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94화 (94/187)

<94화>

새벽 2시 40분.

세베론은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몸을 뒤척이던 세베론은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조용히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 다프네.

벌써부터 일어나 이미지에 빠져 있는 리리아.

마력 등불 아래 마도서를 읽고 있는 시론까지.

딱딱한 동굴 바닥, 깔아 놓은 외투 위로 올라오는 냉기, 축축한 습기와 냄새 등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잠이 들지 않는 이유는 루인이 평소 그대로의 수련을 선언했기 때문일 것이다.

에어라인 아카데미의 현실을 몰랐으면 또 모르겠지만 이미 환풍구 앞에서 다 봐 버린 마당.

쟁쟁한 검술명가의 기사 생도들, 하이렌시아가의 후원을 받고 있는 랭커들에게 평소의 상식이 통할 리가 없었다.

삐이이이이-

다프네가 설치해 놓은 알람 마법의 소음이 동굴을 기다랗게 울렸다.

천천히 일어난 루인이 특유의 담담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벌써 일어난 건가?”

세베론은 뭐라 대꾸하려다 입을 꾹 닫고 말았다.

깊은 숙면을 즐긴 생도는 루인과 루이즈 둘뿐이었다.

“정말 이대로 훈련을 할 거예요?”

슈리에의 질문.

루인이 하품을 해 대며 반문했다.

“흐암…… 무투대회의 토너먼트에 참가하겠다고 한 건 너희들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지금 너희들의 실력으로는 초반 토너먼트조차 통과할 수 없다.”

“아니, 지금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한 번은 어떻게든 해결한다고 해요. 하지만 명예와 체면에 목숨까지 거는 기사 생도들의 특성상 시비가 끊이지 않을 게 분명한데…….”

이어진 리리아의 맞장구.

“토너먼트를 치르기도 전에 기사학부의 모든 랭커들과 결투를 벌이게 되겠지.”

“그 여파가 우리에게도 미칠 수 있다는 게 더 큰 문제고.”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시론까지 저런 약한 소리를 해 대다니.

그만큼 그도 에어라인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이 만만치 않게 느껴졌다는 뜻.

세베론이 펼쳐 놓았던 외투를 정리하다가 루인을 바라보았다.

“그냥 기숙사 등록부터 먼저 하고 학부장님을 기다리자. 우리 그룹의 지도 교수로 나서겠다고 하셨으니 무슨 계획이 있으시겠지. 우리가 무투대회를 계속 준비하겠다고 한 이상 분명 도움을 주실 거야.”

고개를 끄덕이는 루인.

“그럼 너희들은 기숙사에 있어라.”

지켜보고 있던 시론이 멍한 표정을 했다.

루인의 묘한 어감이 거슬렸기 때문.

“지금 우리가 고작 무서워서 이런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닌가?”

시론이 버럭 화를 냈다.

“우리로 끝날 문제가 아니잖아! 네 객기로 인해 기사학부와 우리 마법학부 전체가 갈등에 휩싸일 수도 있는 문제다!”

짐 정리를 끝낸 루인이 헬라게아를 소환해 짐을 욱여넣으며 무심하게 시론을 응시했다.

“그럼 이게 틀린 행동, 절대로 해서는 안 될 그런 일인가?”

“아니 루인―”

“그러니까, 새벽에 운동장을 뛰는 내 행동이 뭘 잘못한 거냐고 묻고 있는 거다 시론.”

“…….”

“이렇게 앉아서 구시렁거리는 걸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기사학부와 마법학부 사이의 갈등? 그게 두렵다는 말과 뭐가 다르다는 거지?”

어느새 일어난 루인이 무심한 눈으로 생도들을 훑었다.

“난 언제나처럼 수련을 할 뿐이다. 그게 내 마도(魔道)의 근거니까.”

그 순간 생도들은 지난 수업에서 루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강하다는 확증. 그런 의심 없는 확신이 바로 나의 마도(魔道)다.

시론은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루인을 바라보다가 악착같이 이를 깨물었다.

“미친놈! 다들 뭐 해? 빨리 짐 싸지 않고!”

미친놈이 확실했지만 그래서 더 끌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으음…… 무슨 일이 있었어?>

눈을 비비며 일어난 루이즈.

그녀가 어제 이룬 성취를 떠올리자 생도들은 모두 시론과 비슷한 눈빛이 되어 버렸다.

“뛴다! 까짓거! 나도 뛴다!”

“가요!”

“질 수 없어!”

동굴 내부가 생도들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  *  *

3등위 기사 생도 베르카노에게 오늘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 날이었다.

