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06화 (106/187)

<106화>

<내 이름을 걸어 주마.>

단지 한마디의 말일 뿐이었다.

더없이 간결한, 어떤 해석도 의미도 덧붙일 수 없는 단순한 문장.

그러나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솟구쳐 온 마음이 울렁인다.

간질이는 듯한 전율이 척수를 타고 온몸에 체액처럼 차오른다.

그것은 훈련장에 모인 모두가 느끼는 감정.

시뻘건 형벌의 낙인처럼, 모든 감정의 방어막을 붕괴시키며 스며드는 전율적인 공포였다.

대마도사가 이름을 건다는 것.

루인의 절대언령, 그 전율의 선언은 차라리 심판에 가까웠다.

생도들이 느끼고 있는 건 인류 연합의 초인들을 이끌던 절대자의 단면.

대마도사의 초월적인 자아, 그 치열하고 악착같은 삶의 흔적이었다.

그런 전율이 너무 충격적이라, 생도들은 마법의 전설적인 경지인 절대언령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브훌렌이 두 눈에 당황한 감정을 잔뜩 드러냈다.

“……날 죽이겠다고?”

“먼저 내 목숨 운운한 건 네놈이었다.”

전생의 동료들, 그 고귀한 영혼들을 갑주처럼 두르고 있는 자신에게 감히 죽음을 입에 담았다.

수도 없는 죽음으로 낡아 풍화된 영혼.

동료들의 염원을 등에 이고, 악착같이 살아가는 이의 삶을 모욕했다.

그렇게 가볍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생명을 모독한다는 것.

그것은 멸망 속에 죽어 간 모든 이들의 절망을 다시 짓밟는 짓이었다.

루인은 자신의 죽음을 함부로 말하는 이를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너…… 정말 감당할 자신이 있나?”

루인이 웃었다.

여느 때보다 투명한 눈빛, 감정 한 올 담겨 있지 않은 그 삭막한 조소는 완벽한 무의미만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네놈의 모든 것을 동원해도 좋다. 렌시아가의 직계 기사를 대전사로 데려와도 받아들이지. 가문의 권력을 이용하거나 협잡을 해도 좋다. 여론으로 선동을 하든 어쌔신을 동원하든 할 수 있는 건 다 해.”

“…….”

마치 무슨 짓을 한다 해도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을 거라는 말로 들린다.

당황스럽다 못해 사고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지경.

필사적으로 감정을 다스리던 브훌렌이 다시 루인을 노려본다.

“대체 넌 뭘 믿고 그러는 거지?”

천재적인 마법사라는 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무등위 단계에서 이 정도 실력을 뽐낸 녀석이라면 후일 엄청난 마법사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나 자신은 하이렌시아가의 방계.

가문의 명령, 아니 하이렌시아가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아카데미 따윈 입학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브훌렌에게 아카데미는 여흥이었다.

이대로 수석으로 졸업한다면 최소 왕립 기사단, 전공과 공훈을 착실하게 쌓아 나간다면 중규모 기사단의 단장 정도는 보장되어 있는 삶.

천운이 닿아 렌시아가의 직계 성을 미들네임으로 하사받기라도 하는 날엔, 웬만한 왕족 부럽지 않은 지위와 권력을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자신을 아카데미의 모든 생도들이 두려워하고 어려워했다.

자신은 하이렌시아가의 후원 생도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다음 세대의 기사들을 이끌 니스할가의 후계자.

이 나라 마법의 최고라는 현자조차, 하이렌시아가의 권력 앞에서만큼은 움츠러들기 마련.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지만 무등위 생도, 그것도 귀족조차 아닌 놈이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거지?

그때.

“쿡! 대단한 무등위 생도군요. 아아, 브훌렌 님도 잘 지내셨죠?”

브훌렌의 뒤편에서 과장된 포즈로 등장한 작은 키의 기사 생도.

브훌렌의 미간이 구겨졌다.

“……비스토?”

랭커가 아님에도 이명을 지닌 녀석들이 있었다.

늘 광대처럼 모호하게 웃으며 나타나 분란을 일으키는 ‘교활한 삐에로.’

비스토가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킬킬거리더니 더욱 괴이하게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하! 이 몸이 이런 재미있는 일에 끼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이걸 어떻게 참아? 못 참지.”

