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쟈이로벨.
마계의 일곱 권역을 다스리는 마신들 중 포악하고 잔인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극악무도한 마신.
서풍 지대의 군주 므드라에게 패배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대마신’의 칭호에 가장 근접했던 절대자.
그런 무자비한 마신이 눈앞에서 괴기스럽게 웃고 있었다.
아므카토에게서 실성한 듯한 마계의 언어가 터져 나온다.
<ѝѯ њҧ ѩѥѯ……>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 즉각적으로 튀어나온 경배.
영혼 섭식을 위한 재물, 고작 유희 따윈 이제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비위를 거스른다면 마계의 진마체가 소멸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
지금도 마신 쟈이로벨의 휘하들은 에오세타카 님의 권속을 발견하는 족족 소멸시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대마신 므드라에게 당한 수모를 죄다 광염 지대에 풀고 있는 것이다.
마계의 머나먼 외각을 떠돌고 있는 자신의 주인 에오세타카 님이 오늘따라 눈물 나게 그리웠다.
<인간계라 네놈의 썩은 냄새가 나지 않아서 좋군. 한데 못 본 사이에 제법 간이 커졌구나. 영혼 섭식을 ‘존재’들에게 들키면 어쩌려고? ‘율(律)’을 처맞고 싶은 게냐?>
<그, 그게……>
<이런 위험을 감수한다는 건 역시 격(格)을 올리고 싶은 거겠지?>
광염 지대의 군주, 에오세타카의 열광(熱光)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
주인에게서 멀어진 권속들은 날이 갈수록 고유 권능이 옅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격을 상승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란 영혼 섭식이 유일.
지금 이 마장 아므카토는 ‘벌레왕’의 격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진정한 마왕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건 네놈도 마찬가지 아니냐?”
쟈이로벨이 홱 하고 루인을 쳐다본다.
<뭐?>
피식.
“인간의 생명력을 쪽쪽 빨며 버틴 네놈도 므드라한테 뚜들겨 맞아 쓰린 마음 달래려던 몸부림이잖아? 내가 볼 땐 네놈이나 저 악취 벌레나 전혀 다를 게 없다.”
<다, 닥쳐라!>
“므드라가 마계 제왕.”
<이, 이 개같은 놈이―!>
“어, 날개 뜯기고 도망간 놈.”
그 광경을 묘하게 바라보는 아므카토.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인간이 위대한 마신을 조롱하는 것도 터무니가 없는데.
그런 엄청난 일을 당하고도 숙주를 제압하지 않는 쟈이로벨의 반응이 너무 비현실적이었던 것.
결코 마계의 위대한 존재와 숙주 사이라고는 볼 수 없는 괴이한 광경이었다.
‘종속의 계약’을 맺었다면 인간의 영혼쯤은 가벼운 의지만으로도 짓뭉갤 수 있는데 도대체 왜?
그런 해석되지 않는 인간 놈이 갑자기 또 자신을 노려봤다.
“말해 봐. 너 같은 하급 마족들이 얼마나 많이 인간계를 떠돌고 있는 거지?”
<하, 하급……?>
눈앞의 마신과 비교가 돼서 그렇지 마장(魔將)은 수천만 마졸을 거느린 고위 마족이다.
그런 마장인 자신을 감히 하급 마족이라 깔보는 인간 놈이라니!
쟈이로벨의 숙주만 아니었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놈의 육체를 진마력으로 갈기갈기―
“감히 악의를 드러내?”
루인이 투명한 눈으로 걸어가더니 주저앉아 떨고 있는 비스토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벌레왕 아므카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혼주가 외부 요인에 의해 소멸된다면 최소 수천 년은 인간계에 갇히게 된다.
마계의 은밀한 비처에서 마고수면(魔枯睡眠)에 빠져 있는 자신의 진마체가 수천 년 동안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이다.
<자, 잠깐!>
“본인의 처지를 알았으면 제대로 굴어. 이제 경고 따윈 없을 거야.”
<함께 온 마장들이 있다!>
“몇 마리나 되지?”
<마, 마리…….>
감히 마계의 고위 마족에게 짐승을 세는 단위를 갖다 붙이다니.
