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루인의 마나 서클, 오드를 처음 본 다프네는 루인이 드래곤이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세계를 관장하는 드래곤 종족은 신들에게 부여받은 축복받은 마도 기관, 드래곤 하트(Dragon Heart)를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다프네 역시 그런 드래곤 하트를 직접보진 못했지만…….
‘틀려…….’
유희 동반자, 유겔라.
드래곤을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쳐 온 악스타온 학파의 위대한 선구자.
그가 남긴 하나뿐인 마도 비서(祕書) ‘유겔라의 서’에 묘사된 드래곤 하트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묘사한 드래곤 하트의 형태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확증을 추구하는 마도학의 특성상 그 묘사가 아예 엉터리는 아닐 터.
문제는 루인의 마나 서클이 그런 드래곤 하트와 비슷하기는커녕 완전히 다른 형태라는 것이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지 다프네? 루인이…… 인간이 아니란 뜻인가?”
시론의 질문에 생도들의 시선이 모두 다프네에게 향했다.
사실 헤데이안 학부장이 워낙 동요하는 와중이라 내색하지 못했을 뿐, 루인의 마나 서클에 큰 충격을 받은 건 생도들도 마찬가지.
“그건…….”
다프네는 더 이상 자신의 속내를 숨기는 게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그녀는 마탑이 루인을 드래곤이라고 의심하고 있는 상황, 그리고 자신이 마법학부에 몸담은 진정한 이유에 대해서 모두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드, 드래곤으로 의심을 했다고?”
시론이 루인을 쳐다본다.
지금까지 녀석의 모든 것이 드래곤의 유희라니?
이제 시론은 느끼고 있었다.
저 차갑고 무감한 표정으로 감추고 있는 녀석의 진정한 마음을.
그런 녀석의 뜨거움이 한낱 드래곤의 유희에 불과하다니.
<제게 저들은 의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녀석은 마법사로서의 최대 약점을 드러내면서도 믿음을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열성적으로 신의의 맹세를 외치던 지금까지의 친구들과는 결부터가 다르다.
단 한마디에 불과했지만 녀석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내 그는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다프네.”
다프네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마나 하트 문제는 접어 두고서라도 그가 마음을 쓰는 방식, 갈등을 해결하는 모습 등은 한없이 인간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지금 이 모든 추억들이 그의 유희에 불과하다면 너무 서글플 것 같았다.
<약속한다면 모두 드러내 주지.>
실험실에 잔잔히 울려 퍼지던 루인의 목소리.
리리아 역시 그의 그 말에 이토록 엄청난 비밀들이 존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가만 생각을 해 보니 지금까지 루인이 뱉은 말 중에 지켜지지 않은 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확언(確言)하고 그 말을 지켰다.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거짓을 말하고 술수를 부리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온 리리아.
이런 유형의 사람은 그녀로서도 처음 겪는 것이었다.
“또 뭐가 남았어?”
어느덧 루인에게 다가간 세베론이 울상을 짓고 있었다.
“우릴 더 놀래킬 게 남아 있으면 미리 지금 다 보여 줘! 이러다 오래 못 살겠다고!”
“동감이에요. 아까 전엔 정말 심장이 두근거려서 수명이 단축되는 기분이었다고요.”
워메이지의 무투술과 헤이로도스의 마법.
설명할 수 없는 아공간, 게다가 이런 터무니없는 마나 서클.
거기에 엄청날 것으로 예상되는 미지의 신분까지.
하나하나씩만 따져도 마법학부가 들썩거릴 만한 역량이 연속으로 드러나고 있으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다.
“루이즈.”
루인은 그런 생도들의 호들갑을 무시하며 루이즈를 불렀다.
<응, 왜? 아니…… 무슨 일이예요?>
처음엔 루인을 편하게 대하더니 점점 더 존댓말의 횟수가 잦아지는 루이즈.
“정신 방벽의 완성은 술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루이즈.”
루이즈는 속내를 들킨 사람처럼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두 눈에 두려운 빛을 머금었다.
<……저번에 루인 님이 보여 주셨던 ‘변형 슬립 마법’과 방금 그 헤이로도스의 술식을 한 번 섞어 본 것뿐이에요.>
“발상은 나쁘지 않아. 스스로 기면 상태가 되어 방어할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그런 가수면 상태를 과연 정신 방벽이라 말할 수 있을까?”
