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유적 동굴 내부를 이리저리 살피던 헤데이안 학부장은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고 있었다.
목소리의 유적이 이곳 에어라인이 아닌 지상에 있었을 때.
대규모 공간 이동 마법진을 위해 마도학자들이 셋이나 희생되었다.
그들은 정신이 붕괴되어 의식을 잃는 와중에서도 끝까지 좌표계를 놓지 않았다.
그들이 없었다면 이 유적 동굴은 에어라인에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숭고한 희생을 향한 헤데이안의 짧은 묵념.
잠시 과거 속에서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던 그가 루인을 쳐다봤다.
“…….”
할 말은 많았지만 대체 무슨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까.
사람의 성향은 일관되기 마련인데 저 루인이란 생도 녀석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세상의 모든 비밀을 등에 이고 있는 양 비밀스럽게 굴더니, 에어라인에 올라오자마자 상위 랭커의 이명 생도와 공개적인 결투를 벌였다.
무려 6위의 랭커 기사 생도를 쓰러뜨린 것이다.
그것도 헤이로도스의 마법적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당연히 에어라인 아카데미는 발칵 뒤집혀 버렸다.
그리고 그 반향은 기사학부보다 마법학부 쪽이 오히려 더 심했다.
전설적인 헤이로도스의 마도를 구현한 무등위 마법 생도.
마법학부의 교수들, 마탑의 초고위 마법사들, 게다가 마도명가의 원로들까지 모두 에어라인으로 모이고 있다.
특히 다가오는 마법학회의 개최를 주도하고 있는 어브렐가의 가주 레펜하이머.
그는 그런 마법학회를 포기하면서까지 에어라인의 입천(入天)을 통보해 왔다.
마법학회를 주관하는 마도가문의 최고 영예를 포기한 것이다.
대체 이 녀석의 정체가 무엇일까?
하지만 그런 수많은 의문을 뒤로하고 헤데이안이 내민 것은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 바구니였다.
“나눠들 먹게.”
“우왓! 감사합니다!”
“학부장님 최고세요!”
세베론과 슈리에가 꾸벅 인사를 하며 빵 바구니를 낚아챘다.
지상의 아카데미에선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빵이었지만 이곳 에어라인에서는 귀하디귀한 먹거리였다.
“맛있다!”
“흐!”
헤데이안 학부장이 사이좋게 입에 빵을 욱여넣고 있는 생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다시 루인을 응시한다.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겠나?”
“그러시죠.”
루인이 헤데이안 학부장에게 푹신한 방석을 내주었다.
루인과 마주 앉은 헤데이안은 금방 두 눈에 열기를 드러냈다.
“실력을 모두 드러냈다고 들었네.”
마치 자신만 알고 있던 소중한 비밀이 몽땅 세상에 드러난 기분.
하지만 자신이 결코 상상해 보지 못했던 루인의 비밀이 하나 더 존재했다.
“대체 그 무투술은 또 무엇인가?”
루인이 처음으로 드러낸 실력은 마법이 아니라 무투술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수준이 아니라 크림슨 오오라를 발휘한 강철의 하이랜더 올칸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고위 무투술.
“크게 의미를 따질 필요가 있습니까? 기사를 상대하는 저만의 해법입니다. 마법사의 마도가 굳이 마법에만 한정될 필요는 없죠.”
분명 일리는 있다.
그러나 한정된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인 이상 효율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일.
마도(魔道)가 이것저것 함께 익힐 만큼 만만했다면 모든 마법사가 워메이지를 꿈꿨을 것이다.
“자네의 마도는 전장(戰場)의 마도인가?”
“그렇습니다.”
일체의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루인.
“헤이로도스의 마법을 익힌 것도 그 때문이고?”
“자기 객관화입니다. 연산력, 보유 마력, 마력의 성질, 염동력의 수준 등. 제 종합적인 역량에 가장 적합한 마법이라 판단했습니다.”
“…….”
루인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헤데이안은 무슨 기계를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냉철한 판단력도 어느 정도껏이지 이건 무슨 숫제 괴물 같지 않은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헤데이안은 가장 궁금했던 의문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에어라인에서 드러낸 자네의 역량은 어설픈 수준이 아닌 진짜 헤이로도스의 마법이었네.”
