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아침의 가라앉은 공기, 게다가 워낙에 조용했던 탓인지 훈련장에 모인 생도들은 대부분 다프네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마탑(魔塔).
아무리 르마델 왕국이 기사의 국가라고 해도 마탑의 위상까지 무시할 순 없었다.
마탑은 국가가 지닌 전력의 핵심.
역사를 공부해 온 생도라면 그런 마탑의 역량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좌우된 예를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는 현자는 어떤 국가에서도 핸드급의 위상과 지위를 누렸다.
국가 행정의 최고 권력, 핸드(Hand).
국가의 무력을 상징하는 기수(旗手).
지성과 과학을 이끄는 현자(賢者).
국왕을 제외한다면 이 세 명의 신하야말로 르마델의 최고 정점에 있는 인물들인 것이다.
한데 그런 현자의 수제자라니.
다프네의 정체를 알아본 마법 생도들 몇몇이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저 소녀가 다프네라고?”
“나, 나도 소문은 들었어! 마탑 역사상 최연소의 입탑 마법사!”
“너무 예쁘다……!”
남생도들은 아침 햇살보다 더 눈부신 다프네의 미모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래 봤자 생도복을 입으면 다 똑같다고 여겨 왔던 여생도들도 부러움과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놀라움은 ‘뇌전의 기사’ 브훌렌도 마찬가지여서, 내내 아무런 감정도 없던 그의 눈빛이 흔들릴 정도였다.
“정말 현자 에기오스 님의 수제자인가?”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던 시론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고아하게 예를 갖췄다.
“이 시론 마엔티 메데니아가 선배님께 처음으로 인사 올립니다.”
“……메데니아가(家)?”
메데니아가는 현자 에기오스의 가문.
그렇다는 건…….
“전 그분의 별 볼 일 없는 손자입니다.”
현자 에기오스의 손자가 별 볼 일 없는 존재라면 여기 생도들 중 구 할은 다 혀를 깨물고 죽어야 한다.
황당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브훌렌을 향해 시론이 다시 한번 예를 갖췄다.
“다프네의 신원은 메데니아가의 이름으로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마도명가의 직계가 보증인으로 나섰다는 건 다프네의 신분이 확실하다는 것.
그렇게 브훌렌이 미간을 찡그리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나타났다.
“레예스!”
“어브렐가의 설혼(雪魂)! 레예스다!”
무심하고 차가운 눈동자.
어깨까지 길게 늘어진 은빛 머리칼.
마법학부 최상위권의 이명 랭커이자 마도명가 어브렐가의 권위를 이은 후계자.
동시에 그는 리리아의 하나뿐인 오빠이기도 했다.
그 순간.
짜아아아악!
서슴없이 리리아의 뺨을 후려갈긴 레예스.
곧 그의 입에서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분명 조심해야 할 등급 생도들의 명단을 넘겼을 텐데.”
“…….”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리리아.
볼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지만 리리아는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차갑게 리리아를 깔아 보던 레예스의 두 눈에 동요가 번졌다.
그녀의 가슴께에 매달린 입술 모양의 브로치.
차마 견디기 힘들었는지 레예스가 홱 하니 고개를 돌렸다.
“가면 갈수록 천한 어미와 닮아 가는군. 아버지께서 그만큼 신경을 써 주시는데도 언제까지 본가의 굴욕으로 남을 것이냐.”
“…….”
레예스가 브훌렌에게 다가갔다.
“브훌렌. 불행하게도 이 무등위 마법 생도는 본가의 직계다. 내가 다스릴 것이니…….”
“이미 알아들었다. 레예스.”
“고맙다.”
브훌렌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목소리 생도들을 다시 찬찬히 훑어보는 브훌렌.
르마델의 양대 마도명가인 메데니아가와 어브렐가의 직계, 거기에 현자 에기오스의 수제자라니.
보나 마나 나머지 녀석들의 신분도 보통이 아닐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무등위 생도가 에어라인에 올라온 건 에어라인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
이런 엄청난 배경을 지닌 놈들이니 무등위 주제에 에어라인의 시민권을 획득한 것이다.
“…….”
역시 언제나 골치 아픈 목소리 그룹이다.
지금까지 목소리 놈들과 엮여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었다.
짜증이 치밀었는지 브훌렌이 홱 하니 돌아섰다.
