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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베른가의 대공자-109화 (109/187)

<109화>

르마델 왕국을 살아가는 백성들의 뇌리 속에서 하이베른가의 이미지란 우주 위에 떠 있는 별 같은 신비(神祕)였다.

아득하게 드높고, 또한 영광의 이름이며, 무언가 상상할 수 없는 권위가 그려지는 그런 느낌.

하지만 그들의 권력에는 실체가 없었다.

체감되지 않아 그저 신비한 가문, 그게 다인 것이다.

사실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과연 하이렌시아를 압박할 정도의 역량은 있는 건지 생도들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문제는 왕국의 은자(隱者)처럼 살아가는, 어쩌면 드래곤들보다 더 신비한 가문을 무슨 수로 끌어들이느냐였다.

그들에게 하이렌시아가를 견제할 수 있는 힘과 권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애초에 세상의 일에 관심이 없는 가문.

당연히 천공의 소녀는 반사적으로 의문을 드러냈다.

“기수 쟁탈전을 제외하면 하이베른가가 왕국의 전면에 나선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기수 쟁탈전.

르마델이 추구하는 기사의 문화와 가치를 상징하는 행사.

가장 드높은 영광의 주인공을 가리는 자리이자, 왕국의 모든 이목이 집중되는 기사들의 대관식.

하이베른은 이 시기를 제외하면 왕성에 출입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그것보다, 고작 생도의 신분인 네가 무슨 수로 그 명예로운 대공가를 움직일 수 있다는 거지?”

생동하는 화염, 유리우스의 끈적한 눈빛.

그러나 벌써 칼날 지배자라는 괴물 같은 이명을 쟁취한 자신들의 무등위 후배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하이베른가는 이번 기원제에 참가합니다.”

왕국의 새로운 한 해를 축복하며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는 기원제(祈願祭)는 르마델의 왕실과 귀족가에 있어서 중요한 행사였다.

“내 기억이 잘못된 거야? 하이베른가가 기원제에 참여한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은데?”

보통은 참여하지 않더라도 하례를 통해 후원 정도는 하게 마련인데, 하이베른가는 그런 기원제에 하례 사절 한 번 보낸 적이 없었다.

루인은 그저 웃고만 있었다.

아버지와 데인이 자신의 조언대로 움직이고 있다면 이번 기원제에 반드시 참여할 것이다.

기원제는 일종의 분기점.

왕국의 기수가이자 대공 가문 하이베른이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하는 날이었다.

“어쨌든 제가 준비한 마장기는 하이베른가입니다. 선배님들은 그 이후를 예측하고 대비해야 합니다.”

하나같이 얼굴을 구기는 등급 생도들.

“네 말대로 하이베른가의 후원을 이끌 수만 있다면 우리 아카데미의 판도는 충분히 바뀔 수 있다.”

아무리 왕국의 북부에서 은자처럼 지내고 있는 가문이라고 해도 이 르마델 왕국의 기수가다.

명예와 영광을 좇는 기사 생도들, 그들의 감성의 저변에는 왕국의 기수가를 향한 존경과 흠모가 반드시 자리 잡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가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믿고 움직이기에는 하이베른가는 너무 신비로운 가문이다. 확신을 가질 만한 근거가 너무 부족해.”

루인의 침잠한 눈빛이 유리우스의 시선과 얽혔다.

“지금 근거를 말하라고 한다면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음…….”

유리우스의 표정이 복잡해졌을 때 볼칸이 끼어들었다.

“나는 이 녀석의 말을 믿어 보겠다.”

모두의 놀란 표정이 볼칸을 향했다.

천 년에 가깝게 전승자가 없었던 헤이로도스의 술식과 워메이지의 무투술을 발휘하는 녀석.

이미 그 하나만으로도 해석할 수 없는 놈인데 더 심한 불가사의가 튀어나온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한데 놀랍게도 천공의 소녀마저 볼칸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구체적으로.”

“그동안 렌시아가의 후원 생도들이 저지른 교칙 위반 사례와 증거 수집, 교수들과의 유착 관계 등을 추적하는 일이다. 열상 마법으로 찍은 사진, 피해자들의 증언 따위를 녹음하는 그런 직접적인 증거면 더욱 좋다.”