“완성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루인의 대답에 한 차례 허탈하게 웃던 헤데이안이 흰 수염을 파르르 떨 만큼 동요했다.
화르르르르-
헤데이안의 오른손 위로 시푸른 화염구가 타오른다.
소스라칠 정도로 강력한 마력이 느껴지는 푸른 청염(靑炎).
헤이로도스를 대표하는 마법, 구유의 불이었다.
츠츠츠츠-
이내 청염에서 뇌전이 일렁거린다.
구유의 불을 라이트닝 쇼크로 술식 변환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일 뿐.
헤데이안이 펼친 구유의 불은 희미한 열상만을 남긴 채 힘없이 사그라졌다.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구유의 불을 일으킨 헤데이안.
화르르르르-
이번에 그가 시도한 것은 분열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천천히 두 개로 변하던 청염이 희미한 열상만을 남긴 채 산화되어 버렸다.
헤데이안이 담담한 눈으로 루인을 응시했다.
“나는 이 나라의 현자(賢者)일세.”
물론 헤데이안 학부장은 왕실의 권위로 인정받은 진정한 의미의 현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현자 에기오스에 준하는 실력을 지닌 마법사.
르마델 왕국에서 그의 위상은 분명한 현자급이라 할 수 있었다.
“마법학회의 에이션트 등위 ‘지혜의 등불’을 인증받은 마법사는 이 나라에서 이 헤데이안이 유일하네. 그건 에기오스도 쟁취하지 못한 거지.”
고고한 자부심.
“수명만 허락한다면 반드시 ‘마도사’의 위상에 닿을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네.”
루인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순간 강렬한 빛을 머금는 헤데이안의 두 눈.
“자네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적어도 이 왕국에서만큼은 최고의 마법사란 뜻이네.”
루인은 피식 웃고 말았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왕국 최고 실력의 마법사도 발휘하지 못하는 헤이로도스의 마법이 어떻게 너에게는 가능하냐고 묻고 있는 거였다.
그 간단한 질문을 왜 이렇게 빙빙 돌려서 얘기하는 걸까?
“……내게 가르쳐 줄 수 있겠는가?”
그 순간.
모든 생도들이 빵을 먹다 말고 벙쪄 버렸다.
푸웁- 하며 빵을 튀기던 시론이 멍하니 학부장을 바라봤다.
공손히 두 손을 모은 채 한없는 가르침을 열망하고 있는 헤데이안 학부장.
마치 스승을 앞에 둔 제자처럼 경건한 그의 표정에 시론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가르친다고 해서 쉽게 되는 게 아닙니다.”
“아, 아니 그래도……!”
“게다가 학부장님은 이미 자신만의 마도가 너무 완고하게 자리 잡혀 있습니다. 그렇다는 건 더욱 힘들단 뜻이죠.”
헤데이안은 지혜의 라이브러리에서 루인과 논쟁했던 때가 떠올랐다.
증명을 통한 확증(確證)으로 우열을 가늠하는 것이 마법이라는 학문의 정체성이라면 분명 당시의 승자는 루인이었다.
“그럼 몇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는가?”
루인이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후, 말씀하시죠.”
침을 꿀꺽 삼키는 헤데이안.
“초과 왜곡을 가능케 하는 연산 좌표계를 어떻게 구현해 낸 것인가?”
헤이로도스는 술식의 불변성을 깨는 방법으로 초과 왜곡을 말하고 있었다.
한데 마력을 수놓는 정통의 방법론, 즉 연산 좌표계는 반드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재능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인간의 두뇌가 지닌 연산력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루인의 입에서 놀라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특별한 연산 좌표계는 없습니다.”
“……뭐?”
당황하는 헤데이안 학부장.
좌표계를 지정하지 않는 마법이 존재할 수가 있단 말인가?
“초과 왜곡을 가능하게 하는 건 술식의 가변성을 이해하는 고유한 감각입니다. 연산력은 부차적인 것이죠.”
“가변성……?”
“설사 초월적인 연산력으로 모든 좌표 지정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건 헤이로도스의 마법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학부장님께서 하고 계신 것처럼요.”
충격으로 굳어져 있던 헤데이안이 곧장 의문을 드러냈다.
“그럼 자네의 그 수많은 마력 칼날들이 모두 좌표 지정 없이 구현된 형태란 말인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루인.
