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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베른가의 대공자-105화 (105/187)

<105화>

리리아는 루인이 수천 개의 마력 칼날을 떨칠 때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놀라웠다.

무투술과 염동 마법을 제대로 활용하면 얼마나 효과적으로 기사를 제압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장면.

게다가 놀라운 검술 이해도, 애초에 계획된 매뉴얼인 양 완벽하게 대응하는 술식.

거기에 중간중간 자신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친절하게 설명을 늘어놓는 비상식적인 여유까지.

무엇보다 무서운 건 이 모든 과정 속에서도 치밀하게 심리전을 펼쳤다는 것.

저 엄청난 랭커를 순식간에 함정으로 몰아넣는 이런 노련함이 과연 생도 수준에서 가능한 역량일까?

이건 마치 노회한 마법사를 보는 것 같았다.

투기 한 번 검술 한 번 제대로 떨쳐 보지 못한 채 그리즈 필드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황혼의 기사 생도.

그런 근육 덩치를 바라보고 있자니 리리아는 헛웃음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내 전부를 배우라는 말이 아니다. 물론 따라 할 수도 없고.”

루인의 염동력은 현자급 마법사인 헤데이안 학부장조차 혀를 내두른 절대적인 권능.

더욱이 생도들은 이제야 겨우 달리기에 조금 익숙해지고 있는 상황, 무투술은 배워 보지도 못했다.

“각자 가진 역량은 다르니까요. 충분히 영감을 얻었어요. 제 메모라이징으로도 가능할 것 같아요.”

리리아가 다프네를 쳐다본다.

“그것보다 이 녀석은 다른 걸 말하고 싶은 거다.”

“무슨……?”

“비록 익히진 않더라도 검술을 연구할 필요성.”

“아…….”

무기의 종류별 특성, 검술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 투기 분석법 등.

루인의 말을 곰곰이 씹어 보면 검술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결코 대응이 불가능한 연계 마법이었다.

“무투술의 뼈저린 필요성도 있지.”

열기로 끈적거리는 시론의 눈빛.

스펠을 외우는 시전 시간 중간중간에 펼쳐지는 루인의 무투술은 절대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마치 마법사의 모든 단점이 상쇄되는 느낌.

거기에 즉각적으로 마법을 바꿀 수 있는 헤이로도스의 술식 변환까지 활용되자 정말 말도 안 되는 효율적인 전투를 구현하고 있었다.

하나의 예술을 접한 것만 같은 심정.

그때 조심스러운 슈리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그런데 정말 대단한 스태미나네요. 왜 야생마라 불리는지 알겠어요.”

그라간은 정말 포기를 몰랐다.

시퍼렇게 부은 허벅지, 극심한 고통에 서 있기조차 힘들어 보이는데도 그는 끝까지 필사적으로 일어났다 쓰러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루인이 피식 웃었다.

“저 녀석은 제로에 근접한 마찰 계수가 무슨 장난인 줄 아나. 힘과 투기, 체술만으로 그리즈 필드를 극복하려 들다니.”

이내 다프네를 바라보는 루인.

“다프네, 네가 저 녀석이라면 어떻게 할 거지? 마법은 안 돼.”

다프네의 입에서 즉각적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마찰 계수가 제로에 가까워도 정지된 물체, 그리고 무거운 중검은 순간적으로 안정을 도모할 수 있어요. 그리고 검의 상단보단 가죽이 덧대어져 있는 손잡이를 활용하면―”

씨익.

“그래. 저렇게 허우적거리면서도 검을 밟고 도약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놈들. 그게 바로 기사들이다.”

자빠져 턱으로 주르르르 밀리면서도 그라간은 그런 루인의 말을 똑똑히 듣고 말았다.

수치심과 분노, 모멸과 자괴감이 어우러진 그라간의 처참한 얼굴.

여기서 저 찢어 죽일 주문쟁이의 말대로 검을 밟고 도약한다면 더욱 수치스럽겠으나.

안타깝게도 방법이 없었다.

부들부들.

그렇게 그라간이 악착같이 깨문 입으로 검을 바닥에 버렸을 때.

우우우웅-

나직한 공명음과 함께 그리즈 필드가 사라져 버렸다.

“…….”

모든 비대한 근육들이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한다.

