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인간이 펼칠 수 있는 동작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쏟아지는 마력 칼날을 튕겨 내는 거대한 남자의 움직임은 지켜보는 모든 이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카앙! 까앙! 가가각!
검의 궤적이 잔상처럼 번질 때마다 마력 칼날 서너 개가 한꺼번에 사라진다.
인간이 펼칠 수 있는 동작의 임계점이 완벽하게 무시된다.
기괴한 형태로 꺾이는 허리.
온갖 각도로 비틀어지는 관절.
사람인 이상 도저히 펼칠 수 없는 움직임의 연속이 너무나도 쉽게 이어지고 있다.
육중한 동체가 무색했다.
상식을 무시하는 기괴한 동작과 말도 안 되는 체력.
일종의 경이마저 느껴질 정도다.
그만큼 크림슨 오오라의 최종 진화 형태인 적혈강체는 전투 검술의 극한을 가능케 하는 비전이었다.
가가각! 까앙!
쏟아지는 마력 칼날은 이미 절반이 소멸한 상태.
물론 지금까지 상처 없이 모두 막아 낸 것은 아니었다.
역시 문제는 그 수(數).
모든 방위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마력 칼날은 집요하게 올칸의 빈틈을 노렸다.
아무리 적혈강체의 올칸이라지만 그의 검이 미치는 방위에는 한계가 있었다.
촤아악!
“큭!”
쌔애애액!
“커헉!”
크림슨 오오라로 인해 강철처럼 단단해진 올칸의 육체.
하지만 마력 칼날들은 올칸의 살갗을 무참하게 파고들며 그런 명성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상처가 아로새겨질 때마다 조금씩 느려지는 동작.
올칸의 검이 보여 주었던 놀라운 궤적은 그렇게 조금씩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
올칸이 짐승 같은 콧김을 뿜으며 검세를 바꾸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방어하며 반격을 위해 놈의 빈틈을 살폈다면 지금은 모든 힘을 방어에 쏟고 있는 것.
시전 시간이 필요한 마법사의 특성상 마법과 마법 사이에는 반드시 빈틈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즉 이 무식한 마력 칼날들만 모두 막아 내면 놈은 끝장이라는 뜻.
필사적인 궤적으로 방어에만 열중하던 올칸이 상처 입은 짐승처럼 포효했다.
“끝이다 주문쟁이―!”
그렇게 올칸이 마지막 마력 칼날을 튕겨 내며 전방으로 쇄도했을 때.
쌔애애애액!
빠각!
순간적으로 시야가 무너지며 고개가 홱 하고 꺾인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던 올칸의 시야에 처음으로 담긴 것은 저만치 날아가고 있는 자신 누런 이빨들.
뒤늦게 침범한 안면의 고통에 처참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올칸은 홱 하니 고개를 꺾으며 루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뭐 이런 미친 마법사 놈이 다 있지?’
적혈강체의 동체 시력으로도 읽을 수 없는 동작.
그럼 놈이 무슨 8성 이상의 초고위 기사라도 된다는 뜻인가?
아니, 설마 이건…….
“……텔레포트(Teleport)라고?”
마법사의 마력과 염동력은 엄연히 제한적인 자원이다.
더욱이 그런 마력을 술식(術式)으로 제어하려면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고 해도 잠깐의 시전 시간이 필요한 법.
그렇게 엄청난 마력 칼날을 소환했던 마법사가 아무런 딜레이조차 없이 다시 술식을 재배열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헤이스트다.”
“뭐?”
올칸이 루인의 헤이스트를 텔레포트라고 오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헤이스트가 강화시킨 건 평범한 마법사의 육체가 아니라 혈주투계의 루인이었으니까.
그 효율이란 수십, 아니 가히 수백 배.
“넌 참 나쁜 버릇이 있군. 계속 내게 기회를 주는 이유가 뭐지?”
저벅저벅.
그 순간 올칸의 두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츠츠츠츠츠츠-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마법 생도의 등 뒤.
그 무식한 마력 칼날들이 하나둘 다시 재생성되며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전투 중에 왜 자꾸만 입을 여는 거지? 죽고 난 뒤에도 궁금한 게 남아 있을 것 같나?”
그때, 올칸이 벼락처럼 루인을 덮쳐 갔다.
“으아아아아!”
츠캉!
애꿎은 훈련장 바닥에 깊숙이 박혀 버리고 만 중검.
