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희미해져만 가는 리리아의 마력, 그 잔향이 의미하는 것.
이 현상을 생도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리, 리리아!”
슈리에가 가장 먼저 그녀를 향해 뛰어갔다.
창백해진 리리아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가 이내 눈물을 터뜨렸다.
“아…… 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슈리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체 왜…….”
“나는 나를 믿는다.”
스스로를 향한 믿음 없이는 결코 실행할 수 없는 수련법.
“아니 그렇다고 정말로 고리를 부수면 어떡해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무심한 표정만 짓고 있는 리리아.
그러나 한 마법사의 모든 역량, 고리를 부수는 각오가 가벼울 리가 없다.
“그리고 난 저 녀석도 믿는다.”
“…….”
슈리에의 눈물 그렁한 두 눈이 루인을 쏘아봤다.
루인은 천재 같은 것이 아니다.
세상의 잣대로 가늠할 수 없는, 그야말로 규격 외의 괴물.
그런 무시무시한 괴물의 방식을, 평범한 인간들이 흉내 내려 했다간 파멸을 맞이할 수도 있는 일.
오랜 갈망으로 완성한 한 마법사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고리였다.
그런 서클을 장난처럼 붕괴니 재구성이니 말하는 루인에게 슈리에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신이 모두 책임지세요!”
무표정하게 슈리에를 바라보는 루인.
“너는 왜 리리아를 믿지 않지?”
“아, 아니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 이건 믿음의 문제다 슈리에.”
루인이 유적 동굴의 벽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넌 믿지 못하고 리리아는 믿는다. 이건 그냥 그런 문제다. 다른 해석 따윈 없어.”
리리아는 그런 루인을 차분히 응시하고 있었다.
굳이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아도 루인은 그녀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네 마도는 많이 변했다 리리아. 마법보다는 그 마음이 더더욱.”
츠츠츠츠츠-
루인이 오드를 소환하자 동굴이 다시 환해졌다.
오드가 미끄러지듯 허공을 나아가더니 리리아의 곁에서 도도한 회전을 멈추었다.
“달라진 마음, 변한 네 심상으로 다시 처음부터 길(道)를 뚫어라. 억지로 고리를 완성하려는 마음을 버려. 그저 지금의 네가 어떤 사람, 어떤 마법사인지를 직시해라.”
우우우우웅-
루인의 마나 서클, 오드가 가늘게 떨리더니 주변으로 강한 마력을 떨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관조다.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꿈꾸는 너의 본질이다.”
마침내 리리아가 눈을 감았을 때, 시론이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유적 동굴 속을 떠돌던 마나의 유량이 달라졌다.”
시론은 루인의 마나 서클이 무슨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지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마나 포인트?”
“……아니야.”
마나 수련을 돕기 위해 마법진을 펼친 장소를 마나 포인트라고 불렀다.
이어진 세베론의 대답.
“마나 포인트와는 느낌이 달라.”
그런 인위적인 장소가 아닌, 마정(魔精)이 탄생할 수 있는 바로 그런 곳.
“이건 마도서가 설명했던 마나존에 가까워.”
마나존(Mana Zone).
천 년에 한 번 발견하기조차 힘든 대자연의 신비.
“그럼 지금 여기가…….”
시론은 지금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한 행운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를 깨달았다.
그러나 다프네가 조금 빨랐다.
스스스스스-
도도한 마나의 흐름이 그녀의 주위로 흩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이룬 여섯 개의 고리가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눈짓을 교환한 시론과 세베론도 서둘러 자리를 잡았다.
어느새 유적 동굴은 생도들이 흩어 낸 마력으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슈리에는 끝내 미동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루인을 믿지 못하기보단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었다.
* * *
고풍스러운 탁자 위 한 장의 통보서.
마탑의 최고 위계인 에이션트 매지션 네홈에게도 그 글귀는 너무 충격적인 것이었다.
“타, 탑주님?”
네홈은 현자 에기오스의 결연한 눈빛을 마주하며 거칠게 고개를 도리질했다.
“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탑주라니요?”
“이미 왕실과 모든 협의를 끝마쳤네. 지금부터 자네가 새로운 마탑주, 차기 현자일세.”
“탑주님!”