무려 정규 기사로 가는 첫걸음, ‘용맹(勇猛)의 패도(覇道)’ 의식을 치르는 첫 번째 날인 것이다.

졸업 전에 기사 작위를 받는 기사 생도란 기껏해야 스무 명 안팎.

그것도 졸업반 시절이 아닌, 3등위의 생도에게 첫 번째 의식의 기회가 찾아왔다는 건 정규 기사의 미래가 확정된다는 의미였다.

이번 의식만 무사히 치른다면 ‘피의 결속자들’ 그룹 내에서의 입지는 랭커급으로 치솟을 터.

의식을 치른 초급 기사에겐 반드시 이명(異名)이 따라붙을 테고.

그 말은 드디어 그 콧대 높은 ‘포효하는 황혼’ 놈들과도 나란해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으하하하!”

그간의 설움.

베르카노는 웃고 있지만 눈물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검술명가 출신의 괴물 같은 검사들.

일찌감치 하이렌시아가의 후원 속에서 미친 재능을 피워 낸 천재 생도들.

그런 괴물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든 악착같이 견디고 또 견뎌 낸 오늘이었다.

그렇게 베르카노는 생도복을 기사의 정복처럼 말끔하게 다려 입고서 훈련장으로 향했다.

“후읍!”

크게 심호흡을 한다.

온몸의 구석구석을 메워 가는 상쾌한 새벽 공기.

오늘따라 유난히도 맹렬하고 날카로운 투기.

찌르르한 감각, 맑게 갠 시야까지.

컨디션마저 최상이었다.

“후우…….”

심호흡을 끝낸 그는 지난밤 몇 번이고 되새겼던 동작들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서 점검했다.

‘용맹의 패도’ 의식을 관장하는 심사관들은 가벼운 호흡, 미세한 동작의 불균형까지 귀신같이 캐치하는 괴물들.

오늘 자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동작을 펼쳐야만 했다.

그때.

-허억허억!

-흐읍! 흡!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운동장을 뛰고 있는 생도들.

깜짝 놀라며 시간을 확인했으나 분명한 새벽 5시, 아직 새벽 어스름도 물러가지 않은 시점이었다.

“제길…….”

오늘 의식의 주제는 명경지수(明鏡止水).

정적인 동작 속에서 흔들리지 않은 무인의 마음을 표현해 내야만 했다.

당연히 다수의 불청객이 탐탁지 않을 수밖에.

‘아침 식사 이후에 다시 찾아와야겠군.’

그렇게 베르카노가 입맛을 다시며 동작 연습을 미룰까 싶던 차였다.

4등위 기사 생도 헨콕.

그가 마치 사람을 죽일 듯한 시선으로 훈련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서, 선배님?”

“베르카노?”

베르카노는 이번 용맹의 패도 의식의 참가자 명단에서 헨콕 선배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마법 생도들이다.”

“예……?”

그제야 집중하며 훈련장을 바라보는 베르카노.

희미한 마력등에 얼핏얼핏 비치는 희미한 그들의 견장.

과연 틀림없는 붉은색 견장, 마법 생도들이었다.

“하? 어이가 없네?”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목소리’ 그룹이다.”

훈련장으로 성큼 나아가던 베르카노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목소리요?”

“……그래.”

베르카노는 금방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목소리 그룹의 생도들은 일반적인 마법 생도들이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고위 귀족가의 자제들.

그들에게 왕립 아카데미는 그저 인맥을 넓히기 위한 사교장에 불과했다.

적당히 인재를 영입하고 나면 어차피 아카데미를 떠날 일명 ‘인재 헌터’들.

그런 귀족가의 자제들을 함부로 건드렸다간 복잡하고 난처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기사 생도들은 웬만해서는 목소리 그룹의 브로치를 차고 있는 마법 생도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한데 그런 귀족가 놈들이 훈련장을 쓰는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 이른 새벽부터.

“시비를 걸고 싶은 걸까요?”

간혹 필요 이상으로 날뛰는 목소리 그룹의 귀족들이 있었다.

그런 애송이들은 가문의 권력을 믿고 함부로 시비를 걸고 다니다가 결국엔 하이렌시아가의 후원자를 만나면 먼지 나게 처맞게 된다.

“아니. 저건 진짜 훈련이다. 하루 이틀 달려 본 솜씨가 아니야. 특히 저 맨 앞에 놈.”

“음?”

규칙적인 입김으로 알 수 있는 지극히 일정한 호흡.

결코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

제법 탄탄해 보이는 몸까지.

“어?”

무엇보다 저 눈빛.

