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이들이 같은 경험을 향유하는 건 아니었다.
마법사를 꿈꿔 오면서 결코 허투루 살지 않았다고 자부했던 생도들.
하지만 지난 한 달은 그런 생도들의 믿음이 모조리 깨어지는 시간이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부서지게 노력하고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구나 라는 걸 매일매일 확인하는 순간들.
지독한 달리기 훈련에 입안의 단내가 마를 날이 없고, 완성한 서클을 몇 번이고 부수고 재구성하니 매일매일 멘탈이 가루가 된다.
일상이 이 지경에 이르니 수면은 당연한 게 아니라 보상으로 변질됐다.
잠을 잘 수 있는 고작 3시간이, 아무 생각 없이 쓰러져 잘 수 있는 그 꿈결 같은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해졌다.
이래서 인간을 적응의 동물이라고 한 걸까.
과장이 아니라 3시간의 짧은 수면, 생도들은 그 하나만으로 버틸 수 있었다.
생도들의 지난 한 달은 웬만한 생도들의 일 년 치 수련에 근접했다.
“아, 눈이다.”
“눈…….”
에어라인 아카데미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지상에서 맞이하는 눈발과는 느낌부터가 달랐다.
달리기를 마친 후 훈련장의 모퉁이 계단에서 쉬고 있던 생도들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발은 지상처럼 차분하게 하강하지 않았다.
고도 때문에 길을 잃은 듯 어지럽게 휘날리고 있는 눈발들.
시론은 그런 눈발이 마치 자신의 인생 같았다.
“내 앞날처럼 어지럽군. 미래가 보이지 않아.”
“…….”
“…….”
생도들이라고 그 심정이 다를까.
불투명한 미래에 이 짓궂은 날씨처럼 마음이 온통 시리다.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 건 역시 재구축 수련법.
달리기는 확연히 달라지고 있는 체력과 활력 때문에 직관적으로 성과가 드러나고 있었지만.
재구축 수련법은 한 달이 지나도록 과연 이게 맞나 싶은 마음만 반복될 뿐이었다.
어떤 날은 단숨에 과거의 고리를 모두 회복하는 운이 좋은 날도 있었다.
그러나 다음 날이면 여지없이 고리를 부숴야 하니 멘탈이 남아날래야 남아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아…… 하아…… 너희는 심상과 감응력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하는 건가……?”
또 저 얘기.
시론이 얼굴을 찌푸리며 리리아의 시선을 외면했다.
오직 그녀만이 재구축 수련법에 열정적이었다.
매일매일 지옥 같은 수련을 반복하면서도 불평불만 한 번 늘어놓지 않는 강철의 리리아.
“후우…… 이대로라면 언젠가 7위계도 가능할 것 같다.”
매번 2, 3개의 고리를 맺는 정도로 끝나면서도 대체 저런 식의 확신이 어떻게 가능한 건지 시론은 이해할 수 없었다.
“넌 참 뜬금없이 긍정적이야.”
누구보다도 음침한 녀석이 가장 긍정적인 마인드를 보여 준다.
어휴, 7위계라니.
6위계와 7위계 사이의 간극은 1위계부터 6위계까지를 모두 합한 난이도보다도 높다.
평생 동안 수련과 연구에 매진하고도 6위계 이상을 밟아 보지 못하고 도태되는 마법사가 전체의 구 할이 넘는 수준.
어떤 현자는 7위계에서 8위계의 경지에 오르는 것보다 7위계를 정복했던 것이 더욱 어려웠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모든 마법사들의 통곡의 벽.
천재, 혹은 그 이상의 찬사를 들으며 성장한 마법사들조차도, 7위계의 벽 앞에서는 범재와 다름없이 공평했다.
실력이나 천재성보단 운과 깨달음의 영역이었다.
<부러워. 루인 님만 허락했다면 나도 해 보는 건데.>
아, 저 여자마저 신경을 긁어 대다니.
시론이 열이 뻗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부럽다 내가! 대체 이 짓이 뭐가 부럽다는 거냐! 내가 미쳤지! 괜히 저 미친놈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여기까지…… 하…….”
웬일인지 루인은 루이즈에게만큼은 재구축 수련법을 허락하지 않았다.
시론이 수건을 걸친 채 새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다가오는 루인을 노려봤다.
“왜 하고 싶다는데 쟨 말리는 거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루인.
“루이즈가 길을 걷다 주운 건 갓핸드급 아티펙트다.”
“뭐……?”
