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아카데미의 지하 입구 근처에서 여러 명의 마법 생도들이 긴장하며 서 있었다.
“벌써 일주일째군.”
‘환영의 등나무 탑’의 리더 생도 볼칸은 고작 무등위 생도를 기다리는 일에 일주일이나 허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그룹의 유적을 함부로 침범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볼칸에게 핀잔을 놓은 여생도는 다름 아닌 ‘꿈꾸는 불새의 둥지’의 리더 생도 에덴티아였다.
유적은 그룹의 성역(聖域).
유명무실하지만 목소리 그룹도 엄연히 그룹이었기에 함부로 그들의 영역을 침범할 수는 없었다.
“젠장, 대체 그 루인이란 녀석은 왜 육체 수련에 그토록 집착하는 거지?”
“레예스의 말을 듣지 못했어? 녀석은 워메이지야. 무투술만으로도 그 무식한 근육 괴물을 압도해 버린 녀석이라고.”
마법학부의 이명 생도들이 아카데미의 지하 입구에 이렇게 진을 치고 있는 이유는 무등위 생도들의 훈련장 수련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핍박받던 후배들이 목소리 녀석들 때문에 더욱 힘든 아카데미 생활을 버티고 있었다.
만약 그 무식한 ‘포효하는 황혼’ 녀석들을 더 자극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금 에어라인 아카데미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 같은 상태.
“워메이지? 헤이로도스의 전승자? 누굴 바보로 아나? 넌 레예스의 말을 믿는 건가?”
“그럼?”
“레예스는 음흉한 놈이다. 우릴 바보로 만들고 뒤에서 또 뭔가 꾸미고 있겠지.”
“아? 그럼 그 결투를 지켜본 다른 생도들도 다 똑같은 병신이고?”
“말조심해라. 에덴티아.”
가볍게 무시하며 피식거리던 에덴티아가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지하도를 바라보았다.
“난 그래도 조금은 통쾌해. 기사학부의 이명 랭커를 대인전으로 꺾어 버린 후배라니. 녀석…… 정말 허풍이 아니었어.”
“뭐? 놈을 알고 있는 건가?”
“나한테 물었었어. 훈련장을 쓰려면 누구를 쓰러뜨려야 하냐고.”
선배들 틈에서 조심스럽게 듣고 있던 3등위 마법 생도 바잔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럼 녀석의 결투가 애초에 계획된 결투란 말씀이세요? 선배님?”
“반쯤은 그렇겠지.”
“반이라뇨?”
“내가 상대하라고 말해 준 랭커는 근육 괴물 올칸이 아니었거든.”
“아…….”
3등위 마법 생도 리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실은 선배님…… 녀석을 영웅 취급하는 애들이 더 많아요.”
“그렇겠지. 대부분의 후배들이 황혼 녀석들의 핍박을 견뎌 왔으니까.”
에덴티아의 시선이 후배들을 훑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분란은 안 돼. 만약 패싸움이라도 일어났다간 전부 퇴교 처분을 받게 될 거야. 이쯤에서 조용히 넘어가는 게 최선이야.”
아카데미가 최대로 허용하는 건 결투까지.
집단전이 발생한다면 반드시 아카데미는 교칙으로 다스릴 것이다.
그리고 ‘황혼’은 충분히 그런 짓을 벌이고도 남을 미친놈들이었다.
“오늘도 안 나올 모양인데 난 이만 가겠다.”
그렇게 볼칸이 뒤돌아섰을 때.
3등위 마법 생도 바잔의 경악성이 들려왔다.
“저, 저기! 목소리 생도들입니다!”
“뭐?”
홱 하니 돌아보는 볼칸.
지이이잉-
부유 계단을 타고 천천히 지상으로 상승하고 있는 목소리 생도들.
그들의 붉은 견장에 아무런 매듭이 없음을 확인한 볼칸이 매섭게 눈을 빛냈다.
“이제야 저 머저리 후배 놈들을 보게 되는군.”
불쾌한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볼칸과는 달리 에덴티아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녀석들…… 뭔가…….’
목소리 그룹의 무등위 생도들.
아카데미 밖, 여관에서 만났을 때와는 풍겨 오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그러나 그 느낌을 쉽게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뭔가 더 깊어진, 더욱 차분해진 눈빛들.
그리고 알게 모르게 풍겨 오는 여유로움.
녀석들의 분위기는 그렇게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앗? 에덴티아 선배!”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녀석은 현자의 손자 시론.
이미 저 목소리 생도들의 신분은 아카데미에 파다했다.
특히 저 아름다운 얼굴의 다프네, 현자 에기오스의 수제자는 루인과 필적할 정도로 유명해져 있었다.
