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루인. 너 많이 바뀌었다.>
<형님, 너무 달라지셨어요.>
<허허허…… 내가 아는 자네가 맞나?>
변했다는 말.
지난 생 흑암의 공포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살아남기 위해,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언제나 자신은 변화하고 적응해야 했다.
모든 감정이 하얗게 탈색되기 전.
원래의 모습은 어땠을까.
이 루인이 절망과 증오에 물들기 전에는 과연 어떤 인간이었을까.
과거의 자신은 작은 기쁨에도 마음껏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실없는 농담도 곧잘 했을 것이고, 예쁜 여자를 보면 두근거렸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너무 오래된 과거.
모든 감정이 희석되어 아득한 잔상처럼 남아 있는 추억이었지만 점점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도저히 심상에 집중할 수 없었다.
리리아가 힘겹게 뛰던 모습.
간혹 짓던 뾰로통한 표정.
매섭게 쏘아붙이던 목소리.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담고 있던 눈빛.
그 모든 리리아의 장면들이 파편처럼 떠올라 심상을 어지럽혔다.
두려워하고 있었다.
슬픔으로 추억하는 삶, 그 무기력한 때를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사람을 잃는다는 건, 언제나 루인의 재앙이었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
의아했다.
생도들, 아니 이번 생의 친구들과 쌓은 추억의 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런 감정은 무엇에 기인한 감정일까.
루인은 자신이 또 한 번 변했다는 것을 비로소 받아들였다.
생도들의 열정을 바라보는 것이 단순한 기꺼움으로 끝나지 않았다.
모두 지켜 주고 싶었다.
또 축복해 주고 싶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그 젊음들을 내내 보듬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 작은 여유, 이 이유 모를 감정을 사치라고 여기기는 싫었다.
적어도 예전의 동료들이라면, 이렇게 변한 자신에게 보기 좋다고 웃어 줬을 테니까.
이틀 만에 눈을 떴다.
어느새 마법학부의 쟁쟁한 리더 생도들이 모두 모여 자신의 책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정적인 눈빛들.
루인이 눈을 뜨기만을 기다렸던 생도들이 일제히 갈망을 드러냈다.
처음으로 입을 연 생도는 루인이 앉아 있는 책상의 원래 주인인 리베토였다.
“후배님. 다른 건 어떻게든 이해해 보겠는데…… 처음에 마정을 손으로 움켜쥔 건 왜 그런 거야?”
볼칸과 조셀린이 마정에서 마력을 추출했던 모든 과정을 생도들에게 이미 공유한 모양이다.
하지만 루인은 자신의 수법을 설명할 수 없었다.
설명을 한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받아들이기는 더더욱 힘들 터.
또한 마도란 마법사마다 길이 다르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이 소년들의 마도를 굳이 자신의 마도로 제한하긴 싫었다.
“이번 제조가 끝나도 이 마정에는 충분한 마력이 남아 있을 겁니다. 저는 이 마정을 선배들의 연구실에 기증할 생각입니다.”
“뭐? 그게 진짜야?”
측량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마정을 한낱 마법 생도들의 연구실에 기증을 하다니!
하지만 그런 마정의 물질적 가치에만 눈독을 들이는 생도들은 이 자리에 한 명도 없었다.
“마, 마정을 연구해 볼 기회라니!”
“미친! 마탑에서나 다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거 지금 꿈 아니지?”
마정은 왕국이 관리하는 전략 물자.
당연히 마정을 다루는 일이란 입탑 마법사, 그중에서도 고위 마법사들에게만 허락된 영역이었다.
마정을 해부할 듯이 이글거리며 바라보는 눈빛들.
그런 생도들의 열정에 더욱 기분이 좋아진 루인은 그 외에도 몇 가지 남는 마력 촉매와 희귀한 시약들을 생도들에게 주르륵 밀었다.
“이 나머지들도 연구해 볼 만할 겁니다.”
그러나 루인이 내민 마력 촉매와 시약들의 정체를 알아보는 마법 생도는 아무도 없었다.
어리둥절한 선배 생도들의 표정을 살피던 루인이 흐뭇하게 웃으며 하나하나씩 설명했다.
