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모든 선배 생도들이 힐끔거리며 귓속말을 주고받거나 노골적으로 노려본다.
워낙에 시선이 모이다 보니 루인 일행은 체할 듯이 급하게 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괴물 같은 루인, 무신경의 극치인 리리아는 그런 친구들의 속도 모르고 느긋하게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아, 제발 좀 대충 먹고 나가자.”
“선배들의 눈빛이 마법이었으면 우린 모두 꿰뚫려 죽었을 거야.”
루인이 가볍게 무시하며 오믈렛을 씹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왔다.
“칼날 지배자 후배.”
겨우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또 훅 치고 들어온다.
루인이 구겨진 얼굴로 스푼을 내려놓았다.
남색 머리칼.
일견 선해 보이는 축 처진 눈매.
하지만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의 4등위 마법 생도.
환영의 등나무 탑의 리더 생도 볼칸이었다.
“……웬만하면 이름을 불러 주시죠.”
“그러지.”
처음 루인을 대했을 때와는 달리 볼칸의 태도는 뭔가 부드러워져 있었다.
놀라운 무투술과 헤이로도스의 마법으로 황혼 그룹의 리더를 상대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감상한 마당.
누군가의 전언 따위가 아니라 직접 루인의 진면목을 확인했기에 마음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마법 생도들의 영원한 타도 대상이었던 황혼의 근육들을 찰지게도 두들겨 팼으니 호감이 일어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것.
훈련장에 울려 퍼지던 찰진 타격음이 아직도 그의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이걸 받아라.”
루인이 볼칸이 내민 것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은은한 마력의 잔향을 뿜어내고 있는 조그마한 키(Key).
키의 중심엔 붉은색으로 ‘3F-14’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우리가 쓰고 있는 연구실의 키다. 식사를 마치고 이곳으로 와라. 너 혼자.”
“우린 수련을 해야 합니다.”
“중요한 일이다. 시간을 많이 빼앗진 않을 거야.”
“…….”
루인만 혼자 오라는 볼칸의 말에 모두 가슴을 쓸어내리는 눈치였다.
탑(Tower)의 리더 생도가 ‘우리’라고 말했다.
그렇다는 건 결국 그 연구실엔 쟁쟁한 등급 생도들로 득실득실할 거라는 뜻.
잠시 침묵하고 있던 루인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지금 바로 같이 가겠습니다.”
결정을 했다면 의심 없이 실천하는 성격인가?
볼칸은 점점 더 루인이 마음에 들었다.
“좋다.”
루인이 생도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유적 동굴에 먼저 가 있을게요.”
“우린 걱정 마라. 착실하게 수련하고 있을 거다.”
“잘 다녀와!”
약속이나 한 듯이 일어나 도망치듯 멀어지는 생도들.
루인이 피식 웃으며 볼칸을 뒤따랐다.
* * *
연구실에 들어온 루인이 온갖 약품의 지독한 내음에 코를 틀어막았다.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려 있는 마력 촉매제.
파편적인 영감을 휘갈긴 듯한 온갖 메모들.
화려한 빛깔의 각종 시약과 연금 재료.
인상을 찡그린 채 그 모든 것을 둘러보고 있던 루인에게 볼칸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쪽으로.”
루인이 볼칸이 이끄는 대로 테이블 사이의 좁은 통로를 겨우 통과했을 때.
마력 화로 위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플라스크를 졸린 눈을 비비며 관찰하던 여생도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아, 언제 왔어? 어? 너는……?”
돌아가는 분위기를 대충 살펴보니 이곳의 학구열이 보통이 아니었다.
마도학자들의 연구실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기분 좋은 흥으로 연구실을 둘러보던 루인에게 다시 여생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무시무시한 이명과는 다르게 가까이서 보니 제법 잘생겼네?”
“…….”
볼칸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타가옐은 어디 갔지? 내가 이 녀석을 데려온다고 말했을 텐데.”
“다른 생도들을 데리러 갔어. 오기로 한 애들이 많은가 봐.”
“다른 애들?”
“유리우스도 온다던데? 그리고 놀라지 마.”