“조만간 이 사실이 탑주의 이름으로 공표될 걸세. 새로운 시대를 잘 이끌어 가게나.”
네홈이 어지러운 감정을 겨우 추스르며 고개를 들었다.
“설마 그 일 때문에 이러시는 겁니까?”
담담하게 웃는 에기오스.
“부정하진 않겠네. 이제 그 녀석이 인간이든 드래곤이든 상관없네. 헤이로도스의 전승자가 확실해진 이상, 나는 반드시 녀석의 마도를 연구해야 하네.”
“하지만 굳이 이러실 필요까지 있으십니까? 마도 연구라면 현자의 지위를 유지하고서도 얼마든지…….”
에기오스가 네홈의 말을 잘랐다.
“벌써 어브렐가의 가주가 움직였네. 웬만한 마도명가는 모두 녀석의 후원자가 되려고 줄을 서겠지. 물론 왕실도 내 경쟁자네. 왕국의 현자네 탑주네 게으름을 피웠다간 녀석의 그림자조차 밟아 볼 기회가 없겠지.”
르마델의 왕립 아카데미에 헤이로도스의 마법이 출현했다는 소식은 결국엔 주변 국가로까지 퍼져 나갈 것이다.
공개된 장소에서 워낙 많은 생도들이 지켜보았기 때문.
지금까지야 이런저런 핑계로 에어라인의 입천을 막고는 있지만, 결국엔 마도명가들의 끈질긴 집념을 감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이 소식이 주변 왕국으로 퍼져 학회가 움직일 때쯤엔 모든 게 끝장이네. 그들의 요구는 막을 수 있는 게 아닐세. 최악의 경우, 헤이로도스의 전승자를 타국에 빼앗길 수도 있네.”
네홈의 표정도 점점 더 심각해졌다.
“그 전에 반드시 헤이로도스의 비기를 우리 르마델이 취해야 되겠군요.”
“아니지. 본 마탑이 소유해야지.”
“아…….”
즉각적으로 에기오스의 뜻을 이해한 네홈.
르마델의 마탑이 대대로 존속할 수 있었던 건 이 마탑에 대체 불가의 자원이 항상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이 절실히 바라고 있는 역량을 보유하는 것.
그것이 이 기사의 왕국에서 마탑이 살아남은 방식.
그때.
똑똑-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집무실에 들어온 한 마법사가 에기오스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탑주님, 마법학부의 학부장님께서 입탑하셨습니다.”
“학부장님께서?”
“……헤데이안이?”
에기오스와 네홈이 서로를 마주 보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성 폭풍’과 같은 대재앙 속에서도 마탑과의 협력을 거부한 헤데이안이었다.
그가 마탑을 찾은 건 십수 년 만의 일.
“일단 모시게.”
“네, 탑주님.”
네홈은 아직도 눈에 핏발을 세우며 에기오스와 맹렬히 논쟁하던 그의 모습이 선명했다.
에기오스와 완벽히 반대되는 성향의 학파에 몸을 담고 있는 그는 현자 에기오스의 유명한 앙숙이었다.
“헤이로도스의 마법이 대단하긴 대단하군요. 학부장님을 마탑에 오르게 만들다니.”
“그러게 말일세.”
잠시 후, 헤데이안 학부장이 에기오스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서 있던 그에게로 네홈이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학부장님. 이게 몇 년 만인지요? 이렇게 정정하신 모습을 뵈니 이 네홈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일랑 집어치우고 자리나 내주게.”
“……앉으시지요.”
헤데이안의 표정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마탑엔 죄다 이런 놈들뿐이었다.
마도를 궁구하는 마법사라기보단 정치꾼에 가까운 자들로만 득실거리는 곳.
자리에 앉은 헤데이안이 곧장 에기오스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보아하니 이번에도 잔머리를 굴려 댈 심산이군.”
“그 가벼운 언행은 언제 고쳐질 요량인가?”
헤데이안이 탁자 위의 통보서를 힐끔 바라봤다.
“이 핏덩이에게 왕국의 현자라…… 제정신인가?”
“지나친 언동을 삼가라고 했네. 그는 본 마탑의 에이션트 매지션일세.”
“흥!”
아직도 헤데이안에게 네홈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마도서나 옮기던 수련 마법사에 불과했다.