“이 촉매는 펜리르의 눈물과 비슷한 효과를 냅니다.”
“페, 펜리르의 눈물!”
그것은 요정족의 영수, ‘펜리르’가 슬픈 감정에 취했을 때 극소량 채취할 수 있다는 최상의 마력 촉매 재료였다.
하지만 펜리르는 하이엘프의 군주가 다루는 영수.
게다가 요정족은 남다른 배타성을 지닌 종족이라 인간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당연히 마법사들은 평생을 살면서 펜리르의 눈물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도감에서나 겨우 볼 수 있었던 그 영롱한 자태를 지금 실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볼칸이 의문을 드러냈다.
“펜리르의 눈물이면 펜리르의 눈물이지 비슷한 효과를 낸다는 건 무슨 뜻이지?”
당연히 루인은 마계의 포악한 괴수 ‘엑셀레톤의 피’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마력 증폭 효과와 특유의 수기(水氣)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진할 겁니다. 연구해 보면 금방 알게 될 테니 직접 확인해 보시죠. 그리고 이건…….”
루인의 입에서 나열되고 있는 온갖 마력 촉매들.
하나같이 그 모든 것들은 마법사가 평생을 살아도 만져 볼 수 없을 만큼의 희귀한 재료들이었다.
드디어 생도들은 놀라운 재료들의 면면보다 루인을 향해 궁금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정부터 이 엄청난 재료들까지…… 대체 어디서 구해 온 거야?”
“혀, 현자님의 실험실도 이 정도까진 아닐 거라고!”
루인이 무심한 얼굴로 재료들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싫으면 돌려주든가.”
“아, 아니다!”
“우악!”
리더 생도들의 손이 허겁지겁 몰려와 루인의 팔을 동시에 잡았다.
그때, 루인이 미리 설치해 둔 알람 마법이 울렸다.
삐- 삐삐-
홱 하고 고개를 돌려 마력 화로들을 바라보던 루인이 그중에서 한 플라스크를 회수해 그대로 책상에 내려쳤다.
쨍그랑-
마력 융해를 마친 새까만 무언가가 플라스크 밖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마력 화로의 화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플라스크에서 나온 완성품은 강철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루인이 고문 기구처럼 무식한 가위를 집어 들더니 그대로 내려쳤다.
까앙-
완성된 시커먼 시료에 흠집 하나 생기지 않자 루인이 흡족하게 웃었다.
첫 번째 재료의 완성이었다.
여기에 혼돈마수의 수염으로 끓인 시약을 부은 후, 나머지 재료들을 조합하면 ‘단혼(斷魂)의 시약’이 완성된다.
사실 단혼의 시약은 부정한 방법, 즉 타종족의 피를 섭식하거나 이종 교배를 통해 권능을 쌓아 올린 마족들을 징벌하기 위한 일종의 고문 도구.
이종(異種)의 피로 쌓아 올린 모든 권능을 소멸시킬 수 있으며, 그 과정 속에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 만드는 형별의 재료였다.
물론 마족의 강건한 육체에 비해 심각하게 나약한 인간의 특성에 맞추었다.
하지만 아무리 인간의 특성에 맞게 배합을 조절했다고 해도 리리아가 견딜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또다시 몇 차례 알람이 울렸고.
그렇게 여덟 개의 알람이 모두 끝났을 때 드디어 루인이 시료들의 배합을 시작했다.
루인이 마력 화로 하나를 움켜쥐자.
마력 화로에서 엄청난 화력이 치솟았다.
화르르르르-
루인의 강대한 융합 마력이 모든 재료들을 통으로 녹여 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시료의 특성과 조합법에 맞게 화력이 시시각각 변화했다.
5개의 고리를 완성한 후 전력으로 융합 마력을 끌어올린 것은 처음이었기에 루인은 여느 때보다 신중한 표정이었다.
연구실을 가득 메워 가는 융합 마력의 파동.
그 순수하고 아득한 마력의 잔향에 생도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루인의 강렬한 마력의 파동은 사흘이 지날 때까지 잦아들지 않았다.