<아…….>
“정신 침범이든 기면 상태든 적의 공격에 취약해지는 건 똑같다. 그런 건 대안이 아니지.”
<그럼 절 어떻게 보호할 수 있죠?>
루인이 웃었다.
“멘탈리티는 언제나 깨달음이 관건이지. 정신을 마법으로 해석하려 들지 마. 오히려 조급하게 굴수록 더욱 복잡해지는 게 정신의 문제다.”
모두가 루이즈를 멍하니 쳐다본다.
스스로에게 슬립 마법을 걸어 기면 상태를 유도하고.
그런 가수면 상태로 정신 방벽과 비슷한 효과를 누리려는 루이즈의 발상이 놀랍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그 말은 루인의 변형 슬립 마법과 헤이로도스의 술식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는 뜻.
무엇보다 이런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의 집념이란…….
물론 그런 루이즈의 상태를 정확히 캐치하고서 곧바로 조언을 해 주는 루인 역시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 짧은 순간에도 발전하고 있는 루이즈를 바라보며 시론은 그저 루인을 향한 감탄만 늘어놓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다프네 역시 비슷한 기분을 느낀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스스로에게 이런 한심한 기분을 느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마법사에게 있어 자학이란 자만보다 더욱 부정적인 감정선.
오히려 자학보다는 약간은 스스로에게 도취되어 있는 편이 상위의 경지에 오를 확률이 더 높다.
그 점을 잘 아는 루인이 다프네의 감정을 경계했다.
“날 기준으로 삼는 건 멍청한 짓이다. 마도가 길(道)이라 불리는 것은 각자 걸어갈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야.”
루인이 모두를 향해 말했다.
“내 방식을 관찰하는 건 굳이 막진 않겠다. 하지만 너희들은 이미 각자 다른 길, 다른 마도에 올라선 사람들이다. 내 길을 따라 걸어서 얻을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어느덧 따뜻한 눈빛이 되어 생도들을 하나하나 훑는 루인.
“다프네.”
“네?”
“내가 너라면 이미지보단 마력의 총량을 늘리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
“마력의 총량? 왜죠?”
루인이 시선으로 그녀의 머리를 가리켰다.
“넌 내가 본 마법사 중에 암기력과 술식 구현력이 가장 뛰어나다. 특히 네 메모라이징은 솔직히 조금 충격적이기까지 했지.”
다프네와의 대결은 이 어린 다프네가 어떻게 입탑에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경험이었다.
메모라이징 마법은 수련으로 성취가 높아지는 계열이 아니었다.
순수한 두뇌의 암기력과 연산력, 예민한 감각을 통한 술식 구현력 등.
타고난 재능에 따라 마법의 역량이 달라지는, 말 그대로 천재만 가능한 마법이 바로 메모라이징인 것이다.
한두 마법 정도를 메모라이징 해 두는 것쯤은 시간만 주어진다면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내에 중급 마법 대여섯 개를 동시에 구현해 낸다는 건 일반적인 재능으로는 결코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나 정도 수준의 마력을 지녔다면 과연 넌 메모라이징 마법을 몇 개나 펼칠 수 있지?”
루인의 질문에 다프네가 무겁게 입을 닫는다.
최소 10만 리퀴르.
지금의 자신에겐 그야말로 무한하게 느껴지는 마력의 총량.
그런 아득한 마력을 품는다는 건 상상도 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두뇌는 끊임없이 연산되고 있었다.
“해 보진 않았지만 최소 열 개 정도는 가능할 거 같아요.”
“겸손하군.”
웃고 있는 루인을 향해 다프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그 정도는 이미지조차 해 보지 않았거든요? 정신 붕괴의 우려도 있고, 게다가 마력 폭주의 가능성까지 있으니까…….”
“그런 위험한 가정 다 빼고. 네 암기력과 연산력, 술식 구성력만을 가늠한 후 객관적으로 가능한 수치를 말해.”
다시 입을 다문 채 한참 동안 고심하던 다프네가 놀라운 숫자를 입에 담았다.
“스무 개 정도? 어쩌면 그 이상?”
시론이 떠억 하고 입을 벌렸다.