부우우웅-
무등위 생도들이 부유 계단에서 차례로 내리자 에덴티아가 다가갔다.
그녀가 이내 루인을 마주 바라보았다.
“대체 일주일 동안이나 유적에서 뭘 한 거야?”
“수련.”
루인의 짧은 대답.
볼칸의 고개가 기이한 각도로 꺾어졌다.
“이거 예절까지 말살된 놈이군.”
루인의 무심한 시선이 볼칸에게 향했을 때 에덴티아가 황급히 제지하고 나섰다.
“이, 이 녀석에게 예의를 바라는 건 헛된 망상이야. 그냥 그러려니 해.”
“아카데미의 등위 체계를 무시하자는 건가?”
“휴…….”
사실 에덴티아는 루인이 자신에게 반말하고 있다는 걸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왠지 모르게 당연하다고 느껴졌기 때문.
녀석의 아득한 눈빛, 우아하고 정제된 그 기품은 마치 대귀족을 눈앞에 둔 기분이었다.
“제 잘난 맛으로만 사는 건방진 놈들은 늘 통념과 체계를 무시하지. 부디 네놈은 오래도록 그 건방짐을 유지해라.”
루인의 얼굴에 답답한 기운이 서렸다.
자신의 말투는 건방지거나 허풍을 떨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의식의 문제.
수만 년을 살아온 대마도사의 자아가 이런 핏덩이들에게 본능적으로 존댓말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명 랭커도 귀족도 아카데미의 등위를 무시할 순 없어요.”
다프네의 조심스러운 충고.
루인이 다시 차분한 눈빛이 되어 에덴티아를 응시했다.
“우리들의 훈련을 방해하기 위해 나선 건가?”
“아…….”
한없이 투명하고 차분한.
저 냉정한 눈, 저 무감한 감정은 언제나 에덴티아를 당황스럽게 했다.
그저 마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조여드는 것만 같은 기분.
지켜보고 있던 볼칸이 끼어들었다.
“네놈! 그런 건방진 태도를 계속……!”
“선배님, 이 한마디가 그토록 듣고 싶습니까.”
무등위 생도들이 모두 떠억 하고 입을 벌렸다.
루인이 등급 생도를 향해 존댓말을 하는 모습이 처음이었기 때문.
“후배의 존댓말로 자존감을 채우는 스타일이라면 그렇게 대접해 드리죠. 단.”
“뭐? 자존감?”
“얻을 수 있는 건 제 존댓말 하나뿐. 진정한 의미의 대화, 즉 설득 같은 건 처음부터 포기하셔야 할 겁니다.”
볼칸의 시선을 외면한 루인이 곧바로 생도들에게 말했다.
“훈련장으로 간다.”
“자, 잠깐만!”
에덴티아가 황급히 뛰어와 루인을 막아섰다.
“저 녀석은 무시해. 원래 저런 녀석이야. 잠깐만 대화를 하자. 우리 제법 통했잖아?”
그런 에덴티아와 눈짓을 주고받던 다프네가 루인의 옆구리를 찔러 댔다.
“선배님도 입장이 있으실 텐데 들어나 보죠.”
“맞다 루인. 모든 선배들과 결투를 벌일 것이 아니라면 일단 들어나 보자고.”
시론까지 동조하고 나서자 루인의 시큰둥한 표정이 조금은 옅어졌다.
<마법사는 이성(理性)을 사유하며 합리(合理)를 궁구하는 존재. 모두와 갈등하는 건 마법사의 방식이 아니에요.>
“뭐, 뭐야!”
“으, 음성 증폭 마법?”
마법학부의 등급 생도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들과는 조금 다른 결로 놀라고 있는 생도는 볼칸과 에덴티아가 유일했다.
“설마 이건!”
“절대언령……?”
볼칸의 의문에 다프네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배님. 저기 루이즈가 바로 절대언령의 보유자예요.”
볼칸이 멍하니 다프네의 시선을 좇았다.
그곳엔 나무 지팡이를 손에 든 무등위 여생도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처음 인사드려요. 저는 루이즈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볼칸은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헤이로도스의 술식만큼이나 전설적인 경지, 절대언령(絶對言靈).
그 이론상의 경지를 직접 경험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볼칸이 황급히 마도의 예를 취했다.
“나, 나도 반갑다. 볼칸이다.”
깍듯한 예에 걸맞은 화답.
뭔가 느끼는 바가 있는 듯, 묘한 표정을 짓던 루인이 에덴티아를 쳐다봤다.
“일단 들어는 보겠습니다.”
“아? 그래 줄래?”