“수천 개의 마력 칼날들을 일일이 좌표로 지정하는 게 인간의 연산력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게다가 통제하려면 그 많은 좌표들을 끊임없이 이동해야만 하는데요? 그래선 찰나도 버티지 못하고 정신 붕괴가 일어날 겁니다.”
“허면…….”
“하나의 술식이 절대적이고 독립적이라는 마도의 관념부터 무너뜨려야 합니다.”
곧장 염동을 맺는 루인.
그러자 꿈틀거리며 파동하는 하나의 선이 마력으로 그려졌다.
푸르게 빛나며 파동하는 미세한 마력선.
헤데이안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런 마력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마력 파동에 속도의 속성을 부여하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측지선(測地線)?”
마법사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대답하는 정상적인 방법론.
하지만 헤이로도스식 마법, 즉 대마신 므드라의 관념은 전혀 다른 해석을 늘어놓았다.
“측지선이라는 건 결국 위치의 변화율입니다. 위치의 변화율이 짧을수록 최단 거리, 즉 속도가 부여되는 것은 맞습니다.”
루인이 떨친 마력선이 놀라운 속도로 허공을 움직이더니 이내 몇 개의 마력선으로 분화되었다.
“이것이 학부장님께서 이해하고 있는 술식 변환입니다. 하지만 이건 그냥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좌표일 뿐이죠.”
그것은 그저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는 마력선의 잔상이었다.
일종의 분신술처럼, 그저 사람의 착시 현상일 뿐인 것이다.
“실체적인 분열이 아닙니다. 즉 헤이로도스의 마법이 말하고 있는 진정한 술식 변환이 아니란 뜻입니다.”
“허면……?”
스스스-
다시 마력선이 하나로 합쳐진다.
잔잔하게 물결치고 있는 루인의 마력선은 잠시 동안 어떤 변화도 없다가 마치 새끼를 치듯이 두 개로 갈라졌다.
동그랗게 떠진 헤데이안의 두 눈.
“첫 번째 전제는 마력입니다. 투입되는 힘이 두 배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마력…….”
“두 번째는 인식계(認識界)와 심상계(心想界)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염동력입니다.”
“뭐……?”
인식계와 심상계의 경계를 허무는 것.
무슨 간단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지만 그건 마도를 꿈꾸는 모든 마법사들의 숙원이었다.
마법사들이 끝없는 이미지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심상에서 떠올린 무수한 가상의 마법을 하나라도 현실에 구현해 내려는 처절한 몸부림인 것이다.
그러므로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린다는 건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는 의미.
“허면 자네의 분열한 저 마력선이 좌표계를 이동한 술식이 아니라…….”
“염동력으로 그저 마력선의 고유 파동을 복제한 겁니다.”
“…….”
멍하게 굳어지는 헤데이안.
이건 마치 헛된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수준이다.
염동력으로 술식의 고유 파동을 나눈다고?
거기에 무슨 마도의 법칙과 이론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정신의 영역이다.
마치 드래곤의 용언 마법과 같은 그런 터무니없는 정신 계열의 마법.
과연 그래서 루인은 이 무식한 술식 변환을 ‘고유의 감각’이라고 했단 말인가.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염동력을 극한으로 구동하면 마력의 고유 파동 몇 개쯤은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염동력은 정신으로 구현해 내는 힘이기에 굳이 좌표를 지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
염동 마법이 시전 시간이 짧은 건 바로 그런 점 때문이다.
한데…….
이런 무식한 방법이 술식 변환의 진정한 정체라면 과연 인간에게 허락된 힘이란 말인가?
캐스팅이 필요 없다는 건 이제 이해했다.
그러나 수천 개의 캐스팅에 해당하는 마력은 실질적으로 투입되었다는 뜻.
거기에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무너질 정도의 초월적인 염동력으로 모든 외력 궤도와 고유 파동을 동시에 나눈다?
그 수천 개의 마력 칼날을?
헤데이안 학부장이 벌떡 일어나며 세차게 고개를 도리질했다.
이런 게 마법(魔法)이라고?
“이건 말도 안 된다!”
그 순간.
츠츠츠츠츠츠-
동굴 내부를 가득 채워 가는 마력선들.
수천 개의 마력선을 허공에 늘어뜨린 채 루인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