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98화 (98/187)

<98화>

유적 동굴.

숙소나 휴식 공간으로서는 불친절한 공간이지만 수련 장소로 생각하면 말이 달랐다.

소음과 빛 등 마법사의 심상을 어지럽게 하는 거의 모든 방해 요소들이 차단된 장소인 것이다.

축축한 이끼 냄새가 다소 거슬리긴 했지만 그 점만 제외한다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수련 공간.

그래서 루인은 유적 동굴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아카데미의 상점에 들러 마력 등불, 푹신한 방석, 간이 책상, 간식, 물 등을 구매해 온 루인.

유적 동굴로 돌아온 그가 적당한 공간을 물색하고 있을 때 쟈이로벨의 영언이 들려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군.

유적 동굴의 벽면에 마력 등불을 설치하던 루인이 입을 열었다.

“또 뭐가?”

-이곳을 만든 마도사 슈레이터란 놈은 아무래도 인간이 아닌 것 같다.

“음…….”

사실 그건 루인도 의심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루이즈의 일로 루인은 유적 동굴을 더욱 자세하게 살폈다.

놀랍게도 이 동굴은 거대한 결계처럼 작동하고 있는 일종의 아티펙트였다.

그러나 아티펙트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핵(核)이 존재하지 않았다.

결계가 유지되기 위해선 마력을 공급하는 핵이 필수불가결.

거대한 에어라인이 공중에 부유하기 위해서 마정석(魔精石)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였다.

하나 아무리 동굴을 살펴봐도 핵에서 공급되는 마력의 길, 즉 핵의 증폭 회로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유적 동굴은 슈레이터의 잔존 마력과 의지를 천 년 이상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전성기의 루인조차도 불가능한 일.

마법사의 마력이야 워낙 특이한 성질을 지닌 경우가 많으니 잔존 마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남아 있는 의지 즉 사념은 말이 달랐다.

사념을 남겼다는 것.

그렇다면 마도사 슈레이터가 초월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역사 속 그의 위상이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그건 대마도사라고 불렸던 흑암의 공포를 압도하는 수준.

마신 쟈이로벨의 강림체(降臨體)를 아이처럼 다루던 초대 사자왕 사홀의 경지였다.

“왜 인간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거지? 헤이로도스처럼 내적인 성향의 마법사일 수도 있지 않나? 진정한 실력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은 채 연구 성과에만 집착하는 마도사 말이다.”

-인간의 연구 성과라고 보기엔 너무 뛰어난 업적이다. 그 루이즈라는 아이의 성장이 매우 비정상적이지 않느냐. 마계에서도 그런 급격한 성장은 가능하지가 않다.

“음…….”

-평생 동안 쌓아 올린 지혜와 마력을 술식 새기듯이 타인에게 주입하는 것이 가능하다? 억겁 동안 진화해 온 마계는 왜 그런 방식을 고안해 내지 못했지? 그런 방법이 존재했다면 당장 나만 해도 후계자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벌써 내 일부를 자손에게 전했겠지.

쟈이로벨과 논쟁하고 있었지만 루인이 가장 궁금했던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한 마법사의 마도를 그런 식으로 전승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 세계에 굳이 마탑이나 마법학회가 필요하지 않을 터.

-그러고 보면 이 왕국 자체가 너무 특이해. 두 고룡(古龍), 베스키아와 비셰리스마가 한낱 인간 왕국의 탄생에 개입한 것도 그렇고…….

-건국왕 소 로오와 초대 사자왕 사홀은 인간의 역사에서 몇 번 탄생하지도 않은 초월자들이다. 거기에 신들의 자식이라 불리는 타이탄족의 맥(脈)을 잇고 있는 렌시아가? 이런 터무니없는 전승 능력을 지닌 초대 마도사? 넌 이게 정말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느냐?

“거기에 나도 존재하지.”

-…….

어쩌면 마신의 능력을 전승한 흑암의 공포야말로 이 왕국의 가장 괴이한 이변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게 우연이라고 해도, 그 정도 역량의 역사로 출발한 왕국이 북부 왕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겨우 생존이나 도모하고 있을 정도로 쪼그라든 점이 가장 괴이하다. 도저히 납득이 안 될 정도다.

“결론이 뭐냐?”

-이미 네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느냐?

루인의 두 눈에 어두운 기운이 서렸다.