“음?”
여생도 조셀린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천공 그룹 녀석들도 방문을 통보해 왔어.”
“……천공(天空)?”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볼칸이 깜짝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천공 그룹은 마법학부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타나지 않던 녀석들.
심지어 그 녀석들은 무투대회조차 단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다.
그런 고고한 녀석들이 루인을 만나기 위해 방문을 통보해 온 것이다.
“놀랐지? 나도 처음엔 누가 장난치는 줄 알았다니까? 이것 봐.”
조셀린이 내민 것은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쪽지.
그 쪽지에는 가타부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방문’이라는 단어 하나만 덩그러니 써져 있었다.
“이게 무슨 천공의 증거지?”
싱긋 웃는 조셀린.
“이걸 가져다준 녀석의 가슴에 브로치가 없었거든.”
그룹 브로치를 착용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는 이 왕립 아카데미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그룹.
황금 여명의 천공은 그룹 브로치가 존재하지 않았다.
“뭐, 별로 상관없다. 그놈들과 나눌 이야기 따윈 없으니까. 지금까지 공기처럼 굴던 놈들이 이제 와서 헤이로도스의 술식은 탐이 났나 보지? 바보 같은 놈들.”
“난 그래도 재밌을 거 같은데? 다들 천공 그룹의 얼굴들을 보는 건 처음이니까.”
“하나도 관심 없다.”
여전히 배시시 웃고만 있는 조셀린.
계속 구시렁거리고 있지만 정작 천공을 가장 관심 있게 추적하던 녀석은 바로 이 볼칸이었다.
초대 학장 마도사 슈레이터의 세 제자 중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바로 진멸의 천공(天空) 루카소.
그가 천공 그룹의 선택을 받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조셀린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매번 느끼지만 넌 참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잘해.”
“……시끄럽다.”
그렇게 볼칸과 조셀린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연구실의 문이 덜컥하고 열렸다.
“여어, 우리 칼날 지배자 후배님은 오신 건가?”
“유리우스!”
루인이 사람의 외모로 동요하는 마음이 인 것은 다프네 이후 처음이었다.
전생의 동료들 중에서도 미남자는 많았지만 유리우스는 그런 동료들보다도 훨씬 잘생긴 청년이었다.
생동하는 화염, 유리우스.
상위권에 랭크되어 있는 마법학부의 또 다른 이명 생도.
결투에 불리한 마법사, 그 엄청난 기사들의 랭커전에서 4등위 기간 내내 20위권을 내주지 않은 마법학부의 강자였다.
그리고 그의 뒤편에서 새하얀 머리칼의 마법 생도가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그림자 혹한, 타가옐.
혹한의 마도를 구사하는 또 다른 이명 생도가 차가운 눈으로 루인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
루인의 무감한 시선과 얽히면서도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의미했다.
루인의 표정에 금방 호기심이 떠올랐다.
감정을 억누르는 자의 눈이 아니었다.
바로 자유로움을 완성한 자.
놀라웠다.
그건 분명 강자의 눈빛.
나이와 경지로 가늠할 수 없는.
순수한 인간의 강함.
지난 생, 검성 월켄을 처음 보았을 때와 너무 비슷한 느낌이라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뭔가 숨기고 있군.’
인간의 감정뿐만이 아니다.
뭔가 실체가 느껴지지 않는 느낌.
왠지 모를 불길함, 그런 모호한 감각이 계속 찌르르 울려온다.
그렇게 루인이 타가옐을 직시하고 있을 때.
점점 루인 하나를 보기 위해 마법학부의 쟁쟁한 선배들이 연구실로 모여들었다.
그들이 모두 구석진 테이블에 차례로 앉자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던 루인도 함께 테이블의 의자를 뺐다.
드르륵-
“어, 넌 안 되지. 엄연히 등위 체계가 있는데.”
“그래도 벌써 이명을 차지한 놈인데? 그냥 후배는 아니잖아?”
“지킬 건 지키자고.”
씁쓸하게 웃음 짓던 루인이 의자를 집어넣는다.
대마도사의 자아가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이제는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익숙해져야만 했다.