“아니 그게 가능해?”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요? 술식의 기전을 떠올리고, 회로로 그리고, 배치하고, 기억한 후 차례대로 심상에 욱여넣기만 하면 되는 반복인데.”
“뭐……?”
웬만한 마법 세 개 정도만 메모라이징을 해두어도 빈혈이 일어나며 정신 교란의 전조를 겪게 되는 것이 일반적.
시론은 어이가 없었다.
“……재수 없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아마 맞을 거야.”
맞장구를 치는 세베론을 향해 다프네가 곱게 눈을 흘겼다.
“지급 입탑 마법사를 무시하는 거예요?”
루인의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20개 이상의 메모라이징이 가능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직도 모르겠나?”
뒤편에서 들려오는 리리아의 무심한 목소리.
“대기사전이든 대마법전이든 최소 10분 정도는 무적이라는 뜻이군.”
고개를 끄덕이는 루인.
“무엇이든 가능한 시간이지.”
“아…….”
다프네가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미간을 찡그리며 심상에서 깨어났다.
“마력의 총량을 늘리라는 건 결국 서클을 추가하라는 뜻이잖아요?”
고위계에 도달하고 싶은 건 모든 마법사들의 한결같은 숙원.
그러므로 마력을 늘리라는 건 그저 수련을 더 열심히 하라는 독려에 지나지 않았다.
그게 그 말이란 뜻.
“아니. 마력의 총량은 경지에 비례하지 않는다. 명확히 구분되지.”
“그게 무슨……? 아…….”
그제야 다프네는 루인이 4위계의 마법사라는 것을 상기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지혜와 상식으로 해석할 수 없는 문제였다.
헤데이안 학부장은 분명 루인을 마도사로 지칭했다.
4위계의 ‘마도사’라니.
어떤 마법사라도 배를 잡고 웃을 일이다.
“마력만 따로 늘리는 수련 방법이 존재할 수 있나요?”
그 순간 루인이 다시 웃었다.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낀 다프네.
“있지. 누구라도 효과를 볼 수밖에 없는, 완벽하게 검증된 수련법이.”
동시에 생도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 마력만 높이는 방법?”
“그게 가능해?”
“그런 방법이 실재한다고요?”
루인이 간단하다는 투로 대답한다.
“서클(Circle)의 재구축 수련이다.”
“……네?”
다프네는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서클의 재구축?
“설마…… 그 방법이란 게…….”
“이해한 그대로다. 마나 서클을 강제로 모두 붕괴시킨 후, 새로 고리를 맺는 반복 수련을 말한다.”
이것은 전생의 동료였던 광휘의 마법사 헤스론의 일명 ‘재구축 수련법.’
오랜 세월 끝에 초인의 경지를 이룩했던 그만의 마도였다.
세베론이 경악성을 내질렀다.
“아, 아니! 그건 너무 위험하고 무모하잖아! 겨우 이룩한 고리들을 붕괴시키다니! 그랬다가 다시 고리를 구축하지 못하면? 그걸로 마법사의 인생은 끝이라고!”
루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이상 결심하기 힘든 수련법이지.”
호기심을 참지 못한 리리아도 한마디 거들었다.
“고리의 재구축으로 일궈 낼 수 있는 게 마력의 상승 단 하나뿐인가?”
“아니. 마력의 상승은 ‘재구축 수련법’의 부차적인 수확에 불과하다.”
“그럼? 다른 어떤 것을?”
“오솔길을 이미지해라. 그리고 넌 그 길을 매일매일 다르게 걷는다. 어느 날은 살랑거리는 들판의 향기를 맡고, 어느 날은 불쾌한 이슬을 맞으며 걷겠지. 어제는 조급한 느낌으로, 오늘은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리리아는 어느새 눈을 감고 있었다.
“같은 길을 다시 돌아가 보는 것. 그리고 그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
“…….”
“전에 느껴 보지 못한 전부를 얻을 수 있다, 리리아.”
리리아를 바라보던 루인의 두 눈이 번뜩였다.
“한 사람의 마도(魔道)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 훨씬 긍정적으로.”
그 순간.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자리에 앉은 리리아.
곧 그녀의 전신에서 밀도 높은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점점 옅어지는 마력의 잔향.
다프네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뭐, 뭐 하는 짓이에요! 설마……?”
한참 후.
리리아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마력은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