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검술의 원형……?”
시론의 의아한 표정을 살피던 루인이 선 채로 말했다.
“어떤 마법사라도 좌표계를 지정할 때만큼은 반드시 ‘근일점’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무리 학파가 다양해도 태초의 마법사 테아마라스의 마법으로부터 뻗어 나간 갈래이기 때문이지.”
“아…….”
“검술 역시 마찬가지다. 수십만 갈래로 뻗어 나갔어도 큰 줄기에서 변형된 형태일 뿐, 크게는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두 가지?”
과연 47만 개나 되는 검술의 유파를 그렇게 단순하게 두 개로 압축할 수 있는 건가?
“그 두 개의 대분류는 뭐죠?”
다프네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루인의 손이 잔상처럼 허공에 번져 갔다.
휙-
“빠른 검(快劒).”
이번엔 느릿하지만 힘이 느껴졌다.
후우웅-
“무거운 검(重劒).”
뭔가 대단한 분석일 줄로만 알고 기대했던 생도들의 얼굴에서 실망감이 서렸다.
“에이, 그게 뭐냐? 그 정도를 뭘 그리 분석이랍시고.”
피식 웃어 버리는 루인.
본디 진리와 근본에 가까워질수록 모든 것이 단순해진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어떤 고차원적인 지혜를 탐구하는 일보다도 어렵다.
“빠른 검은 변화에 능하다.”
휙휙-
휘휘휙-
루인의 손이 떨쳐 내는 놀랍도록 빠른 궤적의 잔상에, 생도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쾌검에서 파생된 환검술이다. 여기서 투기의 속성, 정신적인 추구, 지향하는 가치에 따라 수천, 수백 개의 유파가 탄생했지.”
루인의 손날이 단순하지만 놀라운 속도의 직선으로 쏘아졌다.
“점과 점을 잇는 최단 속도를 추구하는 이 검술은 암살검이다. 모든 방어적인 검술을 배제하며 더욱 발전한 극쾌의 검술. 레인저나 암살자들이 쓰는 검술이 여기에 속한다.”
루인의 손이 이번엔 부드럽게 흔들렸다.
“남부 왕국들의 주류 검술인 유검술이다. 방어에 취약한 쾌검의 단점을 보완한 검술이지.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하여 자연스럽게 제압하는 데 특화된 검술이다.”
그 밖에도 루인은 쾌검에서 파생된 소분류의 검술들을 차례로 시연해 보였다.
금방 리리아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왜 쾌검에서 파생된 검술들만 계속 보여 주는 거지?”
루인은 중검류를 한 차례도 보여 주지 않았다. 당연히 생도들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결투로 느꼈을 텐데.”
“……결투?”
생도들은 황혼의 중검을 상대하던 루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중검은 마법사에게 그다지 치명적이지 않아. 메모라이징 마법을 활용한 유틸성, 적당한 체술과 경험이 어우러지면 쉽게 극복이 가능하다.”
비록 루인이 헤이로도스의 술식과 강력한 무투술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 모든 걸 감안한다고 해도 황혼의 랭커들은 너무 무기력하게 패배했다.
6성의 기사가 갖는 위상과 위력을 고려하면 실로 허탈할 정도.
“우리 마법사들의 극상성은 쾌검류다. 특히 초를 쪼개며 짓쳐 오는 일격필살의 쾌검. 그런 암살검 앞에서 무사할 수 있는 마법사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아…….”
루인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경험 많은 마법사들은 쾌검술을 구사하는 기사와의 조우 시 시전 시간이 짧은 초급 헤이스트를 걸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간다. 텔레포트 마법을 시전할 시간조차 무의미하다는 걸 아는 거지. 대개 첫 시전을 맺을 때 죽게 된다.”
동굴의 바깥쪽을 응시하는 루인.
“그리고 우리 르마델 검술의 7할은 쾌검, 그중에서도 환검(幻劒)이다.”
급격하게 표정이 어두워지는 생도들.
“렌시아가의 환상검(幻像劒)을 추종하는 검술 유파들이 왕국의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지.”
그제야 생도들은 루인이 왜 이런 강론을 늘어놓는지를 이해했다.
앞으로 자신들이 상대할 기사들의 절반 이상이 환검류를 구사한다는 것.