“너 역시 내가 경험했던 미래의 멸망과 이 르마델 왕국 사이에 모종의 관련이 있다고 보는 건가?”

-감이지만 그렇다. 나는 그 악제(惡帝) 놈이 지금 이 르마델 왕국에 있다고 확신한다. 놈의 계획은 아마도 이 왕국에서부터 출발했을 것이다.

“…….”

두 고룡의 개입과 실종.

두 초월자의 탄생과 그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타이탄족과 마신 쟈이로벨.

이번엔 추측이 불가능한 마법을 남긴 마도사 슈레이터까지.

하나하나씩 따져 본다고 해도 인류의 역사에 출현해 온 사건들 중 수위를 다툴 만한 사건이었다.

지금까지 루인은 이 사건들을 관통하는 귀납(歸納)을 도저히 확신할 수 없었는데, 그중 하나의 가정을 쟈이로벨이 주장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역시 렌시아가(家)인가.”

-네 기억 속의 유일한 구멍이지 않느냐. 너는 이 왕국의 전반적인 상황과 역사를 모두 기억하면서도 유일하게 렌시아가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다. 네 전생에서 통제되고 있던 정보라는 뜻이지. 그건 집단적인 의도가 개입한 결과다.

“고작 한 가문이 필요 이상의 권력과 자원을 독점하려 들고 있다. 이 왕국의 모든 뛰어난 역량을 죄다 빨아들이고 있어.”

-그 정도가 아니다. 만약 이 왕국이 지닌 역량을 고의로 자극한 것이라면? 모두 불태워 재만 남긴 거라면?

“…….”

-거봐라. 이미 네놈의 마음속에도 확신이 있지 않느냐.

루인의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전생.

마신의 흑마법을 완성했던 자신의 삶이 누군가의 의도였다면?

악제의 군단장들조차 두려워했던 루이즈의 힘이 미리 안배된 결과라면?

바람의 대행자, 그리고 검성과 성녀의 역량이 모두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연출된 힘이라면?

그것은 세계에 흩어져 있던 모든 인간 역량의 결집 ‘인류 연합’이 처음부터 잘못된 길이라는 뜻이었다.

요리하기 딱 좋은.

일망타진을 위한 누군가의 의도로 탄생된 결집.

동료들의 처절했던 인생이 모두 악제의 의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정신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짓이겨졌다.

인간 연합의 역량을 더 완벽히 구축하려는 자신의 의도가 또다시 악제의 손에 놀아나는 행동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동료들을 규합하려는 네 계획은 수정이 불가피하다. 전생과 똑같은 방식으로는 절대로 그 악제란 놈을 상대할 수 없을 거다.

분노는 잠시.

지금까지의 삶을 통틀어 가장 깊고 냉철한 감각이 루인의 뇌리를 감쌌다.

의식을 호수처럼 깊게 드리웠다.

‘…….’

지난 생, 그리고 지금까지 내내 자신을 괴롭혀 온 의문.

놈은 왜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것인가?

놈에겐 인간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당위(當爲)의 감정이 없었다.

인간이 무언갈 추구한다면 분명한 의도와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놈에겐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런 목적도 없는, 그저 맹목적인 악의(惡意).

루인은 그런 악제의 희미한 의도를 끈질기게 추적했다.

뻗어 나갈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대마도사의 직관으로 그려 낸다.

그때.

“렌시아가의 직계 일족은 타이탄족…….”

인간을 향한 악의의 당위(當爲)를 무한히 추적하던 루인이 마침내 하나의 가정을 도출해 냈다.

타이탄족의 후예.

그들의 증오가 향하는 곳.

-테아마라스……?

신의 자손인 타이탄족을 세계에서 유리(遊離)한 자.

그 참혹한 절멸의 역사라면 충분한 당위가 있었다.

-일리 있는 말이다.

“네 말대로 이 르마델 왕국에 악제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면 그곳은 렌시아가일 것이다.”

-흐음…….

루인과는 반대로 쟈이로벨은 좀처럼 확신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들은 신족(神族).

자체적인 힘만으로도 인간들을 압도하는 역량을 지닌 고위 존재들이었다.

렌시아가가 타이탄족을 계승하고 있다면 굳이 인간의 권력과 역량을 탐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

그러나 쟈이로벨은 하나만은 확신했다.

르마델 왕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가사의한 일들은 분명 그들과 관계되어 있었다.

“……성체 타이탄족은 얼마나 강하지?”