헤이스트의 술식이 스며든 루인의 혈주투계는 더 이상 올칸이 상대할 수 있는 무투술이 아니었다.
헤이스트의 혈주투계를 막아 냈던 기사는 전생에서도 초인을 제외하곤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빗맞고 말았지만 올칸의 두 눈은 오히려 희열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됐다!’
분열을 멈춘 마력 칼날 세 쌍!
역시 놈의 마력은 무한이 아니었다.
수천 개가 아닌 고작 여섯 개 정도라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올칸의 완벽한 착각이었다.
까아앙!
까앙!
올칸의 손발은 수천 개의 마력 칼날을 막아 낼 때보다 오히려 더 어지러워졌다.
마력 칼날들이 마치 의지를 지닌 검처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뭐, 뭐야! 이게!’
첫 번째 놀라움은 마력 칼날과 부딪힐 때마다 느껴지는 말도 안 되는 강도(剛度)였다.
분명 자신의 검격을 견디지 못하고 파편으로 부서져 흩날리던 마력 칼날이었다.
한데 지금은 마력 칼날과 부딪힐 때마다 손목이 부서질 듯 시큰거렸다.
두 번째는 마력 칼날이 마치 기사의 검술처럼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그런 느낌은 마력 칼날과 부딪히자마자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문제는 아무리 끈질기게 살펴봐도 검술의 연원을 알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르마델 왕국의 모든 검술교본, 혹은 어떤 검술명가의 검술에도 존재하지 않은 미지의 검(劒)이었다.
이건 마치 자신과 비슷한 경지의 기사 여섯과 상대하는 기분.
까아아앙!
까아아앙!
루인은 많은 이미지를 통해 헤이로도스의 술식 변환을 제어하는 방법을 다듬었다.
결국, 무리하게 술식 변환의 궁극을 추구하기보단 미약한 지금의 경지로도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게끔 타협한 것이다.
술식 변환으로 분화하는 마력 칼날의 개수를 줄이면 통제할 수 있는 시간과 위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그렇지 않아도 검붉은 올칸의 육체가 무수히 많은 상처들로 인해 더욱 시뻘겋게 변해 버렸다.
어느새 한 개로 줄어들어 거대해진 마력 칼날이 올칸을 무식하게 내려쳤다.
까아아앙!
중검을 잡은 올칸의 양 손아귀가 찢어졌다.
점차 옅어지는 크림슨 오오라의 기운.
까아아앙!
올칸의 무릎이 지면에 닿았다.
그가 비틀거리며 필사적으로 일어나려고 했지만.
까아아앙!
“크으으윽!”
훈련장의 바닥이 움푹 파이며 올칸의 육체가 지면으로 파고든다.
단순무식한 내려치기의 연격.
까아아앙!
이미 루인의 눈빛은 기대를 잃은 채로 투명해져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건 더 이상 기사가 아니었으니까.
상처 입은 짐승처럼 나약하고 비루해진.
약자(弱者).
까아아아아앙!
흥이 빠르게 식는다.
약자의 목숨을 취하는 건 흑암의 공포에게 있어서 모욕.
루인이 염동력을 거두자 잔인하게 번뜩이던 마력 칼날이 희미한 빛을 머금으며 공중에서 산화되었다.
훈련장의 땅에 절반쯤 박힌 채 천천히 기울어지는 올칸.
그렇게 그는 처참하게 망가진 몸으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피식.
마지막 순간까지 정신을 잃지 않았다는 건 칭찬해 줄 만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루인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전투에 집중했던 탓일까.
아니면 워낙 조용했던 탓일까.
어느새 수백여 명의 생도들이 훈련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각양각생의 충격으로 굳어져 버린 아카데미의 생도들.
루인의 시야가 순간적으로 물결치듯 이지러졌다.
마나 번.
술식 변환으로 발현된 마법을 손발의 움직임처럼 자유롭게 구현해 내는 것은 역시 지금의 경지로는 무리였다.
루인은 자신의 미약한 경지에 분노가 치밀었다.
“가자.”
그렇게 루인이 목소리 생도들을 불렀을 때.
“멈춰.”
한 기사 생도가 루인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제대로 알고 있긴 한 건가, 무등위 생도.”
어깨 위의 4개의 푸른 매듭.
이마부터 입가까지 기다랗게 팬 독특한 상흔.
