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자신이 맞은 것도 아닌데 리리아는 온몸에 찌릿찌릿한 감각이 밀려왔다.
괴물 같은 근육을 지닌 기사 생도의 무도함보단 이어질 루인의 반응이 더욱 두려웠기 때문.
그것은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느끼게 되는 감정이었다.
멍하니 서로 대치하고 있는 기사 생도들과 무등위 마법 생도들.
누구도 먼저 나서서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상상도 할 수 없는 긴장감이 몰아친다.
“…….”
감정 없는 루인의 눈이 올칸의 시선과 얽히고 있다.
눈은 많은 정보를 보여 주는 창.
여물지 못한 인간의 눈은 반드시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니까.
하지만 올칸의 두 눈에 얽혀 있는 감정은 흔한 분노 따위가 아니었다.
강한 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스스로가 강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눈이었다.
이미 자만이나 자부심 같은 평범한 수준을 넘어선, 실패를 경험해 보지 못한 자의 무도한 눈.
도취하여 스스로 먹혀 버린.
모든 것으로부터 갇혀 버린 눈.
물론 놈의 그런 다부진 눈빛이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혈주투계를 운용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라지만, 동작을 읽을 수 없었던 상대는 가문에서 나온 후로 처음이었으니까.
기사 생도가 강해 봤자 이제 갓 소년의 태를 벗은 애송이들일 거라 생각했다.
막연하게 생각해 온 자신의 그런 선입견을 단숨에 깨부수는 놈이었다.
“너, 뭐지?”
올칸이 가슴 근육을 씰룩이며 삐딱하게 고개를 꺾고 있었다.
상대의 반응이 너무 생소했기 때문.
보통은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서거나 심지어는 바닥에 엎어지는 놈도 있었다.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싹싹 비는 놈들이 바로 지금까지 경험한 마법 생도.
한데, 달랐다.
너무나도 다르다.
한 점의 감정도 일렁이지 않는 눈으로 해부해 올 듯 직시해 오는 녀석의 눈빛이란 무슨 강자처럼 느껴질 지경.
뺨을 처맞고도 분노조차 하지 않는 녀석의 눈은 마치 ‘그놈’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이질적인 느낌에 올칸은 그냥 웃어 버렸다.
“하하! 이 주문쟁이 새끼 이거. 무등위 주제에 랭커를 흉내 내고 있네? 야, 너 뭐 되냐?”
쿡.
루인이 자신의 가슴을 찔러 오는 굵직한 손가락을 무심히 내려다본다.
“어이 주문쟁이. 대답 안 해?”
그제야 루인의 입에서 극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용렬한 놈들은 언제나 경멸을 두려워하지.”
“뭐……?”
“긍지도 명예도 없는 무인의 무력 따윈 그저 폭력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런 못난 폭력의 대가는―”
융합 마력이 폭주하듯 날뛰기 시작한다.
이내 혈주투계가 몰아친다.
“때론 죽음이지.”
스슥-
올칸의 시야에서 루인의 모습이 꺼지듯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상대의 동작을 읽을 수 없었던 올칸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몸을 비틀었다.
빠각!
어깨 부근에서 강렬하게 번지는 통증.
이내 급격하게 투기를 운용하는 올칸.
곧 그의 육중한 육체에서 강력한 기파가 퍼져 나왔다.
“이런 미친 주문쟁이 새끼가―!”
파아앙-
올칸의 투기 방출에 의해 사방에 자욱한 먼지가 일어났다.
상대의 움직임을 시야로 읽지 못했을 때 대응하는 가장 좋은 수.
올칸이 자신이 떨친 투기의 밀도가 흩어지는 부분을 매섭게 응시했다.
“거기냐! 주문쟁이!”
파아악!
올칸이 발을 구르자 지면이 움푹 꺼진다.
야수처럼 짓쳐 드는 올칸.
빠아아악-
올칸은 주먹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충격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격렬하게 번져 오는 통증.
오직 투기가 마찰할 때만이 느낄 수 있는 저릿한 감각.
‘……투기?’
분명 놈의 견장은 마법 생도의 것인데?
그런데, 울려 오는 감각의 결이 뭔가 다르다.
단순한 투기로 치부하기엔 뭔가 더 폭급하고 치밀하다.
그때 다시 놈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퍼퍽!
“흡!”
올칸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이 밀려난 자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섯 걸음.
투기를 운용하여 완벽한 자세의 가딩으로 막았음에도 무려 다섯 걸음이나 밀려나 있었다.