에기오스의 비위를 맞춰 가며 지위를 누려 온 자.
마법사라기보단 정치질과 아부에 능한, 그저 세태와 야합한 전형적인 직업 마법사였다.
“이렇게 헛된 힘이나 빼고 있을 줄 내 잘 알고 있었지. 이쯤에서 집어치우게. 헤이로도스의 마법은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위대한 마법이 아니야.”
에기오스는 헤데이안의 말에 담긴 묘한 뉘앙스에서 그가 이미 루인의 마법을 살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헤이로도스의 술식을 직접 살폈다는 뜻인가?”
“녀석을 만나고 오는 길이지.”
금방 호기심 가득한 네홈의 눈빛이 헤데이안을 향했다.
“위대한 마법이 아니라는 말씀은…….”
헤데이안은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것을 담담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에기오스와 네홈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 갔다.
과연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왜 그동안 헤이로도스의 전승자가 탄생하지 않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허허, 심상계와 인식계의 경계가 무너지는 경지라…… 그게 인간에게 가능한 경지인가?”
“저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탑주님. 사람이 천 년을 산다고 해도 그런 건…….”
헤데이안 학부장이 허탈하게 웃었다.
“무엇보다 황당한 건 그 염동력이지. 그건 인간의 수명으로 완성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닐세.”
결국 에기오스는 헤데이안이 미처 놓치고 있는 부분을 말해 줄 수밖에 없었다.
“헤이로도스의 마법이 그런 초월적인 마법이라면 더욱 확실해졌군. 헤데이안. 그는 백룡(白龍) 비셰리스마일세.”
“……비셰리스마?”
르마델 왕국의 개국 초기에 활동한 전설적인 드래곤의 이름.
그 녀석이 하이베른가의 수호룡이라고?
잠시 멍해져 있던 헤데이안이 배를 잡고 웃었다.
“허허허허! 과연 그럴싸해! 드래곤의 수명이라면 그런 탈인간적인 정신과 염동력의 보유가 가능하겠지! 하지만…….”
“……?”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에기오스를 향해 헤데이안이 싱긋 웃어 주었다.
“녀석은 누가 뭐래도 인간일세. 드래곤일 리가 없어.”
에기오스는 헤데이안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는 헤데이안은 결코 함부로 확언을 내뱉는 이가 아니었다.
“무슨 근거로 그런 확신을 하는가?”
헤데이안 학부장이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한참 동안 생각에 빠졌다.
막상 설명을 하자니 그럴싸한 근거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자신의 판단을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사람만이 향유할 수 있는 생각이네. 같은 사람이기에 느낄 수 있는 사고(思考)지.”
“그건 확증이라기보단 자네의 감이지 않은가?”
<제게 저들은 의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루인의 말을 떠올리던 헤데이안이 빙그레 웃었다.
“그건 유희 같은 게 아닐세.”
그 위대한 존재가 인간을 동등한 인격체로 인식한다고?
무엇보다 드래곤이 인간을 믿는다고?
에기오스가 의문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다시 헤데이안을 마주 바라보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군. 평생 날 보지 않을 것처럼 굴던 자네가 이런 모호한 이야기나 하려고 굳이 마탑에 올랐단 말인가? 자네답지 않네.”
“경고하러 왔네.”
“……경고?”
자리에서 일어난 헤데이안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에기오스를 훑었다.
“녀석을 향한 어떤 만남도 허용할 수 없네. 녀석이 생도인 이상 이건 내 권한이야.”
치졸하게 학부장의 지위를 내세우다니.
에기오스의 눈빛도 매서워졌다.
“녀석의 마도를 독점하려는 건가?”
“허허, 착각이 심하군.”
“뭣?”
헤데이안의 투명해진 눈빛.
“녀석은 타인의 간섭을 극도로 싫어하네. 녀석이 돌변하여 생도를 포기한다면 이 왕국은 천 년 만에 탄생한 마도사를 잃게 될 테지.”
“마, 마도사?”
“그래, 에기오스. 처음엔 나도 받아들이지 못했네. 내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 하지만…….”
헤데이안의 동공에 찰나지만 공포가 서렸다.
“내가 본 것은 분명 마도사의 영역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