하지만 놈이 혼주를 쥐고 협박하고 있는 이상, 저 마신이 노려보고 있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대충 스물 정도다.>
루인이 금방 인상을 구겼다.
제법 많은 숫자.
열광의 마장들이 스무 마리나 인간계에 흩어져 숙주를 옮겨 다니고 있다면 그 휘하 마군들의 숫자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최소 수천, 어쩌면 수만의 마군들.
인간계에게 온갖 나쁜 영향을 끼치며 탐욕을 완성해 나가고 있을 놈들을 생각하니 루인은 피가 거꾸로 솟는 심정이었다.
그때.
<잠깐,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루인이 쟈이로벨의 강림체를 응시했을 때 그의 영언이 다시 흘러나왔다.
<네 전생의 악제가 진실로 발카시어리어스(Balka serious) 님의 계약자라면 인간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마족들에게 반드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루인은 그 말만 듣고도 곧바로 쟈이로벨의 의중을 헤아렸다.
“호오…… 과연 발카시어리어스의 신마력이라면…….”
마군들이라면 악제에게서 흘러나온 신마력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태초의 어둠, 대악신의 계약자라는 걸 알아본 이상, 결국 놈들은 어쩔 수 없이 악제의 제안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그중에서 아예 협력자가 나올 확률도 높았다.
<그래. 이놈의 동료를 통한다면 그 악제란 놈과 연관된 인간들의 정보를 파악할 수 있겠지.>
루인이 여전히 비스토의 머리, 아므카토의 혼주를 쥔 채로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우릴 도와줄 수 있겠지?”
<…….>
“약속하지. 너희 에오세타카의 권속들을 더 이상 사냥하거나 소멸시키지 않는다고.”
쟈이로벨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뭣? 내가 언제? 난 그런 약속을 한 바가 없다!>
“수하들에게 의지를 전하는 것쯤은 할 수 있잖아. 놈들에게 전해. 열광 놈들을 더 이상 사냥하지 말라고.”
<대체 내가 왜 그래야 하는 거냐?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이득이 뭐가 있다고!>
“그럼 하지 말든가.”
쟈이로벨의 강림체.
그의 표정이 마치 인간의 그것처럼 미묘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 그렇지 않아도 내가 공석인 상황이다! 마군들의 사기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판국에 어떻게 내가 그런 멍청한 명령을……!>
내부의 불만을 외부의 적으로 해결하려는 습성은 인간이나 마족이나 똑같은 모양.
쟈이로벨이 자신의 군단에게 사냥을 중단시킨다면 쌓인 불만이 어디로 터져 나갈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 얘기나 꺼내지 말든가.”
아니 도대체 왜 그게 그렇게 연결되는 거지?
자신은 악제의 뒤를 캘 방법론을 이야기했지 저 썩은 벌레 놈에게 내밀 당근까지 함께 제시한 건 아니었다.
<지금도 내 권속에서 탈주하려는 수하 놈들이 제법 있다…… 이런 상황에서 꼭 나한테 이래야만 하는 것이냐?>
저 무시무시한 강림체로 인간처럼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 아므카토는 놀랍기만 했다.
“마족 놈들에게 단순한 협박이 통할 리 없다는 걸 네놈이 가장 잘 알 텐데.”
사람조차 이득 없이는 가슴이 움직이지 않는 법이거늘.
당연히 그 간악하고 교활한 마족들이야 더 말할 가치도 없었다.
마족이라면 신물이 나도록 경험한 루인으로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
<제길! 제기라아아아알!>
루인이 흐뭇하게 웃더니 다시 아므카토를 응시했다.
“봤지? 이제 너희 열광 놈들은 사냥에서 자유로워졌다.”
<…….>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인 인간.
혈우 지대의 군주이자 위대한 마신의 격을 이룬 쟈이로벨을 아이처럼 다루는 것도 그렇고.
마계의 대악신 발카시어리어스 님의 존재를 아는 것을 넘어 그분의 계약자, 그분의 신마력까지 운운한다.
무엇보다 미스터리한 건 마신 쟈이로벨이 저 인간 놈의 ‘전생’을 운운했다는 것.
그럼 저 인간 놈이 무슨 인생 2회차라도 된다는 뜻인가?