인상을 찡그리는 천공의 소녀.

“놈들의 뒤를 캐란 말인가?”

“쉽게 말하면 그런 셈이지.”

“…….”

고고한 자존감을 지닌 마법 생도들이 할 법한 일은 아니었다.

남의 뒤를 캐는 일 따위는 뒷세계의 탐정이나 하는 일이었으니까.

루인이 어느덧 뒤돌아선 채로 선배 생도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뜻을 밝혔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특별한 일이 생긴다면 다시 찾아오죠.”

그때.

“헤이로도스의 술식을 보여 줄 수 있나?”

처음으로 입을 연 그림자 혹한 타가옐.

그의 차가운 눈을 바라보던 루인이 일말의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싫다.”

덜컥.

루인이 문을 닫고 사라진 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천공의 소녀가 생도들을 향해 물었다.

“저 녀석이 존댓말과 반말을 하는 기준이 뭐지?”

“그러게? 왜 나한텐 존댓말을 하다가 타가옐에게는 반말을 하는 거야?”

유리우스가 타가옐과 천공의 소녀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듣고 보니 그렇다는 듯, 묘한 눈빛을 빛내던 볼칸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인정하고 인정하지 못하고의 차이겠지.”

본인은 선배로서 인정을 받았단 뜻.

그렇게 연구실에 모인 등급 생도들은 루인의 미묘한 예법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한참을 더 떠들고 있었다.

* * *

어떤 힘든 수련이라도 계속 반복을 하다 보면 어느 정도 적응이 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이 무식한 ‘재구축 수련법’에는 그런 편리한 인간의 적응력이 통용되지 않았다.

“와, 진짜…… 이 짓을 정말 또 해야 하나? 이게 맞아?”

슈리에가 온갖 감정으로 얼룩져 있는 친구들의 표정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 수련…… 엄청 힘든가 봐요?”

실소를 머금는 시론.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 너, 길을 가다가 금덩이를 주웠어. 근데 버리래. 허탈하지만 일단 또 걸어. 어? 이번엔 마정을 주웠네? 뭐? 또 버리라구? 이런 행운을 언제 또 만날 줄 알고? 우악! 이번엔 아티펙트를 주웠네? 뭐? 이것도 버려……?”

“아…….”

“그런 느낌인 거다. 이 수련은.”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한 슈리에.

“다음에는 길을 가다 줍는 게 고철 덩어리일 수도 있거든요.”

“아무것도 줍지 못할 수도 있지.”

연속되는 서클의 붕괴 앞에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드는 광기의 수련법.

아무리 강고한 자기 확신도 결국엔 흔들릴 수밖에 없는, 사람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드는 그런 수련법인 것이다.

다들 수련을 잘 견뎌 내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했던 슈리에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저 같은 새가슴은 죽어도 못하겠네요.”

“어, 넌 시작도 하지 마. 우리가 마법을 배우고 싶은 거지, 정신병을 얻으려는 건 아니잖아.”

시론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또다시 서클의 붕괴를 시작했고.

슈리에를 제외한 모두의 마력이 뿜어져 나와 유적 동굴을 가득 메웠을 때 비로소 루인이 나타났다.

또다시 오드를 허공에 띄워 마나존을 형성시킨 루인은 친구들이 첫 번째 고리를 맺을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좀처럼 보기 힘든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녀석들이니 첫 번째 고리까지야 큰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르자.

하나둘 비 오듯 땀을 쏟으며 이미지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역시 가장 먼저 숨을 몰아쉬며 깨어난 생도는 다프네.

열상처럼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는 마력의 진폭(振幅)에, 그녀는 아직도 치가 떨리는지 입술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루인을 발견한 다프네가 원망의 눈초리를 했다.

“……이건 정말 너무해요.”

루인이 말없이 웃고만 있을 때 시론이 깨어났다.

“으아아악! 정말 힘들어 뒈질 것 같다!”

반면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는 리리아.

“후우…….”

세베론도 학질에 걸린 사람마냥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벌떡 일어나 책상 위의 물병을 들이켰다.

“먹을 것! 먹을 것 좀 가져다줘!”

루인이 가져온 간식을 내밀자 모든 생도들이 달려왔다.

