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시론은 어이가 없었다.
등급 생도 선배들에게 연구실 키를 받았다고 해서 연구실을 사용할 수 있다?
그건 그저 출입을 허락했다는 의미지 연구실의 실험 도구와 마법 재료를 자유롭게 쓰라는 뜻이 아닐 것이다.
“루인, 마법학부의 선배들한테까지 찍히고 싶냐?”
마법사라는 족속은 자신의 공간과 도구에 민감하다.
모든 자리와 실험 도구에는 제 주인이 있을 것이고 그걸 루인이 제멋대로 다룬다면 틀림없이 또 사단이 일어날 터.
그러나 루인은 시론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으며 시야 교란 마법을 시전했다.
이내 공간을 찢으며 나타나는 헬라게아.
루인이 시커먼 공간 속으로 쑥 집어넣은 팔을 꺼냈을 땐 하나의 잔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것은 술잔이라고 하기엔 너무 컸고 장식용이라고 보기에도 칙칙하고 볼품없었다.
마치 인간이 쓰는 물건이 아닌 느낌.
생도들이 멍하게 굳어 있을 때 루인이 리리아에게 다가갔다.
“리리아. 먼저 확증이 필요하다.”
“확증……?”
나직이 고개를 끄덕이던 루인이 헬라게아 속에서 꺼낸 잔을 내밀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용족의 피를 이은 어브렐가의 전설. 순혈의 인간이 아닌 용족과의 혼혈이 사실이라면 이 잔을 통해 구분할 수 있다.”
“…….”
“이 잔에 피를 떨어뜨려라, 리리아.”
마족들이 고위 마장이 되려면 진화를 위해 다른 더러운 종과 섞이거나 다량의 피를 섭취하여 권능을 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이 잔은 그런 마계의 마족들이 일족(一族)의 순수를 증명하는 ‘순수의 잔.’
혈액에 한 종 이상의 다른 이종의 피가 섞여 있을 시, 이 잔은 짙은 푸른색으로 변한다.
우우우웅-
어느덧 허공에 떠오른 루인의 마력 칼날.
잠시 차가운 눈으로 루인을 바라보던 리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손가락을 마력 칼날에 비꼈다.
뚝뚝.
커다란 순수의 잔에 리리아의 피가 떨어지자.
잔 속의 복잡한 룬 문양을 따라 리리아의 피가 역류하기 시작한다.
잔 속의 룬 문양이 모두 핏빛으로 물들었을 때.
“어? 잔의 색이 변했다!”
잔의 색이 진한 푸른빛으로 변하자 루인이 다시 헬라게아 속으로 잔을 밀어 넣었다.
드디어 루인이 만들 포션의 종류가 확정된 것이다.
“용족의 피가 너희 어브렐가의 혈족에게 강력한 우성(優性) 효과를 일으킨 건 확실한 것 같다. 다만, 인간이 감당하기엔 너무 강력한 권능이라 부작용이 생긴 것 같군.”
“…….”
지금부터는 리리아의 각오가 중요했다. 이 포션을 먹는 일은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했다.
“네 심장병 따윈 단숨에 없앨 수 있다. 다만 그것은 용족의 피에 담긴 권능을 모두 포기해야만 가능하다. 네 마나 감응력과 같은 마법적 재능이 모두 사라진다는 뜻이지.”
지켜보던 다프네가 현명함을 드러냈다.
“이종의 피가 섞여 있던 혈통을 인간의 순혈로 되돌리는 효과를 지닌 포션인가요?”
고개를 끄덕이는 루인.
“그래. 그래서 엄청난 고통이 뒤따르지.”
침묵하던 리리아는 루인을 바라보며 진득한 눈빛을 빛냈다.
“네가 보기엔 마법의 성취를 좌우하는 건 재능인가? 아니면 노력인가?”
마법적 재능은커녕, 마법의 저변이 한 줌도 존재하지 않는 검술명가에서 태어난 루인.
그런 루인이 대마도사가 될 수 있었던 건, 마신이라는 비현실적인 존재의 가르침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악제를 향한 처절한 증오, 동료들을 지키고자 했던 강대한 의지.
그러므로 이 질문에 대한 루인의 대답은 너무나 확고했다.
“의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리리아가 웃었다.
“네 포션을 마시겠다.”
“살면서 겪을 고통을 하루 만에 모두 겪게 될 거다.”
“상관없다.”
“좋아.”
루인이 연구동을 향해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
* * *
덜컥-
갑자기 연구실에 들이닥친 루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조셀린.