루인의 말투는 달라져 있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너희들, 훈련을 포기하진 않겠지?”
“말씀하신 대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신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에덴티아.
“황혼 녀석들과 어떻게든 협상해 볼 테니까 일단 내게 시간을 좀 더 줘. 시간대를 조정하거나, 선 통보로 녀석들의 체면을 세워 주는 방식 정도면 충분히 협상의 여지가 있거든.”
“…….”
“아, 그리고 훈련장의 사용료를 지불하는 방법도 한번 생각해 봐. 얼마를 부를지는 모르겠지만 황혼 녀석들 전부와 싸우는 것보단 낫잖아?”
루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상납 같습니다만.”
“뭐……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지금의 방식보단 나을 거야.”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에덴티아가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가망성은 낮지만…… 6위의 이명 랭커를 꺾어 버린 넌 내내 무사할 수 있다고 쳐. 네 친구들 역시 보통의 실력이 아닌 것 같으니 어떻게든 황혼 녀석들을 이긴다고 치자고.”
에덴티아가 무등위 생도들을 차례차례 훑었다.
“하지만 너희들이 유적에 들어가 버리고 난 후엔? 더욱 심해질 핍박과 견제는 모두 평범한 마법 생도들이 감당해야 돼.”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루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이상했습니다.”
“뭐가?”
“아카데미가 허용한 유일한 갈등 해결 방식인 결투. 하지만 그 방식은 대인전에 취약한 마법학부가 무조건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죠.”
루인이 기사학부 쪽 유적들을 바라보았다.
“이건 누군가의 의도입니다. 이런 불합리를 방치한다는 것은 기사학부의 학부장이든 아카데미의 학장이든 높은 분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겠지요.”
볼칸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루인을 직시했다.
“그럼 넌 이 기사의 왕국을 뒤집을 방법이라도 있다는 거냐?”
여기서 왕립 아카데미의 불합리한 구조와 생태를 모르는 마법 생도는 없었다.
한데, 그저 현실을 모르는 애송이처럼 여겼던 루인에게서 놀라운 말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렌시아가의 위세를 감당할 수 없는 교수들. 렌시아가의 뇌물과 청탁에 길들어져 버린 고위 간부들. 렌시아가의 후원자를 두려워하는 생도들.”
루인의 시선이 머나먼 남쪽을 가리켰다.
“모든 불합리의 시작점은 단 한 곳뿐입니다.”
하이렌시아가.
지금 루인은 그들을 마법학부의 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훈련 시간대를 옮기고 선 통보로 체면을 세워 주며 상납을 해서라도 갈등을 유발하지 않는다. 고작 그런 게 후배들을 위한 길이라니. 뭔가 착각하고 계신 거 아닙니까?”
“……뭐?”
“저희가 유적 동굴에 입장하고 난 이후의 일을 따져 물으셨으니 저도 질문 하나 하죠.”
차갑게 가라앉은 눈.
“선배들의 졸업 이후, 그때는 어떻게 후배들을 보호하실 계획입니까?”
“…….”
“…….”
아무런 대답 없이 굳어져 버린 선배 마법 생도들.
이내 루인의 선언 같은 외침이 그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성을 공략하려면 마장기가 필요한 법. 마법학부를 진정으로 위한다면 저를 마장기로 쓰셔야죠.”
볼칸의 눈빛이 미친 듯이 흔들린다.
왕립 아카데미에 뿌리내린 불합리.
그리고 그런 모든 불합리의 근원인 하이렌시아가라는 거대한 성(城).
“설마! 넌!”
말없이 미소 짓고 있는 루인.
에덴티아가 질린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후, 이 녀석…… 애초에 협상 같은 걸 할 생각이 없었네. 괜히 일주일 동안 헛수고를 했어.”
“엇? 저희를 일주일이나 기다리신 겁니까?”
당황해하고 있는 세베론을 향해 에덴티아가 싱긋 웃었다.
“뭐, 이게 ‘칼날 지배자’의 방식이라면 받아들여야겠지. 사실 한편으로는 기대도 되고.”
“……칼날 지배자요?”
무등위 생도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로를 살피고 있을 때.
“몰랐어? 새롭게 6위에 랭크된 이명 생도. 그게 저 녀석의 이명이야.”
시론의 입가가 조금씩 씰룩거렸다.
다프네의 아름다운 눈도 활처럼 휘어졌다.
세베론 역시 참을 수 없다는 태가 역력했다.
<호호호!>
거칠게 얼굴을 구기고 있는 루인.
조금씩 그의 어깨가 떨려 간다.
‘하…….’
이걸 검성 녀석이 들었다면 최소 3년, 아니 30년의 놀림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