루인은 타이탄족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계획의 방향을 결정하려면 그들의 능력을 구체적으로 알아야 했다.

-단순하게 말할 수 없다.

“왜지?”

-너희들 인간만 해도 너 같은 절대자가 있는 반면 사슴 한 마리 제 손으로 잡지 못하는 유약한 이도 있지 않느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루인이 질문을 달리했다.

“인간과 확연하게 차이 나는 타이탄족의 특성은 뭐가 있지?”

한참 동안 침묵하던 쟈이로벨.

-감정, 그리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감정이 희미하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무생물처럼 느껴질 것이다.

“무생물이라…….”

-또한 그들은 ‘존재’들을 부정한다. 아니, 자신들을 유일한 신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군.

루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신들의 후손이 창조자를 부정하다니.

-그들의 눈에 비친 타 종족이란 뭐랄까.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동식물, 바위, 물과 같은 자연이다. 자신들이 누릴 일부라 생각하는 거지. 한때 그들은 인간을 주식(主食)으로 삼기도 했다.

“사람을 먹었다고……?”

간혹 인간을 습격한 몬스터들이 식인을 하는 경우는 있었다.

그러나 주식으로 삼았다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

타이탄족과 같은 지성을 지닌 문명이 같은 지성 문명인 인간을 농작물 취급해 왔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런 엄청난 일이 있었다면 역사로 남아 있어야 하는데 자신이 아는 한 그런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이상하다고 했던 거다. 그들이 바라보는 인간의 세계란 개미집처럼 하찮은 것이다. 너라면 개미의 먹이가 탐이 나겠느냐?

모든 정황은 렌시아가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정작 그들의 당위가 또다시 희미해지고 있었다.

아직 자신이 파악하지 못한 무언가가 분명 존재할 것이다.

-초월자들을 암살하고 고룡 둘을 해치운 놈들이다. 무력의 역량을 기준 삼고 싶다면 이미 확연한 기준점이 있지 않느냐.

사홀 하나만으로도 전생에 이룩했던 자신의 경지를 능가하는 마당.

아직 초인을 상대할 역량도 갖추지 못한 마당에 정말로 그 정도가 렌시아가가 숨기고 있는 힘이라면 너무나 아득했다.

-네놈의 친구들이 오고 있군.

저벅저벅.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오자 루인의 상념은 그렇게 끝이 났다.

기다랗게 줄을 선 채로 동굴로 들어오고 있는 생도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어느덧 도착한 시론이 벽면에 설치된 마력 등불을 보고 활짝 웃었다.

“오오! 마력 등불!”

“와! 책상이네요!”

루인이 사 온 물건들을 확인하던 생도들이 하나둘 조심스럽게 루인에게 다가간다.

“저어…… 루인 님? 부탁이 있는데…….”

평소와 다른 다프네의 코맹맹이 소리에 세베론의 미간이 구겨졌다.

“설마 지금 그거 애교?”

“어허, 쉿.”

세베론이 질 수 없다는 듯 목청을 돋우었다.

“루인! 돈 좀 빌려줘!”

<저도 빌려주세요 돈.>

생도들에게 에어라인 아카데미의 현실을 모두 전해 들은 루인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좋다. 너희들이 필요한 돈을 모두 주지.”

“와아! 정말요?”

“커흑! 역시 루인! 너밖에 없다!”

씨익.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네? 무슨?”

“조건?”

생도들의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을 마주 바라보며 루인이 말했다.

“렌시아가의 후원을 받는 이명 생도들의 활동 정보를 내게 주기적으로 보고해라. 사소한 것 하나까지 전부 다.”

잠깐.

이건 사실상 사설탐정 일을 의뢰하는 것 같은데.

“어, 그건…… 일이잖아요?”

“그러면 아카데미 밖으로 일을 나가는 것과 그다지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무표정한 루인.

“훈련 시간을 빼서 정보를 모으라는 얘기가 아니야. 그냥 식당, 기숙사, 수업 등 평소대로 활동하다가 접할 수 있는 그런 정보들 말이다.”

생각해 보니 그 정도면 별 무리가 없었다.

당연히 생도들은 모두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정도라면 문제없지!”

“저도요!”

그렇게 루인이 헬라게아를 소환해 돈을 나눠 주고 있을 때.

“꽤 오랜만이군. 이 유적은.”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온 곳.

헤데이안 학부장이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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