루인이 사 온 따뜻한 쿠키와 레모네이드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운 후에야 생도들은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도대체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지?”

“발을 들인 이상 평생이다.”

태연한 루인의 대답에 시론이 치를 떨었다.

“멈추면……?”

“나아갈 수 없겠지.”

저 말이 더 무섭다.

마법사가 진보할 수 없다면, 그 삶은 더 이상 마도(魔道)라 불릴 수 없기에.

“후우…….”

재구축 수련법에 더없는 열정을 보였던 리리아도 오늘만큼은 지쳐 보였다.

저 루인은 친구들의 정신과 마력이 아무리 녹초가 되어 있다고 해도 저녁 수련을 건너뛸 위인이 아니었다.

한데 루인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 나왔다.

“오늘 저녁 수련은 강론과 토론으로 대체한다.”

리리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고.

다프네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그게 정말이에요?”

훈련장 수련을 패스할 수 있다니!

시론이 마치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심정으로 되물었다.

“와 씨! 드디어 하루쯤은 쉬게 해 주는 거냐? 그런데 강론과 토론? 뭘 토론하자는 거지?”

“검술(劒術).”

“뭐? 검술?”

모두의 눈빛에서 강한 호기심과 열망이 드러났다.

루인의 무시무시한 결투를 지켜본 이상, 검술의 대한 이해가 마법사에게 얼마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지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

“이 왕국, 아니 대륙에 퍼져 있는 검술의 종류, 모든 유파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 사람이 있나?”

루인의 뜬금없는 질문에 곰곰이 생각해 보던 시론이 입을 열었다.

“마법사들의 학파보다는 훨씬 많을 테니 대충 천 개는 되지 않을까?”

마법학회에 등록된 학파의 수는 대략 이백여 개.

그중 세력이 너무 약해 학파라는 칭호가 유명무실한 곳을 제외하면 많아 봐야 일백을 넘지 않았다.

기사들의 수가 훨씬 많은 건 모든 제국과 왕국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니, 검술 유파의 수를 대략 학파의 열 배 정도로 잡은 것이다.

“틀렸다.”

“더 적은 거냐?”

루인이 웃었다.

“47만 개. 그게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검술의 종류다.”

“뭐……?”

루인은 인류 연합의 총지휘관 검성 월켄의 동료이자 참모였다.

인간 진영의 결집을 이끈 루인은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검술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등급을 매긴 경험을 지니고 있었다.

“모든 왕국의 제식 검술들, 실전을 통해 발전되어 온 온갖 용병 검술들, 대륙 곳곳에 퍼져 있는 검술 유파, 대대로 전승되어 온 검가의 검술 등을 모두 합한 숫자다.”

“아니 무슨…….”

“그, 그렇게나 많다니!”

아무리 그래도 47만 개는 너무 많았다.

고작 백여 개에 불과한 학파의 수에 비한다면 가히 천문학적인 숫자가 아닐 수 없었다.

“왕국들이 검술을 기반으로 하는 군대를 유지하는 건 투자 대비 효율의 문제다. 제대로 된 마법사 한 명을 키워 내는 시간과 자원으로 정규 기사 열 명, 아니 수십 명도 배출할 수 있기 때문이지.”

마법은 모든 것이 돈이다.

마도서 한 권의 가격은 웬만한 가정의 한 달 생활비와 맞먹었다.

더욱이 술식 해설집, 마력 촉매, 각종 시약, 엘릭서, 아티펙트 등 마법의 경지를 돕는 보조적인 물품들의 가격 역시 만만치 않았다.

달랑 검 한 자루와 몸뚱이만 있으면 익힐 수 있는 검술과는 비교가 무의미한 지경.

리리아가 묘한 눈빛을 빛냈다.

“우리가 검술을 이해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씨익.

“마법사는 언제나 확증하려 한다. 너희 역시 모든 검술을 파고들려고 하겠지. 인과(因果)를 분명하게 하는 마법사의 방식으로 접근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럼?”

루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파(流派)란 말 그대로 갈래. 갈라지기 전의 모든 검술의 근원. 그런 검술의 원형을 간파하는 법. 그것을 너희들에게 알려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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