“난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 거기 황혼. 너희들이 알아서 해.”
쓰러진 올칸의 주위로 모여든 기사 생도들이 죽일 듯이 루인을 노려본다.
그들의 가슴에 매달린 노을빛 브로치를 무심히 바라보는 루인.
곧 레예스가 그런 루인의 시야를 막아섰다.
“넌 뭐지?”
중간쯤에 도착했지만 레예스도 루인의 대기사전을 똑똑히 보았다.
지금까지 배워 온 마법의 관념과 상식이 모두 무너져 내리는 기분을 그 역시 느낀 것이다.
루인의 감정 없는 눈이 레예스의 시선과 얽혔다.
곧 루인의 입에서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세상에 천한 어머니는 없다.”
“뭐?”
각자 다른 부인에게서 난 자식들이 치열하게 갈등으로 엮이는 건 귀족가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
“그리고 나약한 동생들은 언제나 장자의 책임이지.”
“너……!”
극도로 분노한 레예스의 두 눈에 마력이 얽히기 시작하자.
“보았다면 느꼈을 것이다. 나와 상대한다는 건 목숨을 거는 일이라는 것을.”
오싹.
레예스는 자신이 물러난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적인 당황스러움.
그는 자신이 왜 뒷걸음질 쳤는지를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리리아는 내가 본 마법사들 중 가장 드높은 열정을 지닌 마법사다.”
“…….”
“그런 마법사를 가문의 굴욕이라 말하는 네놈이야말로 머저리 장님이지. 그런 주제에 내 마도를 상대하겠다고? 해 봐.”
“네놈! 본가가……!”
금방 말을 삼킨 레예스가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가문의 위세를 실력 앞에 내세우는 건 평소에 자신이 가장 혐오하던 행동.
그런데도 본능적으로 가문을 앞세우다니.
피식.
“이번엔 자기혐오인가? 그래. 그 정도 눈은 있군. 보았으니 두려울 테지. 그 바보 같은 머리도 이미지란 걸 할 테니까.”
레예스는 등줄기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수천 개의 마력 칼날이 모두 각자의 술식으로 구현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더블 캐스팅만으로도 천재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법의 세계에서 그런 터무니없는 구현은 불가능했다.
“너…… 설마 헤이로도스 님의 마법을 익힌 거냐?”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헤이로도스의 ‘술식 변환’.
마력의 확률론적 성질과 초과 왜곡을 주장한 마도사는 역사 이래 그 하나뿐이었다.
“맞아요.”
“뭐?”
다프네가 화사하게 웃으며 레예스를 응시했다.
“선배님의 예측대로 그는 헤이로도스 님의 마법을 잇고 있어요.”
“그, 그 무슨…….”
최근 수백 년 동안 어떤 마법사도 헤이로도스의 마법을 구현해 내지 못했다.
각국의 마탑이 분기마다 학회에 보고하는 연구 사례들.
그건 모두 헤이로도스의 마법을 구현하기 위한 몸부림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재의 주류 마도학계가 열과 성을 다하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핵심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
이름 높은 현자들도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 그런 헤이로도스의 마법을 무등위 생도가 익히고 있다니?
평소라면 말도 안 된다고 소리쳤겠지만 수천 개의 마력 칼날을 직접 보았으니 부정할 수도 없었다.
“정말 사실이냐?”
‘헤이로도스기(紀) 대마법총론’의 위상은 태초의 마법사 테아마라스 님의 마도와 필적하는 것.
사실이라면 왕국이, 마도학계가, 아니 세상이 뒤집어질 일이다.
하지만 루인은 친구들을 독려할 뿐이었다.
“어쨌든 고생했다. 오늘은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고 또 첫날이니 오후 수련은 이미지로 대체하겠다. 식사를 마치고 각자 알아서 동굴에서 수련하도록.”
어느덧 수건을 걸친 채 저 멀리 사라져 가는 루인.
훈련장을 둘러쌌던 생도들이 양 갈래로 썰물처럼 갈라진다.
레예스는 마치 팀원을 다루는 조장처럼 굴었던 루인의 행동에 의문을 표시했다.
“너희들은 저 녀석에게 지도를 받고 있는 건가?”
“네. 한시적이지만요.”
“한시적?”