기세에 민감한 기사만이 느낄 수 있는 그런 위압감이었다.

“이제 제대로 보았나?”

“예. 평범한 놈은 아니군요.”

“그래. 마법 생도 중에서 저런 눈을 지닌 놈을 본 적이 없다. 저건 마법사의 눈이라기보단 기사의 눈에 가깝다.”

그런데 그때.

“뭐야? 너희들은?”

달랑 팬츠 한 장만 걸치고 훈련장에 도착한 육중한 몸집의 기사 생도.

“……올칸?”

강철의 하이렌더(Highlander of Irons)라는 그의 이명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있을까.

무시무시한 각.

전신이 네모반듯하여 마치 철제 갑옷을 따로 걸치고 있는 듯한 그의 육체.

가히 철탑과 같은 그의 단련된 신체를 바라보며 베르카노는 깊이 허리를 숙인 채로 두려움에 떨었다.

“오, 올칸 선배님!”

덜덜덜.

기사학부 전체 랭킹 6위에 빛나는 하이렌시아가의 후원 생도.

“한 번도 보이지 않던 놈들이 아침부터 왜 이렇게 많아? 너희도 단련하러 나왔나?”

“아 오늘 제가 ‘의식’이 있습니다!”

“의식? 아, 용맹의 패도?”

“그, 그렇습니다!”

피식.

“그 바보 같은 늙은이들의 취향을 잘 저격해야 할 거야. 동작도 동작이지만 특히 표정에 더 신경 쓰라고.”

“며,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쟤네들은 뭐야?”

강철의 하이랜더, 올칸이 턱짓으로 훈련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 저놈들은 목소리 그룹의 마법 생도들 같습니다!”

“뭐? 목소리?”

올칸은 한 차례 미간을 구기더니 표정을 굳히고 있는 4등위 생도 헨콕을 향해 비릿하게 웃었다.

“그래서 저 병신 같은 헨콕이 아무것도 못하고 노려만 보고 있는 거냐? 고작 귀족가의 후환이 두려워서?”

“오, 올칸!”

“너 앞으로 기사의 명예니 자존심이니 내 앞에서 말하지 마라. 죽여 버릴 테니까.”

다시 베르카노를 바라보는 올칸.

“야, 후배. 지금 당장 저 주문쟁이 새끼들 다 불러와.”

“예? 아, 알겠습니다!”

“잠깐만, 아니다. 저 새끼들 지금 뛰고 있잖아? 그래도 명색이 훈련 중인데 방해할 순 없지.”

“그럼…….”

“기다려.”

시뻘건 태양이 떠오르자 새벽 어스름이 물러났다.

마법 생도들의 훈련이 끝났을 땐 이미 몇 명의 기사 생도들이 더 모인 후였다.

“올칸 선배님!”

“역시 오늘도 나오신 겁니까?”

인사를 해 오는 후배 기사 생도들을 향해 올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이 자식들아! 그런데 네놈들은 그딴 실력으로 왜 항상 나보다도 늦는 거냐? 반성해라 애송이들아.”

“흐흐! 예 선배님! 그런데 저 주문쟁이 새끼들은 도대체 뭐 하는 짓일까요?”

“어, 저놈들 이제 끝났나.”

꽈드드득-

올칸이 굵은 목을 비틀자 굉음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거대한 동체가 일어난다.

붉은 태양빛 아래 드러난 그의 육체가 마치 초인처럼 느껴진다.

“어이 거기 주문쟁이 새끼들!”

저 멀리서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한 마법 생도가 있었다.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올칸의 육중한 몸체가 빛살처럼 쏘아졌다.

콰앙!

움푹 팬 지면.

그가 딛고 도약한 자리를 입을 벌리며 바라보던 후배들이 황급히 그를 따라 훈련장으로 뛰어갔다.

“뭐야? 매듭이 없어? 네놈들 무등위냐?”

인간 같지도 않은 올칸의 육체를 바라보며 세베론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아, 선배님! 저희들은 무등위 마법 생도들로서…… 이번에 헤데이안 학부장님의 배려에 따라…….”

“시끄럽다 세베론.”

올칸이 묘하게 고개를 꺾으며 세베론의 말을 자른 루인을 응시했다.

“아 뭐 상관없고. 어이 거기 너. 훈련장은 주문쟁이들이 쓸 수 없다는 걸 몰랐나?”

“몰랐는데.”

짜아아아악-

“허약한 주문쟁이 새끼가 갈수록 더 건방지네?”

리리아가 경악한 눈빛으로 루인을 바라본다.

그의 시뻘게진 볼이 점점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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