“그리 어려운 계약도 아니지 않느냐? 그냥 발카시어리어스의 신마력을 풍기는 인간이 나타난다면 그 사실을 내게 알려 주기만 하면 된다.”
사실 루인의 말대로 계약이랄 것도 없는 일.
고작 이만한 일을 들어주고 정말로 혈우(血雨)의 권속들이 광염 지대에서 사냥을 멈춘다면 이보다 더한 이득은 없었다.
한 차례 쟈이로벨을 스윽 훑던 아므카토가 긍정으로 영언했다.
<이 계약. 아므카토의 진명으로 이행하겠다.>
마족이 자신의 진명을 걸었다는 건 본인이 소멸하지 않는 이상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미.
자신의 이름을 거는 일에 각별한 감정을 느끼는 루인 역시, 마신과 오래도록 가깝게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성향이 굳어진 것이었다.
“좋아.”
루인이 잡고 있던 비스토의 머리를 놓아주자 아므카토는 또다시 마계의 언어를 늘어놓았다.
<ѫѩѣѳѷѹѹѯ…….>
쟈이로벨이 아므카토의 인사를 무시하며 루인의 영혼 속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아므카토 또한 비스토에게 스며들자 루인이 시야 교란 술식과 침묵 술식을 걷어 냈다.
주저앉은 채 멍한 표정으로 루인을 올려다보는 비스토.
루인이 싸늘하게 웃었다.
“지켜봤으면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겠지.”
아므카토와 계약한 비스토는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거침이 없었다.
마음에 안 들거나 자신을 곤란하게 하는 놈이 있다면 저주로 모든 것이 해결됐다.
아므카토가 자신에게 건넨 권능은 신비롭기 짝이 없었다.
‘영혼 제압’과 극한의 불운을 일으키는 ‘저주’.
이 두 가지 권능만으로 비스토는 모든 세속적인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자신을 전능하게 만들어 준 아므카토를 오래도록 숭배했다.
이름만 들어도 소스라치는 공포로 온밤을 지새우게 만들던 영혼의 주인.
한데 그렇게 아득하고 두렵기만 한, 그 절대적인 아므카토가 저 루인 앞에서 아이처럼 공손해졌다.
거기에 루인의 입에서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던 엄청난 비밀들.
그런 미지의 세계, 미증유의 절대자들을 관찰한 비스토는 더 이상 루인을 사람처럼 대할 수 없었다.
곧바로 꿇어앉아 버린 비스토.
“제,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루인이 고아하게 웃는다.
“하던 대로 해라. 네놈의 권능을 계속 활용하든 말든 난 일체의 상관도 하지 않겠다.”
“……정말이십니까?”
“그래.”
썩을 대로 썩어 버린 이 에어라인 아카데미에 이런 재앙의 이니그마가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1위의 랭커인 브훌렌조차도 이 비스토를 두려워하는 마당.
주제도 모르고 폭주하고 있는 이명 생도들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작용해 온 것이다.
“단, 아므카토가 날 대면하고 싶다고 할 땐 언제든지 내게 달려와야 한다.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야.”
“아, 알겠습니다!”
몇 번이고 고개를 바닥에 처박던 비스토가 재빨리 몸을 일으켜 멀어졌다.
시야 교란 마법이 사라졌을 때부터 루인 일행이 그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다.
“대체 저 녀석!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한 거지?”
“저 무시무시한 아카데미의 재앙이 루인에게 무릎을 꿇고 빌고 있었어…….”
묵묵히 걸어온 루인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밥 먹으러 가자.”
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런 루인의 모습에 시론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저 광대에게 무슨 좋은 이야기라도 들은 거냐?”
여전히 루인은 그저 웃고 있었다.
미지의 안개 속, 흐릿하기만 한 악제의 그림자를 밝힐 수단을 얻었다.
작열하는 긴장감이 온몸을 번져 간다.
두려움과 분노, 공포와 증오가 함께 버무려진 듯한 이 찌르르한 감각은 역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잠시 잠들어 있었던 것뿐.
‘악제(惡帝)…….’
그 절망의 이름, 그 흉포한 공포에.
드디어 한 발 다가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