“다들 빨리 모였네?”
홍염의 파수꾼 에덴티아가 연구실에 들어오며 인사하자 모든 등급 생도들이 인상을 구겼다.
“이제야 왔네. 도대체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한 거지?”
“무슨 강심장으로 연합을 운운한 거냐고.”
사실 루인을 만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연구실에 모인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저 에덴티아의 망할 연합 선언 때문.
안 그래도 저 괴물 같은 후배 덕분에 분위기가 뒤숭숭한 마당에, 모든 기사 생도들이 보는 앞에서 선전 포고를 날린 셈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하지만 에덴티아는 오히려 친구들에게 반문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날 그렇게 오래 겪고도 아직도 모르겠니?”
“응?”
“내가 무슨 바보 천치도 아니고, 그런 엄청난 선포가 과연 내 의지였겠냐고.”
그때.
덜컥-
또다시 문이 열리며 두 명의 마법 생도가 연구실에 입장한다.
브로치가 없는 마법 생도들.
그 유명한 ‘황금 여명의 천공’ 그룹의 생도들이었다.
“와……!”
“정말 처음 보는 얼굴이군.”
“어떻게 생도 생활을 5년이나 함께했는데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을 수가 있지?”
“무등위 시절부터 스카우트당한 건가?”
모두가 각자의 감상을 늘어놓고 있었지만 천공 그룹의 생도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데 오직 에덴티아만이 웃고 있었다.
“이번 일에 천공이 나서 주기로 했어.”
“뭐?”
“천공이?”
마법 생도들은 말로만 듣던 천공이 얼마나 강한지도 몰랐고 심지어 몇 명인 지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천공이 나서 준다는 한마디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 말은 네 연합에 참여하겠다는 건가?”
“연합을 선포하기 전부터 이미 합의가 되어 있던 모양이네?”
에덴티아가 루인을 지그시 응시했다.
“스스로 성을 부수는 마장기가 되겠다는 녀석이 있으니까.”
“마장기……?”
그때.
천공 그룹의 여생도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루인이 그녀의 투명한 눈빛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녀는 다름 아닌 자신을 천공의 후보로 삼기 위해 교실에 찾아왔던 천공의 소녀.
“왕립 아카데미에서 렌시아가의 입김을 끊어 내겠다는 게 정말인가?”
루인의 고개가 묘하게 꺾어진다.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렌시아가를 하이(High)로 드높이지 않는다는 건, 그들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뜻.
아무리 천공이라고 해도 아카데미의 일개 그룹에 불과하다.
그런 마법 생도들이 왕국을 지배하고 있는 대공 가문을 적대한다는 건 뭔가 사연이 있다는 의미일 터.
“그렇다.”
“단순히 렌시아가의 후원 생도들을 꺾는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물론 그렇겠지.”
천공의 소녀는 더욱 기이한 눈초리로 루인을 응시했다.
“계획이 있다면 듣고 싶다.”
루인의 담담한 눈빛이 모든 생도들을 차례로 훑는다.
“이익에 목매는 인간은 더 큰 이익에 반드시 흔들릴 수밖에 없다.”
뛰어난 재능의 기사 생도들이 렌시아가의 후원을 받아들인 건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
“렌시아가의 후원 생도들을 어떤 이익으로 유혹하겠다는 건가?”
그들이 렌시아가의 후원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대공가의 명예와 권력.
렌시아가의 후광을 등에 업은 이상 르마델 왕국에서의 삶은 탄탄대로일 수밖에 없었다.
“기사 생도들에게 렌시아가의 후광보다 더한 이익이 있을 수 있는 건가?”
루인이 차갑게 웃었다.
“있지. 기사의 근본을 자극하는 고귀한 집단. 내심 가장 영예롭게 추앙하는 왕국의 또 다른 검술명가.”
“……근본?”
“명예를 추구하는 기사들의 마음을 울게 만들 수 있는 태초의 가문.”
그제야 모든 마법 생도들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가문이 떠올랐다.
“하이베른가. 나는 이 왕립 아카데미의 기사 생도들에게 하이베른가의 후원을 이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