다프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투대회를 준비하고 있어요. 저희는 루인 님에게 훈련의 전권을 맡겼구요.”
“……무투대회?”
무등위 생도들이 무투대회를?
이 목소리 생도들이 경쟁자라고?
“아, 배고프다. 그만 밥 먹으러 가자.”
배를 쓰다듬고 있는 시론에게 세베론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설마 에어라인이라고 여기까지 돈을 받진 않겠지? 그래도 아카데미인데…….”
“아까 기숙사 게시판에서 급식비 미제출자 명단을 본 것 같은데.”
모두의 고개가 리리아에게 꺾어진다.
“뭐? 그게 정말이냐?”
“그, 급식비?”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리리아.
“급식비뿐만이 아니다. 기숙사와 공동 화장실 사용료, 샤워실 이용료, 그리고 자세히 보진 않았지만 몇 가지가 더 있었다.”
“와, 와 씨! 이건 말이 틀리잖아!”
“뭐야? 에덴티아 선배는 왜 이런 걸 말해 주지 않았지?”
“우리가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 거 같은데.”
분명 입학할 때만 해도 유급만 하지 않는다면 왕립 아카데미답게 모든 제반 시설이 무료라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 이건 사기가 아닌가?
“에어라인의 초창기에는 아카데미의 모든 것이 무료였다.”
생도들의 시선이 다시 레예스에게 모였다.
“네? 그런데 왜죠……?”
“아카데미의 관리직원들, 그리고 소수의 생도들이 외부로 물자를 반출하는 사례가 있었다. 식료품과 물 등 주요 물자들을 시중에 팔아 버린 거지. 제법 큰 사건이었다.”
“아…….”
“아니 미친! 누가 그런 걸 빼돌려!”
다프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물값만 해도 1갤런당 200리랑이 넘죠. 충분히 유혹을 느낄 만해요. 하지만 생도들까지 그런 비리에 참여했다는 건 조금 의외군요.”
생도들은 귀족 출신도 많았고 평민이라고 해도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했다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런 생도들의 명예마저 허물어뜨릴 만큼 에어라인의 물가란 그야말로 살인적인 것이다.
“어쨌든 그 후로 아카데미도 바뀌었다. 수업료를 제외하면 모든 의식주에 돈을 받기 시작한 거지. 물론 외부보다는 조금 싸지만 불법 반출의 위험 부담을 감수할 만큼의 시세는 아니다.”
다프네의 입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흘러나왔다.
“그럼 에어라인의 아카데미 생활을 유지하는 데 평균적으로 얼마나 들죠?”
“한 달에 대략 1천 리랑. 일체의 사교 생활을 하지 않고 극한까지 아낀다고 해도 600리랑 정도는 소모된다.”
세베론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미, 미친! 그럼 금화 열 개?”
“아니 그게 말이 돼요? 생도가 무슨 돈이 있다고!”
1천 리랑.
귀족가의 자제라 해도 부담스러운 한 달 생활비다.
물론 평민이라면 생도 생활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금액이었다.
“그럼 아카데미를 포기하는 생도들이 대부분일 텐데요?”
“아니다. 그 후로 아카데미는 방과 후의 직업 활동을 허가했다.”
“지, 직업 활동?”
“그럼 대부분의 등급 생도들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건가요?”
“아! 그래서…….”
어쩐지 오후만 되면 생도들이 썰물처럼 정문을 빠져나가더라니.
“우, 우린 녀석이 필요하다!”
“쫓아요!”
세베론과 슈리에가 숨도 한 번 안 쉬고 루인이 사라진 방향으로 뛰어갔다.
나머지 목소리 생도들도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털레털레 따라 걷기 시작했다.
“리리아.”
리리아가 오빠의 부름에 무심하게 쳐다봤다.
“조금은 과장된 연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알고는 있겠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리리아.
“오빠가 나서지 않았다면 그 선배는 포기하지 않았을 테니까.”
다시 걸어가는 리리아를 향해 레예스의 음성이 이어졌다.
“셋째 어머니를 그렇게 말한 건 미안하다. 아까 그 녀석에게도 이 오해를…….”
리리아가 차갑게 웃었다.
“뭘 새삼스럽게. 그리고 그 녀석과 별로 친하지 않아. 직접 말해.”
멀어지는 리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레예스는 한참이나 더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