눈앞의 모든 것을 부수고 싶은 분노가 그의 머릿속을―

“그렇다고 진짜로 버릴 줄은 몰랐군. 검을 버리는 기사는 정말 오랜만이야.”

툭-

뭔가가 끊어졌고.

검도 회수하지 않은 채 루인을 향해 짓쳐 드는 그라간.

이성이 날아간 듯한 엄청난 괴성이 삽시간에 훈련장을 집어삼킨다.

“개― 싯파아아아알― 새끼야―!”

하얗게 까뒤집힌 눈.

루인이 무심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 단계에서는 마법도 필요가 없다.”

순간, 루인의 모습이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고.

빠아아아아악!

이게 정말 사람을 때린 소린가 싶은 찰진 타격음이 훈련장을 가득 메우자.

“어우! 씨!”

소름이 돋는다는 듯 기겁한 표정의 시론.

퍼퍽! 퍼퍽! 퍼퍼퍼퍽!

일정한 리듬의 박자, 묘하게 규칙적으로 들리는 타격음에 왠지 모를 이상한 쾌감이―

빠아아아아악!

“어우! 씨!”

“와 씨!”

뭔가 시원한 기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한 묘한 박자감에 절로 어깨가 들썩이는 생도들.

사람을 때리는 소리가 이렇게 강렬한 쾌감을 일으키다니?

빠아아아아악!

“어우! 씨!”

“와! 난 더 못 보겠어요!”

“죽은 거 아니에요?”

“저, 저렇게 맞았는데도 쓰러지지 않아! 이게 야생마의 스태미나인가?”

<마, 마법사가 되길 잘했어!>

하지만 황혼의 야생마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빠아아아아악!

시론의 어깨가 또다시 들썩거렸을 때.

그라간의 육중한 동체가 천천히 기울어진다.

루인이 특유의 무감한 표정으로 손에 묻은 피를 털어 낼 무렵.

“그라아가아아아안!”

“선배니이이임!”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는 황혼의 기사 생도들.

세베론이 새삼 루인을 괴물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무투술이나 마법 따위의 문제가 아니야.”

“이, 인간의 심리전이 아니다.”

루인.

저 녀석은 한창 꿈 많은 시기의 기사 생도가 어떤 행동과 말에 상처받을 수 있는지 손바닥 들여다보듯 꿰뚫고 있었다.

모든 대사와 행동 하나하나, 거기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마법들, 그 일련의 적재적소가 소름이 돋을 지경.

분명 저 그라간은 자신이 지닌 역량의 절반의 절반도 펼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충격이 지켜보던 생도들이라고 다를까.

물론 충격의 결은 좀 달랐다.

기사 생도들에겐 일종의 자괴감과 분노, 반면 마법 생도들에겐 십 년 묵은 체증이 씻어져 내린 듯한 통쾌함이었다.

워메이지가 이토록 대단한 마도(魔道)였다니!

“너, 너희들! 모두 죽여 버리겠다!”

“전쟁! 전쟁이다! 이 새끼들아!”

포효하는 황혼을 대표하는 두 랭커가 피떡이 되어 버린 상황.

황혼 그룹의 명성은 이제 나락이나 다름없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던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상처 입은 야수와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현 시간부로 우리 ‘꿈꾸는 불새의 둥지’는 ‘열망하며 은둔하는 목소리’ 그룹과 연합을 선포한다.”

“뭣!”

“이! 이! 시뻘건 닭 모가지 놈들!”

“닥쳐라! 누린내 근육!”

갑작스럽게 등장한 홍염의 파수꾼, 에덴티아가 황혼의 덩치들과 치열하게 눈싸움을 벌이자.

“그만그만! 이놈들! 모두 퇴교당하고 싶은 게냐!”

“양쪽 다 멈춰요! 기사 생도들! 마법 생도들! 당장 서로 물러나세요!”

달려온 교수들이 다급하게 중재하고 나섰고.

대치 상태의 중심에서 무등위 생도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떨고 있었다.

“야이…… 이게 맞냐?”

“일단 연합이라니까 우리도 저쪽으로 가요!”

“마, 맞아! 그게 좋겠어!”

이건 마치 폭풍전야, 멸망 직전의 혼돈.

그때, 기사 생도들의 무리가 썰물처럼 갈라지며 여지없이 아카데미의 지배자가 나타났다.

랭크 1위의 이명 생도, 뇌전의 기사 브훌렌이 목소리의 생도들을 훑어보며 미간을 구겼다.