지난밤의 연구로 피폐해진 그녀의 얼굴에 금방 당황스러운 감정이 떠올랐다.
“너, 너는?”
“누구야? 다들 논문을 쓰거나 수업에 들어갔을 텐데?”
수북이 쌓인 연구 서류 옆으로 슬쩍 고개를 내민 마법 생도는 볼칸.
“……루인?”
곧 루인이 통보하듯 말하며 빈자리에 앉았다.
“자리 좀 쓰지요.”
“뭐, 뭐야? 거긴 리베토의 책상……!”
가타부타 말도 없이 책상 위의 마도서와 필기도구, 각종 연구 도해들을 모두 구석으로 밀어 버린 루인.
이어 그가 선반 위에 비치되어 있는 마력 화로, 플라스크, 시약병, 스포이드 등 포션 제조에 필요한 물건들을 모조리 챙기기 시작했다.
“너! 함부로 실험 도구를……!”
함부로 실험 도구를 다루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 양도 문제였다.
연구실에 여유분으로 남아 있던 8개의 마력 화로를 몽땅 가져가 버린 루인.
값비싼 마력 화로는 모든 시약 제조의 메인이다.
아무리 연구가 급해도 보통 한 명당 한두 개로 제한되는 물품인데 그걸 몽땅 가져가 버리다니!
당연히 마력 화로가 8개니 플라스크건 시약병이건 루인은 보이는 대로 죄다 주워 담고 있었다.
순식간에 선반이 텅텅 비어 버린 상황.
아니 저 미친놈은 8개의 마력 화로를 도대체 어떻게 구동하겠다는 거지?
무슨 마력이 무한이라도 되나?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설명이라도 좀 해 봐!”
“열쇠를 준 건 선배입니다.”
“……뭐?”
“연구실을 쓰라고 준 것 아닙니까?”
“…….”
어떻게 그걸 그렇게 받아들이는 거지?
선배들이 불렀을 때 출입하라고 준 것이지 연구실을 쓰라고 준 게 아니다.
아무리 무등위라고 해도 1년 가까이 아카데미 생활을 한 녀석이었다.
마법사들은 자신의 공간이 훼손되는 것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걸 충분히 경험했을 것이다.
있는 대로 화가 치민 볼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때였다.
루인이 웬 자루를 하나 꺼내더니 그대로 책상 위에 쏟아 내기 시작한 것.
드르르르르-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느낌의 재료들이었기에 조셀린이 화들짝 놀라며 루인에게 다가갔다.
“후, 후배님. 이게 다 뭐야?”
흐릿한 빛을 머금고 있는 약초들.
온갖 용액이 담긴 형형색색의 시약병들.
기이한 형태의 숫돌과 마치 고문 기구처럼 흉악해 보이는 절단 도구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루에서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진 괴물체.
“헐?”
스파크처럼 간헐적으로 일렁이고 있는 마력 뇌전.
조셀린이 황당한 얼굴로 볼칸을 쳐다봤다.
“저거…… 내가 알고 있는 그거…… 맞지?”
“아니 미친……!”
그것은 커다란 마정(魔精)이었다.
그 값비싼 마정석의 근원 촉매.
도감에서 수도 없이 보았지만, 저만한 크기의 마정, 그것도 실체화된 뇌전이 저렇게 강렬하게 얽혀 있는 마정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도대체 품고 있는 마력의 질이 얼마나 순수하길래?
저 정도로 엄청난 양질의 마정이라면 마정석을 수십 킬로그램을 제조하고도 남을 것이다.
볼칸은 루인의 자루에서 떨어져 나온 저 무식한 마정의 가치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때.
책상에 앉은 루인이 가루나 용액 따위가 담긴 시약병을 차례로 분류하더니.
텁.
두 손으로 마정을 우악스럽게 움켜쥔다.
볼칸과 조셀린의 입이 크게 벌어졌고.
이내 점점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는 마정.
“마정을 손으로 움켜쥐어?”
“미, 미, 미친!”
마정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마력 생물과 비슷하다.
외부의 반응에 극도로 민감하며, 자그마한 자극에도 마력 얽힘 현상이 붕괴되어 순식간에 평범한 돌로 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때문에 마도학자들은 마정에 담긴 마력의 성질을 살피고 양을 가늠하는 데만 수개월, 길게는 몇 년이 걸리기도 했다.
그런 연구를 모두 마친다 해도, 도식화된 마력회로를 새기고 추출하는 시간 역시 엄청나게 소요된다.
그런데.
