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04화 (104/187)

<104화>

황금빛 광채, 눈부신 노을이 사방에 가득한 곳.

거대한 유리 돔(Dome) 형태의 그룹 유적, ‘황혼의 안식처’.

사방이 질펀한 모래로 가득한 그곳에서 습관처럼 바닥의 모래를 훑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머리칼.

야수처럼 타오르는 눈동자.

강철 같은 근육과 꿈틀거리는 핏줄.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는 전형적인 황혼의 생도였다.

곧 그에게로 여러 명의 덩치들이 빠르게 뛰어왔다.

인상을 쓰며 콧구멍을 벌름거리던 사내가 덩치들을 향해 일갈했다.

“훈련이 끝났으면 좀 씻어라 이 새끼들아.”

“서, 선배님! 그놈들이 또 훈련장에 나타났습니다!”

“그놈들?”

“그때 그 주문쟁이 새끼들입니다! 선배!”

“뭐?”

‘황혼의 야생마’라는 다소 특이하고 우스꽝스러운 이명.

하지만 랭킹 4위에 빛나는 황혼의 대표적인 이명 생도.

그런 그라간이 천천히 육중한 동체를 일으켰다.

웬만한 사내보다 배는 더 큰 그의 육체란 가히 전설 속의 남신(男神).

황혼의 또 다른 랭커인 강철의 하이랜더가 마치 꼬마처럼 느껴질 정도다.

“선배님! 결투하실 생각입니까?”

뭘 그딴 걸 물어보느냐는 듯 혐오 섞인 그라간의 눈빛이 이어졌다.

“제2훈련장은 우리 황혼의 영역이다.”

“하지만 마탑의 늙은 주문쟁이들이 나선다면 골치 아파지지 않겠습니까?”

그라간의 두꺼운 입술이 씰룩거렸다.

“현자의 수제자라고 했나?”

“예. 게다가 엄청난 미모였습니다. 벌써 인기가 장난이 아닙니다.”

“그래서 뭐?”

“예……?”

씨익 웃는 그라간.

“넌 내 후원자가 누군지 잊었나?”

하이렌시아가의 후원 생도 그라간.

이미 하이렌시아가의 방계 성까지 약속받은 전도유망한 기사 생도.

“하지만…….”

“헛소리 그만하고 안내나 해. 척추 접어 버리기 전에.”

“히익! 아, 알겠습니다!”

*  *   *

루인 일행이 제2훈련장에 등장한 시점부터 이미 아카데미의 생도들이 구름처럼 모이고 있었다.

포효하는 황혼 그룹의 성향으로 미뤄 볼 때 또다시 훈련장에 등장한 무등위 마법 생도들을 용납할 리가 없었다.

결투는 당연시되는 분위기.

이명 랭커들의 드높은 자존심상 대부분의 결투는 은밀한 곳에서 남몰래 이뤄지기 마련이었다.

한데 강철의 하이랜더가 충격적인 패배를, 그것도 공개적인 장소에서 무등위 마법 생도에게 당해 버렸으니…….

때문에 학점이 빠듯한 생도들도 수업을 포기해 가면서까지 훈련장에 모여들었고, 심지어 호기심 강한 교수들까지 참관을 자처하고 나섰다.

와글와글.

휴가를 나갔거나 징벌을 받고 있는 생도를 제외한다면 거의 모든 생도들이 훈련장에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렇게 훈련장을 가득 메운 인파 속에서 세베론이 침을 꿀꺽 삼켰다.

“루, 루인!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수백여 명의 생도들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다.

세베론으로서는 처음 겪는 압박감.

이렇게 질식할 것만 같은 군중의 관심은 정말이지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수백만 인류 연합을 이끌던 루인.

고작 수백 명 정도로는 가벼운 감흥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수십만 단위로 펼쳐지는 군세의 열기, 분 단위로 수천 명이 죽어 나가는 처절한 전장 속에서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던 루인이었다.

“보폭은 최대 폭에서 7할 정도. 시선은 바닥을 향하지 말고 정면. 호흡은 의식해서 규칙적으로. 호흡이 흐트러지려 할 땐 차라리 속도를 줄여라. 언제나 말했듯, 가장 중요한 건 호흡이다. 쓸데없는 경쟁심을 갖지 마.”

시론이 씨익 웃었다.

“그치만 널 따라잡고 싶은 건 본능인걸?”

“그렇다면 넌 의미 없는 훈련을 하는 거다.”

“쳇.”

루인이 뛰기 시작하자 생도들이 뒤따랐다.

군중의 시선을 받으며 묵묵히 달리기 시작하는 루인과 생도들.

유적 동굴에서의 재구축 수련 이후 다들 눈빛이 살아나 있었다.