“너희들을 어떡하면 좋지?”

대답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목소리 생도들은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루인을 시선으로 가리켰다.

인상을 쓰며 뒷머리를 긁적이던 브훌렌이 교수들을 향해 예를 갖췄다.

“생도들의 일입니다.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게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할 테니 여러 교수님들께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그래 주겠나?”

“하이렌시아가의 명예를 걸고 잘 마무리하겠습니다.”

“흠흠…….”

브훌렌이 나선 이상 믿을 수 있었다.

교수들이 멀어지자 브훌렌이 루인을 응시했다.

“어이 후배.”

“말해.”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억지로 화를 가라앉히는 브훌렌.

“너희들 꼭 훈련장을 계속 써야 되겠나?”

루인의 감정 없는 무심한 눈빛만으로도 브훌렌은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브훌렌이 황혼의 기사 생도들을 불렀다.

“어이, 너희 황혼.”

“……말씀하십시오.”

악다문 입, 이글거리는 눈빛의 주인공은 서열 24위에 랭크된 르카스였다.

“너희들, 앞으로 피의 결속자 그룹과 함께 제3훈련장을 써라. 그 녀석들에게도 내가 말해 둘 테니.”

“서, 선배님!”

“시끄러. 번복은 없다.”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짜증을 내는 브훌렌.

“훈련장 하나쯤은 마법학부에게 양보할 수 있잖나? 그동안 비정상적으로 누렸으면 양보할 줄도 알아야지.”

“애초에 주문쟁이들에겐 필요 없지 않았습니까!”

“이제 필요하다고 하잖나? 그동안 네놈들 너무 설친다 싶었는데 꼴좋게 됐지.”

“제발! 선배님!”

“닥쳐라. 그럼 뭐 마탑의 늙은이들하고 전쟁이라도 할 건가?”

“…….”

“한마디만 더 하면 내 권위에 불복한 것으로 간주하고 합당한 처결을 내리겠다.”

결국 르카스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리고 너.”

루인이 브훌렌의 복잡한 시선을 담담히 마주했다.

“정당한 결투였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매만지는 브훌렌.

저 건방진 대사를 또 듣게 될 줄이야.

“네게 한 달간의 근신을 명한다.”

“근신?”

루인의 고개가 기이한 각도로 꺾어졌다.

“그 빌어먹을 결투를 한 달간 금지한다는 뜻이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고 있는 루인.

이 왕립 아카데미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을 줄이야.

생도가 같은 생도에게 처결을 운운하고 근신을 명령하는 이 미쳐 버린 상황을 루인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장난 같은 서열 놀이도 우습기 짝이 없는데 그것도 모자라 생도가 같은 생도를 심판하는 문화라. 너희들 죄다 미쳐 버린 것이냐?”

“뭐……?”

“무슨 왕립 아카데미가 아니라 슬럼가를 만들어 놓았군. 이건 아카데미의 문화나 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기사. 아, 예우할 가치도 없겠군.”

어두운 광기로 비틀리는 입매.

마치 무생물을 바라보는 듯한, 모든 감정을 비운 그런 비웃음이었다.

나이에 비해 대단하다고 여겼던 처음의 만남과는 달리, 브훌렌에게 무가치를 판정한 것이다.

“설마 네놈의 그 알량한 특권은 렌시아가의 방계, 니스할가(家)의 권력에서 비롯된 것인가?”

순간, 브훌렌의 표정이 일변한다.

한없이 투명하게 가라앉은 눈.

니스할가의 권위와 명예가 모욕을 당했다.

더욱이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렌시아가를 하이(High)로 예우하지 않은 건 매우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너, 죽을 수도 있다.”

씨익.

“왜지? 네놈의 가문을 모욕해서? 아니면 이 배움의 성역을 한낱 슬럼가로 만들어 버린 렌시아 놈들을 예우하지 않아서?”

순간.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는 브훌렌.

거대한 공포의 권위, 대마도사의 분노와 지배력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근신을 거절한다. 이후 이 일로 또다시 나를 찾아올 시.”

악마처럼 일그러지는 미소.

“내 세 번째 결투 상대는 네놈이다. 그리고 그땐―”

아카데미에 또 하나의 절대언령이 현신한다.

<반드시 네놈을 죽일 것이다. 그 일에 내 이름을 걸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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