마정이 내뿜고 있던 불규칙적인 마력의 흐름, 그런 마력 얽힘 현상이 잦아들며 일정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즉시 루인의 수인이 허공에 맺힌다.
거세게 맥동하기 시작한 융합 마력은 루인의 염동과 의지에 따라 그대로 하나의 마력진으로 화했다.
파파팍!
더욱 멍해지는 볼칸과 조셀린.
커다란 마정에 통째로 새겨져 버린 미지의 마력진.
복잡한 마력회로가 눈부신 형광빛을 머금으며, 마정이 뿜고 있던 마력과 동화(同和)되어 버린 것이었다.
볼칸은 그런 마력진의 기하학적 형태를 끈질기게 관찰하고 있었지만 도무지 회로에 담긴 기전이나 수법을 파악할 수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마법진.
얼핏 룬(Rune) 문양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아는 마법의 체계에 저런 독특한 룬 조합 술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데 이어진 루인의 행동에 볼칸은 또 한 번 정신이 나가 버렸다.
마정의 마력 추출이 시작된다.
일정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한 마정의 마력이 서서히 마법진을 핵(核)으로 삼아 고유의 마력 파장을 내뿜는다.
다시 맺혀 가는 루인의 염동.
평행하게 그어진 여덟 개의 기다란 마력회로.
화르르르르-
순식간에 타오르기 시작한 마력 불꽃들을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볼칸과 조셀린.
루인이 여덟 개의 마력 화로를 저런 무식한 방식으로 구동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체 어떤 마도학자가 5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마정의 연구를 마치고 마력진을 새기며 곧바로 마력 추출에 임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이게 말이 돼?”
“자, 잠깐! 불꽃의 크기가 달라!”
“뭐?”
정말로 여덟 개의 마력 화로, 각각의 불꽃의 크기가 모두 달랐다.
마력회로 단계에서 이미 필요한 화력을 조절해 버린 것.
물론 이건 볼칸과 조셀린에게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시료 조합법에 따라 융해, 기화 따위에 필요한 화력은 천차만별.
또한 마법 재료들은 성질에 따라 각각의 끓는점이 다른 경우가 많았고, 이 때문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화력을 미세하게 조정해 나가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므로 마력회로 단계부터 이미 모든 화력의 조절을 끝내 버린 의미는 단 하나였다.
자신이 가져온 모든 재료의 특성을 이미 이해하고 있다는 것.
예상대로 루인은 여덟 개의 플라스크에 시약이나 가루 따위를 모두 채워 넣더니, 마치 평생 해 온 듯한 빠른 손놀림으로 마력 화로 위에 얹기 시작했다.
“…….”
웬만한 귀족가의 일 년 재정과 맞먹는,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값어치를 지닌 마정을 한낱 마력 화로의 땔감으로 써 버리는 기상천외한 광경.
당연히 볼칸은 그런 루인을 미친놈 보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보글보글.
루인은 끓거나 융해되기 시작한 여덟 개의 마력 화로들을 묵묵히 살피더니, 느긋하게 팔짱을 끼며 책상 위에 두 다리를 올렸다.
어느새 눈마저 감아 버린 무등위 생도.
“호호, 두 눈으로도 지켜보고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네.”
오직 마도학자를 꿈꾸며 생도 생활을 보내고 있는 조셀린.
당연히 그녀는 완벽에 가까운 루인의 실력에 넋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미리 알고 있는 재료라고 해도 공장에서 찍어 내지 않는 이상 세부적인 특성은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한데 미세한 화력 조정 하나 없이 눈을 감아 버렸다는 것.
그 말은 자신의 재료 조합식, 그 모든 제조 과정에 대해 완벽한 확신이 서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난 저 값비싼 마정을 고작 마력 화로의 연료로 쓰고 있다는 게 가장 놀랍다.”
“그것도 그렇긴 해.”
거대한 크기, 게다가 놀라운 마력의 밀도를 내뿜고 있는 무시무시한 마정.
마정석으로 만든다면 왕국의 전략 병기, 마장기의 동력으로도 쓸 수 있을 만한 엄청난 가치.
“대체 왜 이렇게 의미 없이 마정을 써버린 거냐?”
루인이 실눈을 떴다.
“심상 수련을 하고 있습니다.”
“뭐?”
그럼 자신의 마력이 모자라거나 아까워서가 아니라 이 와중에도 이미지를 하기 위해 마정을 써 버렸단 말인가?
조셀린이 볼칸을 쳐다보며 웃었다.
“아무래도 마법학부에 역대급 미친놈이 등장한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