그들은 평생토록 해 왔던 마법 수련보다 유적 동굴에서의 일주일이 더 길게 느껴졌다.

그들은 많은 것을 느꼈고 또 이루었다.

후우- 후우-

어느덧 그들의 호흡은 루인을 닮아 가고 있었다.

보폭과 호흡, 동작과 속도 등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는 무등위 생도들.

그때.

“황혼 그룹이 나타났다!”

“황혼의 야생마!”

그라간을 선두로 수십여 명의 덩치들이 절도 있게 훈련장을 향해 걸어온다.

황혼의 기사 생도들은 예식이나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이상 언제나 생도복 상의를 입지 않았다.

그러므로 네모반듯한 저 근육들은 황혼 그룹을 상징하는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사실 가슴 근육의 크기가 저들의 서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저벅저벅.

그라간이 선두에서 뛰고 있는 루인을 발견하더니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눈빛만 살펴봐도 올칸을 쓰러뜨린 놈이란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라간은 올칸처럼 함부로 무식하게 짓쳐 들지 않았다.

뇌까지 근육으로 차올라 버린 다른 황혼 녀석들과는 달리 자신은 전략이란 걸 아는 기사.

이미 올칸을 쓰러뜨린 녀석의 실력을 완벽히 숙지하고 왔다.

그러나 아무리 자세하게 놈의 실력을 파악하고 왔다손 치더라도, 놈의 무투술을 직접 겪어 보지 않은 이상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놈의 무등위 견장은 완벽히 무시한다.

상대는 6위에 새롭게 랭크된 이명 생도일 뿐.

한데.

“왔군.”

달리기를 멈춘 루인이 생도복 하의의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건 꾸깃 구겨진 예식용 장갑이었다.

텁.

그라간은 새하얀 뭔가가 자신의 몸에 맞고 땅에 떨어지고 나서야 그게 장갑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당혹스러운 감정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난 그라간.

“이…….”

가타부타 인사말 한마디도 없이 장갑부터 던지는 놈이라니.

한데 이어진 놈의 말은 더 가관이었다.

“기사를 상대할 때 처음으로 살펴야 할 것은 눈이다. 투기의 성질을 예측할 수 있지. 모든 투기는 고유의 감정을 담아낸다.”

금방 호기심을 드러내는 놀라운 미모의 여생도.

“그럼 지금 저 선배는 어떤가요?”

다시 자신을 바라보는 놈의 무감각한 두 눈.

“심지가 굳은 자의 눈빛이다. 이런 자는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검술을 구사하지. 하지만 아쉽군. 역시 도취되어 있어.”

“도취라뇨?”

“우매함의 봉우리. 자신이 올라선 꼭대기가 가장 높다고 믿는 마음이지.”

“아…….”

“이 정도 수준에선 사실 투기의 기질을 살피는 게 무의미하다.”

“왜죠?”

“감정을 읽히는 기사의 경지란 대체로 높은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

<눈빛만으로 기사의 역량을 재단한다는 건 좀 비약이 심한 거 아닌가요?>

그라간은 깜짝 놀랐다.

갑자기 웬 여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려 오는데 어디서 들려오는지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

루인이 씨익 웃는다.

“생도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지 않느냐. 결투의 시작을 알렸는데도 아직도 당황하고만 있다. 마법사에게 시간을 내어 준다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모르는 거다. 다프네, 너라면 이 정도 시간에 몇 개의 마법을 메모라이징할 수 있지?”

“네다섯 개 정도?”

“아직도 내가 이 녀석의 실력을 가늠해야 하나?”

지독한 모멸감에 온몸이 떨려 온다.

살면서 이렇게 화가 나는 건 처음이었다.

그때.

놈의 등 뒤에서 마력 칼날 다발이 천천히 떠올랐다.

“칼날 지배자!”

“야생마와 칼날 지배자가 결투를 시작했다!”

관람하고 있던 생도들의 흥분 섞인 외침.

야생마 VS 칼날 지배자.

여기서 웃음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큽!”

“악!”

“푸웁!”

차마 당사자들 앞에서 웃을 수 없었던 무등위 생도들이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을 때.

후배들에게 육중한 중검을 건네받은 그라간이 그대로 투기를 끌어올렸다.

중검의 검끝에 노을과 같은 빛무리가 일어나자.

“통상적으로 기사의 스피릿 오러는 4위계 원소 마법의 파괴력과 맞먹거나 그 이상이다. 그 정도 파괴력을 상시 유지한다는 점에서 마법사에겐 재앙이라 할 수 있지. 원래라면 접근전은 불가능하다.”

쐐애애액!