그리고 소스라치는 이 통증.
이건 결코 단순한 주먹질이 아니다.
하찮은 체술 같은 것이 절대 아니다.
분명 놈의 움직임은 무섭게 체계화된 무투술!
순간, 올칸의 두 눈이 일변했다.
“합!”
육중한 올칸의 동체가 점점 붉은빛을 머금었다.
강철의 하이랜더라는 그의 이명을 만들어 준 고유의 투기력.
크림슨 오오라(Crimson Aura).
붉은빛이 진해질수록, 그의 육체는 강철에 가깝게 변모한다.
이 상태가 더욱 무서운 건 육체가 지닌 모든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는 것.
동체 시력 역시 몇 배나 민감해진다.
“크하하하! 거기 있었구나!”
여전히 잔상처럼 흐릿했지만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는 놈의 움직임이 드디어 읽혔다.
올칸이 지체 없이 파고들었다.
한데.
‘피했다고?’
전력을 다한 주먹이 빗나갔다.
크림슨 오오라로 인해 수배로 증가한 민첩한 동작이 무의미할 지경.
올칸이 이를 악물며 커다란 주먹을 다시 뿌리자.
슥.
자신이 떨친 궤적을 이탈하는 정확한 대각의 반보.
‘뭐?’
놈의 동작은 느렸다.
하지만 빠르다.
이 모순을 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도저히 말이 안 되는, 그야말로 이율배반적인 감각.
그렇게 올칸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때.
루인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미끄러지는 듯한 쇄도, 기다란 잔상과 함께 파고드는 발길질.
계속 축적되는 대미지가 만만치 않았기에, 올칸은 깨끗하게 가딩(guarding)을 포기했다.
빠아아아악!
“크흑!”
분명 피했다고 여겼는데 옆구리에서 불같은 통증이 번져 왔다.
살면서 느껴 본 가장 강렬한 통증.
치욕과 분노가 참을 수 없이 솟구친다.
“이런 개같은 주문쟁이 새끼―!”
퍼퍽!
후두부를 강타한 거대한 충격에 올칸의 육체가 기우뚱 기울어진다.
그가 황급히 중심을 잡으려 했을 때.
짜아아아아악!
“크아아아아아악!”
루인이 벌겋게 익어 버린 손바닥을 무심한 눈으로 털어 내고 있었다.
씨익.
“이제야 눈빛이 좀 재미있어졌군.”
올칸은 울컥거리는 피를 삼키며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렸다.
새하얗게 이지러지는 시야, 무너져 내리는 육체보다 자존감의 상실이 더 견디기 힘들다.
구구구구구구-
올칸의 육체가 붉게 타오른다.
어떤 상황에서도 투기의 최대 개방은 자제해야 했으나 이미 이성이 마비된 상태.
안 그래도 거대한 올칸의 육체가 더욱 비대해진다.
크림슨 오오라의 극한, 적혈강체(赤血剛體).
검붉게 번들거리는 그의 육체는 마치 철탑 같았다.
입에서 피를 쏟고 있으면서도 그의 두 눈에는 활화산 같은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놈이군. 아무리 검이 없다지만 이 정도까지 날 몰아붙이다니. 그런데 너, 마법 생도는 맞는 거냐?”
피식.
“난 누구처럼 명예와 긍지를 모르는 게 아니라서.”
“뭐?”
“검도 없는 기사를 상대로 마법을 쓸 순 없지. 그게 내 방식이다.”
“…….”
6성 기사를 앞에 두고 무투술로 당당할 수 있는 마법사라.
이런 미친놈을 경험하게 되리라곤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한 올칸이었다.
마법사가 기사처럼 긍지를 말한다는 건 정말이지 새로웠다.
“그럼 이게 본 실력이 아니라는 말이지?”
“…….”
대답 없이 웃고만 있는 루인.
“좋아. 어이, 아무나 검 좀 가져와라.”
“예? 예! 선배님!”
한데 그때, 루인이 물끄러미 올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괜찮겠냐는 듯, 걱정기 가득한 시선으로.
“그럼 이게 결투인가?”
“뭐?”
“돌려 말하는 걸 싫어하나 보군. 지금 나는 죽여도 괜찮나 묻고 있다.”
“…….”
“지금까지 내 얼굴을 때린 놈을 살려 둔 적이 없어서.”