“그 정도의 행운은 버릴 수가 없지.”
루이즈는 마도사 슈레이터가 남긴 마도를 얻었다.
그런 그녀가 재구축 수련법을 했다간 자칫 절대언령을 잃을 수가 있었다.
“내가 재구축 수련법을 하지 않는 이유와 같다.”
루인이 구축한 융합 마력과 헤이로도스의 마법 역시 갓핸드급 아티펙트란 뜻.
더구나 루인은 광휘의 마법사 헤스론보다도 더욱 드높은 경지를 이룩한 대마도사였기에 굳이 그의 수련법을 따를 이유는 없었다.
그런 회귀의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시론은 오로지 루인이 재수 없기만 했다.
“와, 진짜 반박이 안 된다 반박이. 그래 너 잘났다! 너무 잘나서 내가 막 눈이 부신다!”
“시끄럽다.”
그런 시론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세베론.
루인을 만나면서 시론은 왠지 모르게 과거와는 달라져 가고 있었다.
무겁고 진중했던 성격이 점점 활달하고 익살스럽게 변하고 있는 것이다.
가문의 기대, 현자의 손자라는 무게감에서 해방되자 그는 원래의 활발한 성격을 되찾아 갔다.
세베론은 시론의 그런 변화가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제 곧 1월인가.”
르마델 왕국의 기원제가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루인은 아버지와 데인을 다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신의 바람대로 아버지는 전성기의 기량을 모두 회복했을지, 또 데인은 얼마나 성장했을지가 너무나 궁금했다.
오드를 감싸고 있는 다섯 개의 고리를 세심하게 살피는 루인.
새로 맺은 고리가 원래의 고리와 어울리며 점차 적응을 해 나가고 있었다.
자신이 탄생시킨 융합 마력은 일반적인 마력에 비해 극도로 이질적이라서, 고리를 맺을 때마다 기존의 고리와 쉽게 조화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순간을 세심하게 살펴야 했다.
조금이라도 이상 반응을 보이면 재빨리 마력을 조정해야 했고 심상을 다듬어야 했다.
루인은 그렇게 새로 맺은 다섯 번째 고리의 미세한 반응 하나하나에 극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이제 구경하는 사람도 없네.”
더 이상 훈련장에 나와 구경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법 생도들이 훈련장에서 달리기를 하는 모습이 처음엔 이질적이겠지만 이젠 그것도 아카데미의 일상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러게요. 기사학부 생도들도 이젠 포기한 듯해요.”
교묘하게 시비를 걸어오던 기사 생도들도 얼마 전부터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엔 온갖 구실로 시비를 걸더니 루인의 무심한 대응에 지쳤는지 포기라도 한 모양.
가끔은 호기롭게 결투를 신청하던 기사 생도들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브훌렌의 측근들에 의해 모조리 제지되었다.
무등위 생도의 반란 ‘칼날 지배자’의 등장으로 어지러웠던 아카데미가 다시 소중한 평화를 되찾은 것이었다.
그때.
“오늘부터는 기초 무투술을 수련하겠다.”
모두의 고개가 루인을 향해 부서질 듯 꺾어졌다.
드디어 워메이지에 한 발 다가설 수 있다니!
흥분한 시론이 콧김을 뿜었다.
“그, 그게 정말이냐! 루인!”
“그래.”
어려서 그럴까.
한 달 남짓한 시간 만에 생도들의 활력은 두 배 이상 강화되어 있었다.
특히 시론의 활력은 남달랐는데, 이젠 루인과 함께 나란히 뛰고도 숨결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여생도 사이에선 루이즈의 체력이 가장 돋보였다. 이어서 다프네와 슈리에, 그리고 리리아 순.
의외로 리리아는 육체적인 재능이 미진했다.
지금도 가슴을 움켜쥔 채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하아…… 하아…….”
오늘따라 유난히 숨을 쉬기 어려워하는 리리아의 모습에 루인의 눈빛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빨리 성장하고 싶은 마음은 십분 이해한다만 너무 힘들면 쉬어도 좋다.”
루인은 리리아의 건강이 걱정되어 이미 여러 번 휴식을 권고한 상태.
하지만 리리아는 그런 루인의 조언을 무시하며 미련할 정도로 달리기 수련에 집착하고 있었다.
“멸화(滅禍)…….”
힘겹게 내뱉은 리리아의 음성.
그리고 그녀가 말한 멸화는 분명…….
“어브렐가의 가언. 맞지?”