마법사와의 극상성, 그런 위협적인 상대가 그만큼 주변에 깔려 있다는 뜻이었다.
“그럼 그 황혼 녀석들은 왜?”
포효하는 황혼.
비대한 근육을 자랑하며 무식한 중검을 추구하는 그룹.
“당연히 중검을 추종하는 기사들도 있지. 왕국에 뿌리를 내린 환검의 저변을 물리치고 언제나 기수를 차지하는 건 중검의 사자검(獅子劒)이니까.”
“아!”
위대한 하이베른가.
그 포효하는 사자의 가문을 잊고 있었다.
한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루인은 한편으로 의문을 품고 있었다.
하이베른가의 시조 사홀이 자신에게 심상으로 남겨 준 것은 중검보다는 환검에 가까웠기 때문.
아마도 그가 생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무언가 중대한 마음의 변화를 맞이한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추측일 뿐.
아득한 심상으로 남아 있는 사홀의 검술을 루인은 아직 하나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없었다.
“그럼 쾌검을 상대할 수 있는 특별한 마도(魔道)가 있다는 거냐?”
루인이 심상에 빠져들듯 슬며시 눈을 감았다.
“지금 너희들의 눈앞에 기사가 서 있다고 이미지해라.”
그 말에 생도들도 다 함께 눈을 감았다.
각자의 의식 속에서 한 명의 기사가 떠올랐을 때 루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내가 말한 대분류로 나눠 봐라. 쾌검술을 쓰는 기사인가? 중검술의 기사인가?”
동시에 눈살을 찌푸리며 깨어나는 생도들.
“검술도 펼치지 않았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우리가 무슨 점쟁이도 아니고 그냥 서 있는 모습만 보고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루인이 눈을 뜨며 다시 일어났다.
“쾌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동작은 발검(拔劍)이다. 최단 시간, 최적의 동선을 추구하지. 그런 발검 수련을 오랫동안 하게 되면 반드시 미세하게 팔 길이가 차이 나게 된다.”
“팔 길이……?”
“또한 쾌검술은 점(點)과 선(線)에 집착한다. 점과 점을 잇는 최대 속도, 절제된 선이 추구하는 극한의 효율, 그러므로 그들은 검을 잡기도 전에 보는 법부터 배운다.”
“보는 법……?”
“어둠 속에서 눈을 단련한 인간은 반드시 특유의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 댈 수밖에 없다. 온갖 시각적 자극으로 어지러운 와중에서도 점을 타격하거나 정확한 궤적의 검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 그래서 나는 차갑게 갈무리가 되어 있는 기사의 눈빛을 싫어한다. 십중팔구 쾌검의 기사거든.”
이후에도 루인은 쾌검술을 다루는 기사의 특징을 한 시간 이상 강론했다.
“……또한 신발의 뒤축이다. 쾌검술의 기사는 짧은 보폭을 자주 쓰며 순간적으로 강하게 디딤 발을 딛는 경우가 많아서 신발을 오래 쓰지 못한다. 신발의 뒤축이 눈에 띄게 닳아 있다면 그 역시 경계해야 한다.”
“…….”
“갑주를 입고 있지 않다면 어깨의 근육을 살피는 것도 도움이 된다. 쾌검의 기사는 꾸준한 힘을 내는 근육보다 순간적인 근력, 즉 속근이 발달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중에도 이곳.”
루인이 생도복 상의를 벗자 그의 탄탄한 상체가 드러났다.
루인이 광배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중간 부근의 볼록한 근육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쾌검술을 익히면 반드시 이곳의 근육이 발달한다.”
한 시간 이상 루인의 열정적인 강론을 듣던 생도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경악으로 굳어져 있었다.
이건 차라리 광기(狂氣)에 가까웠다.
루인이 얼마나 쾌검술을 싫어하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강론.
마법사가 검술을 연구한다면 얼마나 무서운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다.
문제는 이런 무시무시한 지식은 결코 경험 없이 탄생할 수 없다는 것.
이제 생도들에게 루인의 정체란 의심과 궁금증을 넘어 불가사의에 근접하고 있었다.
“……도대체 넌 이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시론의 강렬한 의문.
이게 한두 번의 대결로 습득할 수 있는 지식일까?
