 장벽, 내내 닫혀 있던 감정들이 조금은 허물어진 느낌이었다.
이 왕국, 아니 모든 인간의 역량은 어차피 강화되어야 한다.
과연 인간 마법사들이 마계의 마정을 가공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등급 생도들에게 마정을 연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줬다.”
“네에……?”
“뭣!”
점점 일그러지는 시론의 얼굴.
“치, 치사한 자식! 우리는? 우리한테 먼저 기회를 줬어야지!”
어깨가 축 처져 버린 다프네.
“너무해요. 저도 마정을 연구하고 싶은데.”
마정은 모든 마법사들이 꿈꿔 온 연구 재료.
당연히 생도들은 선배들에게 그런 엄청난 기회를 선사한 루인에게 섭섭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정말 부럽네. 마법사의 평생 동안 한 번을 보기 힘든 마정을 연구할 수 있다니. 선배들 중에 마도학자가 여럿 탄생할 수도 있겠어.”
세베론 역시 아쉽다는 눈빛.
루인은 웃어 버렸다.
이 녀석들은 지금 본인들이 얼마나 엄청난 기회를 움켜쥐었는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지금 녀석들이 경험하는 건 태초의 마법사 테아마라스 사후 두 번째로 ‘대마도사’의 칭호를 움켜쥔 존재의 가르침.
한낱 마정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행운을 거머쥔 녀석들이었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고작 마정 따위에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있으니 헛웃음이 치밀 수밖에.
“아! 하이렌시아가의 사절단이에요!”
생도들이 동시에 다프네의 시선을 좇았다.
화려한 마차의 행렬.
형형색색의 외부 장식과 기다란 깃대.
위풍당당하게 펄럭이고 있는 불새의 깃발.
그 뒤를 이은 화려한 봉신 가문의 행렬.
엄숙한 표정으로 절도 있게 행진하고 있는 방계의 기사들까지.
왕국을 지배하는 불사조(Phoenix)의 가문, 또 다른 대공가로 거듭난 하이렌시아가의 행렬은 장엄함 그 자체였다.
좁은 상점가를 가득 메워 버린 그 행렬은 끝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토록 많은 하이렌시아가의 사람들이 어떻게 에어라인에 입천한 거지?”
“야간에 비행정으로 왔겠지. 공간 이동으론 불가능해.”
“와, 마력 비행정이라니. 저도 한 번만 타 봤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에어라인은 공간 이동이 불가능한 부피의 물자, 혹은 특별한 행사가 있을 시에만 마력 비행정을 운용한다.
하지만 마력 비행정을 운용하는 건 오히려 공간 이동진보다 더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기에 일부 요인들에게만 극히 제한적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그렇게 각자의 감상을 주고받던 생도들이 루인을 쳐다봤을 때.
그들은 하나같이 숨을 죽이고 말았다.
루인의 두 눈.
서슬 푸른 날붙이처럼 매서워진 그의 눈빛이 하이렌시아가의 행렬을 해부할 듯 직시하고 있었다.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차가운 눈빛이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 올 정도.
생도들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든 기사든 왕국을 살아가는 신민이라면 그들과 적대해 봤자 좋을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루인은 유난히도 불새의 가문을 적대했다.
지난 시간 동안 생도들이 몇 번이고 느꼈던 감정.
“하이렌시아가에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거예요?”
“…….”
사람의 원한 따위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자신과 쟈이로벨의 추측대로 저 렌시아가가 악제와 연관이 있다면 오로지 소멸의 대상일 뿐.
대마도사의 지혜와 마법, 하이베른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분쇄해야 할 인류 연합의 적일 뿐이었다.
웅성웅성.
“사자다!”
“왕국의 기수가다!”
그런 군중들의 외침 소리에 루인과 생도들의 시선이 일제히 행렬의 후방을 향했다.
왕국의 기수, 르마델의 금린사자기가 저 멀리 솟아나 있었다.
호기심이 잔뜩 치민 얼굴로 까치발을 들고 있는 생도들과 달리 루인의 표정은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아버지…….’
위대한 사자의 가문, 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왕국의 대공가가 행렬의 선두가 아닌 후방이었다.
왕국의 깃발 금린사자기가 불새의 그늘 아래 행진하고 있는 것.
일개 가문이 왕국의 기수보다 앞질러 행진하는 행위는 다른 왕국이었더라면 반역으로 다스렸을 일이었다.