갑자기 여섯 개의 마력 칼날이 날아들자 그라간의 중검이 맹렬하게 소용돌이 쳤다.

회전하는 힘을 이용해 다수의 검을 막는 기초 방어 검술.

투캉! 카앙!

한데 뭔가 뒤가 허전하다.

그라간이 동물적인 감각으로 등 뒤를 돌아봤을 때.

빠악!

허벅지를 휘감아 오는 격렬한 통증.

“흡!”

중검을 역수로 잡은 그라간이 그대로 후방을 향해 찔러 넣는다.

까앙!

마력 칼날을 통제하던 염동력이 순간적으로 흐트러졌다.

조금은 놀라는 루인.

그라간의 검은 마치 움직이는 바위 같았다.

마치 검술 교본과 같은 정통의 중검술.

일체의 잔재주 없이 오로지 간결하고 묵직한, 그런 부변(不變)의 검.

부우우웅!

느리다 못해 답답하게 느껴지는, 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쏴아아아아-

순간 루인의 마력 칼날들이 모조리 투명한 물로 변한다.

다프네는 그런 루인의 술식이 4위계 군집 마법, 워터 스웜(Water Swarm)인 줄로만 알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뭔가 달랐다.

투명한 물 뭉치 여섯 개.

염동력으로 다루고 있다고 보기엔 뭔가 움직임이 기이하다.

“정통적인 힘의 검을 구사하는 기사를 맞상대할 땐―”

중검이 떨칠 궤적의 끝을 미리 선점하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물 뭉치들.

첨벙!

그렇지 않아도 느릿한 중검이 더욱 느릿해진다.

“부딪치는 것보단 상쇄가 효과적이다. 그리고―”

빠각!

순간적으로 파고들어 그라간의 허벅지를 감아 차는 발길질.

“크윽!”

이어지는 쾌속의 5연타.

퍼퍼퍽!

“큰 힘은 반드시 큰 동작을 수반한다. 일반적인 검술보다 빈틈에 취약하지.”

결국 스피릿 오러에 의해 하나의 물 뭉치가 모조리 기화(氣化)되었고.

오히려 그런 뿌연 안개를 루인이 이용했다.

“워메이지의 무투술은 이런 걸 가능케 한다.”

빠각! 퍼퍽!

셀 수 없는 환영, 엄청난 주먹과 발길질의 연격에 정신없이 물러나면서도 상처 입은 짐승처럼 강렬한 눈빛을 빛내고 있는 그라간.

공격이 끝났을 땐 루인이 주먹을 털어 내며 씨익 웃고 있었다.

“이래서 내가 그래 봤자 생도 수준이라고 하는 거다. 이 와중에도 내 빈틈을 찾겠다고 여유를 부리고 있지 않느냐.”

부우우웅!

그라간의 중검이 다시 스피릿 오러를 뿜었고.

“왜 내가 하단만 노리고 있는지.”

쏴아아아아!

다시 중검을 감싸 버리는 물 뭉치.

“본인이 무슨 함정에 빠지고 있는지.”

빠각! 퍼벅!

“커흑!”

그라간의 양 허벅지와 종아리가 차마 보기가 힘들 정도로 시퍼렇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과연 저 상태로 걸을 수 있을지가 의문일 지경.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검만 휘두르지.”

악착같이 깨문 입, 그라간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중검을 다루는 기사는 하체가 단단하지 않으면 절대로 검을 다룰 수 없지. 게다가 본인에게 불리한 공간이라면 더더욱.”

“뭐……?”

그라간이 멍하게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을 바라봤을 때.

미끌.

“어? 어! 아아악!”

정신없이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허물어져 버린 그라간.

꽈당!

“저건?”

“와! 저걸 언제 깔아 둔 거야?”

그것은 누구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마법.

시전자가 지정한 일정 범위의 마찰 계수를 제로에 가깝게 만들어 버리는.

중급 윤활 마법, 그리즈 필드(Grease Field)였다.

시론이 멍해진 얼굴로 세베론을 쳐다본다.

“정말 4위의 랭커가 맞나? 저번 강철 선배보다 더 약한 거 같은데?”

“……그러게?”

<이건 루인 님의 마도가 아니야.>

분명 루인이 지금까지 보여 줬던 전장의 마도(魔道)가 아니었다.

그런 일격필살의 마도와는 거리가 먼, 전혀 궤가 다른 마도.

루인이 필사적으로 일어나려는 그라간을 바라보며 웃었다.

“옛 친구의 방식이다.”

목소리 생도들이 헤스론의 재구축 수련법을 익힌 이상, 루인은 그의 마도를 함께 보여 주고 싶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효율을 추구하는 헤스론의 마도, 그 유틸 마법의 극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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