<기쁨 없이 도약하라. 고통 속을 나아가라. 멸화 앞에서도 진리를 궁구하라.>
세베론은 보안청에서 들었던 어브렐가의 가언을 기억해 냈다.
멸화(滅禍)란 한 가문의 가언에 쓰이기에는 너무 파괴적이고 불길한 단어.
그런 특이한 가언이었기에 다른 생도들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어브렐가의 직계 자손은…… 엄청난 마나 친화력을 타고난다…… 하지만…….”
리리아가 스스로 가문의 비밀을 밝혔기에 시론은 드디어 그녀의 비밀을 이야기해 줄 수 있었다.
“어브렐가는 고대 용족(龍族)의 피를 이었다. 그들의 심장은 마나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데 뛰어난 권능을 발휘하는 매질이지.”
모두가 시론을 바라봤을 때.
“하지만 그들의 심장은 자그마한 질병에도 쉽게 멈춘다. 마법사로서 축복받은 재능을 타고나지만 성장기를 거친 후에 절반 정도는 죽고 만다. 축복이자 동시에 재앙이지.”
멸화.
생도들은 그 무서운 단어가 왜 한 가문의 가언 속에 담길 수 있는지를 그제야 이해했다.
마법사로서 최고의 재능을 타고나지만 20대 전후로 혈족의 절반이 사라지는 무시무시한 재앙.
그런 멸화의 가문이라면…….
“그랬군.”
루인은 어브렐가의 가풍(家風)을 비로소 깨달았다.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혈족들.
그런 가문이 오래도록 결속을 유지하는 방법은 너무나도 뻔했다.
서로에게 정(情)을 붙이지 않는 것.
슬퍼할 시간에 더욱 마법을 닦고 그리움이 치밀 순간에 감정을 채찍질한다.
리리아는 무심(無心)만을 강요받고 무정(無情)만을 배웠을 것이다.
사람들과 얽히는 방법 대신, 어떻게 하면 생존할 수 있는가를 평생토록 배워 왔을 것이다.
모두의 저릿한 시선이 리리아에게 모였다.
이런 동정의 시선을 받기가 싫어서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는데.
리리아는 말없이 친구들의 시선과 얽히며 허탈하게 웃었다.
왜 가문의 비밀을 스스로 꺼냈는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리리아.”
루인은 하루를 평생처럼 살고자 하는 그녀의 열정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스스로를 모두 태워 하얀 재만 남게 되더라도, 한 치의 후회 없이 죽겠다는 그녀의 열망에 깊은 존경을 보냈다.
대마도사에게 상대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삶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한 인간의 향유(享有).
고아하고 숭고한 그녀의 열정에 루인은 대마도사의 자존감조차 내려놓을 수 있었다.
“너는 반드시 멸화의 저주에서 살아남아 마도사가 될 수 있을 거다.”
리리아의 동공이 점점 벌어졌다.
미래는 깨진 유리와 같아서, 누구도 함부로 예측할 수 없다.
그런데도 루인은 다른 이의 삶을 말하면서도 확신하고 있었다.
리리아는 그의 근거가 궁금했다.
“왜지?”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화끈.
살면서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감정이 몰아친다.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당황해하던 리리아가 뜬금없이 화를 냈다.
“뭐, 뭐라는 거냐! 네놈이 뭐라고……!”
루인이 휘날리는 에어라인 아카데미의 깃발을 나직이 응시했다.
르마델 왕국의 기원제까지는 보름.
그 정도의 시간이라면 충분했다.
“보름 안에 포션 하나를 만들어 주마. 인간의 심장병 따위는 단숨에 치료할 수 있는 절대적인 비약(秘藥)을.”
모든 생도들이 황당해했다.
“포, 포션?”
“비약이라니?”
연금술이나 포션의 제조법은 마도학자의 역량, 즉 마법사 중에서도 소수의 전유물이었다.
게다가 가문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피에 담긴 저주의 불치병을 순식간에 치유하는 절대적인 포션이라니?
신성력을 다루는 성직자들도 그런 건 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그런 엄청난 효능의 포션 조합법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시설이 없잖아요? 게다가 재료는요?”
루인이 공간 속에 스며들어 있는 헬라게아를 응시하며 은은하게 웃었다.
“재료는 많아. 그리고.”
주머니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 드는 루인.
생도들이 붉은색으로 ‘3F-14’라는 문구가 새겨진 키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선배들이 아주 좋은 선물 하나를 주더군.”
리더 생도들의 연구실 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