그의 정체를 깨달은 세베론이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뇌전의 기사’라는 지극히 단순명료한 이명.
하지만 랭킹 1위의 이명 생도이자 기사학부를 지배하는 제왕.
‘누구를 쓰러뜨려야 하지?’라는 루인의 물음에 에덴티아 선배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던 바로 그 이름.
하이렌시아가의 방계 검수.
브훌렌 네시누스 니스할.
그런 엄청난 존재가 루인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
루인의 두 눈에 작은 이채가 어렸다.
그의 두 눈이 감정을 제어하는 기사의 눈이었기 때문이다.
왕립 아카데미에서 저런 정제된 눈빛의 기사를 마주할 줄이야.
“결투였다.”
한낱 마법 생도의 입에서 결투라는 말이 흘러나올 줄은 몰랐는지 브훌렌의 눈빛이 이채로 물들었다.
“명분 따위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텐데.”
루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장을 쓰는 것을 방해한다면 그게 누구라도 상대하지. 난 피하지 않겠다. 기사.”
“……뭐?”
선배도 아니고 기사라고 자신을 부르고 있다.
브훌렌은 마법사의 저런 완고한 자아를 지금까지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가슴을 울리며 올라오는 투쟁심, 놈을 상대해 보고 싶다는 열망이 끈질기게 스멀거렸다.
욕망을 완벽히 절제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브훌렌이었기에 그런 자신의 감정이 당황스러웠다.
“대단한 놈이군.”
단신으로 기사를 상대할 수 있는 마법사란 상상도 해 보지 못했다.
왕국에서 태동한 수많은 무투술을 경험했지만, 놈의 무투술은 웬만한 근위 기사를 압도하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배틀메이지(Battle Mage), 아니 워메이지(War mage)에 가깝다.
이런 엄청난 놈이 입학했는데 왜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지?
‘게다가 무등위라니…….’
아무런 기반도 없는 평민 출신의 무등위 마법 생도가 이렇게까지 뛰어날 수는 없었다.
“너의 가문은?”
루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아카데미의 정신을 잊고 있는 놈들밖에 없군.”
물론 기본적으로 왕립 아카데미는 생도의 가문을 묻지 않는다.
생도의 가치를 가늠하는 기준은 오로지 실력과 성과.
그러나 그건 아카데미가 생도를 바라보는 기준이지 생도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기준은 아니었다.
브훌렌이 쓰러져 피를 게워 내고 있는 올칸을 차분하게 응시했다.
“넌 랭킹 6위의 이명 생도를 쓰러뜨렸다. 너에게도 이제 명성이 따라붙겠지.”
“…….”
“무한한 결투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넌 이제 이명(異名)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앞으로 너의 랭킹을 노리는 무수한 생도들의 도전을 받게 될 거다. 하지만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지.”
브훌렌이 저 멀리 보이는 ‘포효하는 황혼’의 유적을 응시했다.
“넌 ‘황혼’의 주축 랭커를 피떡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제 황혼의 모든 기사 생도들이 널 적으로 여길 것이다. 네 그룹…….”
뭐라 말하려던 브훌렌이 황당하다는 듯이 표정이 굳어졌다.
루인의 구겨진 생도복 사이에 있는 입술 모양의 브로치를 그제야 발견한 것이다.
과연 다시 살펴보니 마법 생도들 모두가 ‘목소리’ 그룹이었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반전.
녀석이 ‘꿈꾸는 불새의 둥지’나 ‘환영의 등나무 탑’이었다면 마법학부 전체가 황혼의 분노를 감당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너희 ‘목소리’ 그룹은 이제 ‘황혼’과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다. 너는 강하다지만 과연 저 녀석들은 괜찮을까? 너희는 기댈 선배도 유적의 기반도 없다.”
그때.
“전쟁은 무슨. 어디 무슨 소설 쓰세요? 어차피 그래 봤자 아카데미가 암묵적으로 허락한 건 고작 결투가 끝이잖아요?”
“뭐?”
입탑 마법사 다프네가 위력을 떨칠 시간이다.
“이 다프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마탑 전체가 그 문제를 직시할 거예요. 황혼은 정말 마탑을 상대할 자신이 있나요?”
“마탑(魔塔)……?”
다프네가 싱긋 웃으며 고아하게 인사했다.
“현자 에기오스 님의 수제자, 다프네가 인사 올립니다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