“……재수 없게 굴지 말고 꺼져라.”

비스토가 가볍게 무시하고선 루인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굉장해! 저 무시무시한 브훌렌을 이렇게까지 모욕할 수 있는 남자라니! 칼날 지배자, 그는 신인가?”

루인 일행은 갑자기 등장해 광대처럼 날뛰고 있는 비스토보다 훈련장에 모인 생도들의 반응이 더 신기했다.

그가 등장하자마자 생도들은 마치 오물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재빨리 흩어지며 훈련장을 떠나고 있었다.

그것은 루인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황혼의 기사 생도들조차 마찬가지였다.

한데 더 미스터리한 것은 바로 브훌렌의 반응.

“내가 다 잘못했다. 그냥 좀 가 주면 안 되겠나?”

“뭐래 미친놈이.”

오싹!

시론과 생도들의 표정이 일변했다.

헤실거리던 선량한 얼굴이 순식간에 악마처럼 일그러진 것.

이건 마치 가슴이 철렁 주저앉는 느낌.

사람이 풍기는 기질이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변할 수가 있는 거지?

“간만에 흥밋거리가 생겼는데 방해하지 마. 용서하지 않을 거야.”

브훌렌이 한참이나 선 채로 인상을 구기더니 루인을 응시했다.

“나와 내 가문의 명예를 모욕한 죄는 다음에 묻겠다. 기다리도록.”

시론이 브훌렌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저 아카데미의 지배자, 뇌전의 기사 브훌렌이 이런 수모를 겪고도 그냥 가 버린다고?

자연적으로 루인 일행의 시선이 비스토에게 모일 수밖에 없었다.

“히끅! 저 눈빛! 아까 전에도 느꼈지만 정말 지려 버리겠소! 아아, 대체 당신은 어떤 삶을 견뎌 냈기에 이런 비감한 눈빛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나는 모르겠어!”

1인 2역의 희극, 서로 다른 인격을 연기하는 듯한 비스토의 행동.

루인이 그런 광기로 반짝이는 비스토의 두 눈을 응시했다.

“넌 교활한 삐에로로군.”

그제야 생각난 듯 생도들의 눈빛이 일변했다.

“아……!”

“에덴티아 선배가 말했던 그……?”

에덴티아는 오히려 랭커급의 강자보다 이 비스토를 가장 조심해야 한다고 내내 침이 마르도록 경고했었다.

비스토는 저주 그 자체.

그와 엮이면 병이 생기고, 성적이 나빠지며, 가문에 우환이 찾아든다.

그의 관심을 받는 생도는 모두 그런 미스터리하고 괴상한 불운을 겪게 되는, 왕립 아카데미의 이니그마(Enigma).

모든 환멸과 따돌림을 무색하게 만드는 역병과도 같은 존재.

혹시라도 눈이 마주치는 날엔 반드시 신전에 기도를 드리러 가게 만든다는 아카데미의 살아 있는 재앙.

“저, 저 유적 동굴로 먼저 가 볼게요.”

“나, 나도다!”

씨익.

“이미 끝났어. 머저리들아.”

재앙의 이니그마가 잔인하게 웃고 있다.

생도들의 얼굴이 동시에 암담한 빛으로 물들었다.

“아아…….”

“이제 우리 어떡해요…….”

하지만 루인은 오히려 그런 비스토를 더욱 직시하며 미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었다.”

“우와! 정말? 날? 궁금하면 100리랑!”

우스꽝스러운 광대처럼 방방 뛰고 있던 비스토는 이어진 루인의 말에 놀라운 속도로 표정이 굳어 버렸다.

“특이하군. 놈들이 마법사가 아닌 인간에게도 탐욕을 부릴 수도 있다니. 영혼 자체가 특별한 건가?”

“응?”

“처음엔 반쯤 미쳐 버린 ‘존재 숭배자’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보니 확실해졌다.”

“무슨 확실? 아하하하! 너? 이상하게 뭔가 아는 척한다?”

루인이 피식 웃으며 비스토가 은밀하게 펼치던 저주의 장막을 걷어 냈다.

“이, 이게! 뭐, 뭐야!”

혼비백산하며 뒤로 물러나는 비스토.