이 르마델 왕국과 위대한 사자의 가문이 어떤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광경.
어쨌든 왕국의 두 대공 가문이 모두 모였으니 지켜보던 백성들의 눈빛에는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했다.
“이번에 하이렌시아가가 기수 쟁탈전을 신청한다는 소문이 있네!”
“허? 그게 정말인가?”
“20년은 긴 시간이지 않은가! 카젠 대공은 이제 노쇠하네!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소문이 있어!”
“나도 들었네! 카젠 대공께서 지난 몇 년간 영지 순찰 한 번 하지 않으셨다더군!”
“그게 정말인가……?”
“암! 레페이온 대공님이 새로운 왕국의 기수가 되셔야 해!”
주변 상인들의 말소리를 묵묵히 듣고 있던 루인이 희게 웃었다.
이건 까마귀들의 방식이다.
백성들 사이에 파고들어 교묘하게 진실을 과장하고 거짓을 선동하여 여론을 조장하거나 일정 분위기를 고조하는 방식.
더러운 까마귀들을 조종하여 일을 꾸미고 있는 놈들의 정체란 너무 뻔해서 헛웃음이 치밀 지경이었다.
“하이렌시아가의 가주 레페이온 대공께서 기수 쟁탈전을 염두에 두고 계신다는 게 사실일까요?”
“…….”
하이렌시아가가 유일하게 차지하지 못한 기수의 군권까지 장악하게 된다면 이 르마델 왕국의 미래란 없을 것이다.
자칫하다간 왕조가 뒤바뀔 수도 있는 일.
전생에서도 6왕자 케튜스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암중으로 국왕을 조종하여 왕국을 자유자재로 주무르던 막후의 가문.
한데 뭔가 전생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전생의 그들은 왕국의 기수를 탐낸 적이 없었다.
‘역시. 파네옴 광산 때문인가.’
유일하게 전생과 다른 역사.
세헬가가 차지했을 파네옴 광산을 하이베른가가 귀속시켜 버린 것.
왕국의 북부 상권을 장악하고, 세헬가를 전초 기지로 삼아 하이베른가를 압박하려 했던 그들의 계획이 무산돼 버린 것이다.
오히려 북부 상권은 하이베른가가 장악해 버렸고 다리오네가의 보웬 공마저 구금하고 있으니.
언제 모든 걸 털어놓을지 모르는 보웬 공은 그들에게 분명한 압박감과 메시지로 작용했을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건…….
‘나로 인해 벌어진 일이군.’
전생에 없었던 기수 쟁탈전.
그러나 루인은 웃고 있었다.
아버지를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자왕은 노쇠하지 않았다.
사자왕은 예전의 기량을 충분히 회복했을 것이며 오히려 또 다른 경지를 개척해 나가고 있을 것이다.
척척.
어느덧 루인 일행의 근처에 다가온 하이베른가의 행렬.
드디어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
시큼한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그리움 해소되며 가슴이 뜨거워진다.
기사의 신념과 명예, 기수가의 긍지가 아버지의 표정에 철갑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육중한 갑주, 기수의 전마(戰馬) 위에 올라탄 채 대중을 굽어보고 있는 그의 눈빛이란 광포하고 용맹한 사자, 그 자체였다.
마차 따위로 자신을 감추지 않는, 아버지의 그 당당한 기백에 루인은 말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을 느꼈다.
사자왕.
위대한 카젠.
그의 평생을 괴롭혔던 큰아들, 대공자의 투병.
저리도 완벽하게 아름다운 사자를, 저렇게 위풍당당한 영웅을 가주실에만 가두었던 원흉이…….
자신이었다.
‘이제 모두 돌려 드리겠습니다.’
이제 영광을 돌려 드려야 했다.
오롯한 사자왕으로 군림할 수 있도록 도와 드려야 했다.
하이베른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남을 수 있도록, 이 대마도사 루인이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야 했다.
노쇠한 대마도사의 영혼이 억겁의 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며 자신의 둥지, 그 위대한 가문을 축복하고 있었다.
그때.
카젠의 뒤를 따르던 데인과 루인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교차했다.
“어? 형……!”
데인이 환해진 얼굴로 말에서 뛰어내리자.
-인비저빌리티(Invisibility).
한참 동안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데인.
하지만 그는 끝내 형님을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