올칸의 입에서는 한마디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손발을 섞어 보지 않았다면 놈의 말에 코웃음을 쳤겠지만 지금은 저 담담한 음성이 결코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꺄드득-
이를 깨무는 소리와 함께 올칸의 모든 근육이 꿈틀거렸다.
최대한 마음을 차갑게.
온몸에 맥동하는 혈류가 천둥처럼 느껴질 정도로 집중했다.
“가져왔습니다 선배님!”
검을 건네받은 올칸이 곧게 검을 세웠다.
검을 중심에 두고 양쪽으로 빛나고 있는 그의 두 눈이 야수처럼 번뜩였다.
츠캉!
촤촤촤촤!
상상할 수 없는 속도의 연격이 몰아쳤다.
거대한 덩치가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의 민첩한 검격의 연속.
그런 살을 에는 듯한 압박 속에서도 루인은 혈주투계의 고위 체술을 연속으로 펼쳐 재빨리 영향권에서 벗어났다.
‘호오.’
순간적으로 융합 마력이 썰물 빠지듯이 빠져나갔다.
혈주투계가 극한으로 구동되었다는 뜻.
놈의 검격은 가히 고위 기사에 근접해 있었다.
“쥐새끼 같은!”
츠캉-
맹렬한 나선 베기.
타앙!
검날을 후려치는 권격.
“……!”
루인의 무심한 눈빛이 순간적으로 스칠 무렵.
훈련장의 바닥을 쓸어 올리는 올칸의 발길질.
촤아아!
뿌옇게 흩날리는 먼지, 동시에 루인의 시야로 가득 차오른 거대한 중검.
터어엉!
다시 검의 옆면을 쳐 낸 루인의 손에서 피가 뚝뚝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단순한 검격이었다면 타격을 입지 않았겠지만, 지금 올칸의 검격은 한 수 한 수가 고위 기사급의 파괴력을 지닌 공격.
여전히 검을 치켜세운 채로 짐승 같은 눈빛을 번뜩이고 있는 올칸이 입술을 가득 깨물었다.
“네놈! 끝까지……!”
하지만 루인은 여전히 담담한 눈으로 서 있을 뿐.
그제야 올칸은 상대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설마 너. 내가 전력을 다하지 않아서 그러는 거냐?”
여전히 루인이 침묵하자 올칸의 입매가 기이하게 비틀렸다.
“원하는 대로 내 목숨을 걸겠다.”
드디어 마음에 드는 눈빛이 되었다.
루인은 흥이 인 얼굴, 담담한 미소로 그의 뜻을 존중했다.
“그래. 그런 각오라면―”
광활한 융합 마력.
대마도사의 고고한 술식이.
마침내 에어라인에 현신했다.
느릿하지만 환상적인 궤적의 수인(手印).
추측할 수 없는 염동력으로 구현되는 세계.
대마도사의 지배력이,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미치기 시작한다.
츠츠츠츠츠츠-
훈련장, 아니 에어라인의 거대한 타일들이 흔들린다.
근원을 알 수 없는 힘, 세계의 관념을 초월한 무언가가 점자 형상을 갖추었다.
하나. 둘. 셋.
늘어지는 마력 칼날들.
수도 없이 분화(分化)하고 있는 무수한 마력 검(劒)들이 주인의 의지에 따라 찌르르 울고 있었다.
순식간에 어둑해진 아카데미.
지켜보던 모든 생도들이 경악한 채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무수히 많은 검들이 태양을 가리고 있다.
농밀한 의지.
아카데미 전체를 집어삼킨, 위대한 대마도사의 의지가 진노한 마신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것이 내 마법의 각오다. 기사.”
루인은 즐거웠다.
적수를 만난다는 건, 최선을 다할 상대를 만났다는 건, 무한의 증오를 잊을 만큼 기꺼운 일.
대마도사 루인은 상대가 누구든 얕잡아 보지 않는다.
만약을 대비해 힘을 조절하거나 뒷걸음치지 않는, 오로지 상대를 죽이기 위한 일격 필살의 마도.
그런 전장의 마도(魔道)가 오랜 세월을 격하고 그렇게 세상에 드러나고 있었다.
수천 개의 칼날을 드리운 채 잔혹한 미소로 웃고 있는 루인을 쳐다보며 올칸이 더욱 굳세게 검을 잡았다.
사방을 가득 메운 마력 칼날.
처음 겪는 기상천외한 마법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도 그는 억세게 턱을 당겼다.
“……와라! 주문쟁이!”
순간.
수천 개의 칼날이 모두 올칸을 향해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