루인에게서 뿜어져 나온 힘은 마력이나 투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완력, 설명할 수 없는 강대한 힘.

아무런 저항 없이 장막을 걷어 낼 수 있는 인간은 그로서도 처음이었다.

“이 정도 수준의 권능이라면 아직 영혼 섭식(靈魂攝食)을 당하기 직전이군.”

“여, 영혼 섭식? 그게 뭐야?”

“뭘 약속받은 거지? 힘? 영생? 그것도 아니라면 소환?”

“헐……!”

점점 뒷걸음질 치는 비스토.

“놈이 장난처럼 내민 작은 권능에 취해, 본인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미욱한 녀석이군. 아직도 네가 놈의 계약자로 착각하고 있는 건가?”

“뭐, 뭐야 너? 어떻게 그런 걸 다!”

그때.

주변 풍경이 물결처럼 일그러진다.

“어!”

“루인!”

시론이 다급히 루인을 불러 본다.

“저주가 아니라 마법이에요! 루인 님의 마력!”

“휴…… 난 또.”

외부에서 볼 수 없도록, 일정 범위의 공간에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시야 교란 마법.

거기에 추가적으로 중급 침묵 술식 사일런트 방벽까지 덧씌운다.

융합 마력을 떨쳐 내던 루인이 다시 비스토를 응시했다.

<나와라.>

루인의 절대언령이 결박처럼 비스토의 영혼을 옥죄고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비스토가 저주의 힘을 끌어올리며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아, 아악! 아아악!”

보이지 않는 극한의 공포, 그 고고의 권능 앞에서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다.

<나오지 않으면 네 혼주(魂珠)를 부수겠다.>

“호, 혼주?”

감정이 결여된 표정, 인간성조차 희미해진 루인의 두 눈은 더 이상 비스토를 향하지 않았다.

루인이 보고 있는 건 비스토의 영혼, 그 너머의 것.

<마지막 경고다. 혼주를 부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잘 알고 있겠지?>

그 순간.

“끄아아아악!”

머리를 움켜쥔 채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비스토.

자신의 머리를 뚫고서 뭔가가 나오려고 하는 난생처음 겪는 감각에 극한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스스스스스-

자욱한 자줏빛 안개처럼 기화된 무언가가 비스토의 머리에서 뿜어져 나온다.

형상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지독한 부정형의 존재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에게서 토해져 나온 무언가를 망연자실한 얼굴로 쳐다보는 비스토.

소름 돋게 물결치며 지독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자색의 존재는 마치 인간처럼 놀라고 있었다.

<인간, 도대체 넌 정체가 뭐지?>

루인은 여전히 무감한 눈빛으로 상대의 기질만을 살필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곧 탐색을 마침 루인의 입매가 기이한 굴곡으로 비틀리기 시작했다.

“광염(狂炎) 지대를 활보하는 놈들이 풍기는 열광의 기운이군. 에오세타카의 권속인가?”

<뭐……?>

인간이 어떻게 에오세타카 님을 아는 거지?

게다가 그 아득한 공포의 진명을 입에 담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

피식.

“차라리 생명력을 섭식하는 놈들이 정상적으로 보일 지경이군. 인간을 속이고 감히 영혼 섭식을 시도하다니. 이런 간교한 놀음을 언제부터 해 온 거지?”

<도대체 넌 누구냐!>

“루인이다.”

<루인?>

츠츠츠츠츠-

또 하나의 지독한 형상이 허공에 맺히기 시작한다.

앞선 부정형의 존재와는 달리, 뚜렷한 형태와 고유의 권능을 고스란히 인간계에 현신할 수 있는 마계의 위대한 마신이었다.

<다, 당신은!>

<클클클! 썩은 벌레야. 에오세타카는 어디서 숨어 지내고 있느냐?>

썩은 벌레?

부정형의 존재, ‘아므카토’는 자신을 그렇게 부르던 유일한 존재가 떠올랐다.

<쟈, 쟈이로벨?>

광염 지대를 멸망으로 이끈 절대자.

마신 에오세타카 님을 만 년 이상 숨어 지내게 만든 혈우 지대의 정복 군주.

<오랜만이다 썩은 벌레.>

공포가 더 큰 공포 앞에서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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