생도들이 수업을 마치고 왔을 때도, 다음 날이 밝았을 때도, 여전히 루인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마력 화로에 마력을 밀어 넣고 있었다.
인간이 일주일 가까이 아무것도 먹지도 자지도 않고 마력을 내뿜을 수 있다는 것.
마법 생도들에게 루인은 이미 경악을 넘어 경이로움이었다.
* * *
흐릿한 마력 등불을 손에 쥔 채 유적 동굴에 나타난 루인.
눈에 띄게 수척해진 루인의 얼굴을 살핀 시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루인 님!”
말없이 리리아에게 다가간 루인.
곧 그가 생도복의 주머니에서 단혼의 시약이 담긴 병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걸 먹으면 된다.”
칙칙한 혈광을 품고 있는 작은 시약병.
시론이 불길한 눈으로 단혼의 시약을 쳐다봤다.
“독약은 아니겠지?”
루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인간에게 독약보다 더한 고통을 줄 수 있는 시약.
버텨 내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고위 마족들마저 두려워하는 무서운 포션이었다.
이 포션의 이름은 혼을 끊어 낸다 하여 단혼(斷魂).
끔찍한 고통을 경험한 마족들이 소스라치게 두려워하며 붙인 이름이었다.
“…….”
말없이 단혼의 시약을 바라보던 리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루인의 시선과 얽혔다.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저 루인이 얼마나 애썼는지를.
“웬만하면 혼자 있을 때 먹도록 해.”
리리아의 성격상,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친구들에게 보이기 싫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도.”
루인이 다시 리리아에게 내민 것은 똑같은 빛깔의 시약병 두 개였다.
리리아가 의문의 눈빛을 건넸다.
“세 병을 나눠서 먹어야 하는 건가?”
“아니.”
루인이 읊조리듯 작게 말한다.
“너에게도 소중한 가족이 있을 테니까.”
“아…….”
언니.
리리아는 지금도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 언니가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의지와 상관없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눈물.
상상도 해 보지 못했다.
언니가 예전처럼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런 희망을, 그런 꿈같은 일을 한 번도 떠올려 보지 못했다.
어브렐가의 멸화(滅禍)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너…….”
벅차오르는 마음, 열꽃처럼 번져 가는 그 감정에 리리아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말없이 웃고만 있는 루인.
리리아는 결국 자신이 해야 할 말이 하나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마워.”
“더 많이 제작하려고 했는데 세 병이 한계였다. 마지막 단계의 시료 조합 땐 반드시 강대한 마력이 필요한데, 지금의 나로서는―”
“됐다.”
더욱 눈물을 터뜨리는 리리아.
“알고 있다. 네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 얼굴만 봐도 나는…….”
언니를 구할 수 있다는 희망.
리리아는 루인에게 무슨 보답을 해야 할지를 끊임없이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사람의 목숨값을 무엇으로 지불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순간.
루인과 마주한 그대로 시약병을 따서 마시는 리리아.
“…….”
불길한 무언가가 내부에서 느껴진다.
인체의 모든 감각을 파고드는 극한의 고통이 순식간에 온몸을 집어삼킨다.
하지만 리리아는 악착같이 웃고 있었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고통, 혼절할 것만 같은 정신을 미칠 듯이 부여잡았다.
털썩.
가슴을 움켜쥔 채로 무릎을 꿇어 버린 리리아를 루인이 의문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
고통은 짧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오늘 밤 내내 리리아는 비명을 지를 것이다.
강력한 마족의 육체도 버티지 못하는 엄청난 고통이 인간의 연약한 육신을 갈가리 찢어 버릴 것이다.
“……네가 준 목숨이잖아.”
온몸을 떨며 가까스로 일어나는 리리아.
그녀의 육체가 폭풍을 맞이한 앙상한 가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언니가 살 수 있다잖아.”
고통을 씹어 삼키던 리리아의 입가에 핏물이 흘러내린다.
“리리아 드리미트 어브렐.”
그녀가 마도의식을 맹세하며 혼절했다.
“너를 위해 살겠…….”
풀썩.
고통으로 흘러져 내린 그녀는 내내 웃고 있었다.
루인의 복잡한 시선이 허공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