아니.
적어도 수백, 수천 번의 생사를 건 혈투를 겪고 나서야 완성할 수 있는 지식의 체계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이런 섬뜩한 지식은 결코 책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천재라고 해 두지.”
시론이 뒤로 드러누우며 가슴을 쳤다.
“아! 정말 때리고 싶다! 진짜 더도 말고 딱 한 대만 찰지게 때리고 싶다!”
그렇게 시론이 발광하고 있을 때 리리아의 질문이 이어졌다.
“상대가 쾌검술을 구사하는 기사임을 판별했다면 그다음은? 대응법은 왜 가르쳐 주지 않는 거지?”
“그건 말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갑자기 루인이 염동을 일으키며 수인을 맺었다.
허공에 맺혀 가는 마력회로의 결을 살피던 리리아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뭐, 뭐 하는 거야?”
루인이 자신의 몸에 새긴 것은 다름 아닌 헤이스트의 술식.
헤이스트(Haste)는 인간의 생명력과 활력을 순간적으로 증폭시킨다.
당연히 인간의 생명력과 활력은 한정된 자원 즉, 미래의 자원을 당겨쓴다는 의미.
그러므로 헤이스트와 같은 버닝(Burning) 계열의 술식은 절대 함부로 남용해선 안 된다.
한데 루인은 특별히 급박한 상황도 아닌데도 헤이스트를 남발한 것이다.
“통상적으로 헤이스트는 술식의 등급에 따라 다르겠지만 인간의 활력을 순간적으로 열 배가량 증폭시킨다. 덕분에 마법사는 순간적으로 기사에 준하는 몸놀림이 가능하지.”
다프네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여기서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요?”
“하지만 나와 너희들의 활력이 같을까?”
스스스슥-
루인의 몸이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너무 빨라 시야로도 좇을 수 없는 그의 움직임.
미약한 발소리만이 간헐적으로 작게 들려올 뿐이었다.
동굴 특유의 적막이 없었다면 생도들은 루인이 아예 사라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스슥-
루인이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로 다시 생도들의 전면에 등장했다.
“정확히 수치화할 순 없지만 내 활력은 최소 너희들의 3배 이상일 것이다. 너희가 헤이스트를 활용해도 상대할 수 없는 쾌검의 기사를 나는 상대할 수 있다는 의미지. 그리고 인간의 활력은 폐활량에 정확히 비례한다.”
루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생도들의 표정이 묘해진다.
또 묘하게 하나의 해법으로만 귀결되는 느낌적인 느낌.
“결국 또 달리기란 소리예요?”
슈리에의 당황한 시선, 그리고 이어진 세베론의 질문.
“그럼 결국 달리기가 정신의 수양, 안정적인 언령, 헤이스트의 효과 상승 등을 모두 가능하게 한다는 거냐?”
“지금으로선 너희들의 역량을 가장 빠르게 끌어올릴 수 있는 수단이지.”
“아니 왜 매번 결론이 똑같은 거냐고!”
“우린 마법사지 마라토너가 아니잖아요!”
또다시 들려오는 무심한 루인의 목소리.
“워메이지의 무투술은 헤이스트로 곱연산된 너희들의 활력 증가 수치가 적어도 지금의 두 배에 이르렀을 때 시작할 수 있다. 그 이하 단계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어.”
다프네의 의문이 이어진다.
“그럼 쾌검술의 기사를 만날 때마다 헤이스트를 활용하란 말인가요? 그렇게 헤이스트를 남용하면 수명의 반도 못 살고 죽을 텐데요?”
루인이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오히려 반문했다.
“넌 참 똑똑해 보이다가도 한 번씩 실없는 질문을 하는군.”
“네……?”
빙그레 웃는 루인.
“간단하다. 수명을 늘리면 된다.”
“그, 그게 무슨?”
“마법사에겐 수명을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을 텐데?”
멍하게 굳어져 있던 생도들이 서로를 번갈아 쳐다봤다.
“지금 이 녀석 무슨 소릴 하는 거지?”
“8위계 이상. 그러니까 현자의 경지를 말하는 거 같은데요…….”
루인이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너희들 모두 현자가 되면 된다.”
시론이 벌떡 일어나 루인에게 뛰어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